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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컴퓨터 조판의 “원년멤버”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5:02:21 ] 클릭: [ ]

[제2편] (하)

김민-컴퓨터 조판의 “원년멤버”

 
김민이 신문사에 배치받을 때는 20살을 갓 넘긴 처녀였다. 컴퓨터 타자는 물론 컴퓨터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했던 김민도 길림신문사 창간 30주년을 맞는 이 시각 이미 반백에 가까운 중년녀인으로 되였다.

22년이라는 세월을 길림신문사와 함께 하면서 김민은 길림신문사에서 꽃다운 청춘시절을 보냈다. 김민은 항상 “나는 신문사의 어린 ‘원로’”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하긴 길림신문사가 장춘에 본부를 옮겨서 첫 신문을 만들어낸 사람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1993년 1월 1일, 장춘에서 배판하고 인쇄한 첫 신문이 나오던 날 김민을 망라한 조판실의 모든 직원들은 밤을 패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금방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그와 녀직원들은 아직까지도 서툰 컴퓨터조작으로 타자, 배판, 교정 등을 거쳐 나중에는 필림을 빼고 자르고를 무수히 되풀이하면서 이튿날의 아침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만드는 신문이라는 긍지와 자부감에 힘든줄을 몰랐다. 당시는 세를 맡은 판공실에서 신문을 꾸리던 때라 사업환경이 조촐하였지만 누구나 불만의 소리 한마디 없었다. 집을 장춘에 두고도 김민은 거의 모든 시간을 신문사에서 보냈다. 단위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신문사는 실지 그의 집과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업무에 익숙하지 못해 거의 매일이다싶이 연장근무를 했으며 새벽녘까지 일할 때도 비일비재였다.

“다시 돌이켜봐도 힘들었지만 제일 즐거웠던 추억의 순간이였던것 같습니다.”

지난 과거를 돌이키면서 감개무량해하는 김민이다. 그렇지만 김민의 “일”은 그렇게 순탄한것만은 아니였다. 그녀와 함께 입사했고 “고생”도 같이했던 세 동료가 신문사를 떠났다. 당시 그녀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친구 따라 강남”으로 갈수 없었다.

1992년말, 신문사에서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적지않은 자금을 내여 신입사원이고 컴퓨터문맹이였던 그녀와 그녀의 세 동료들을 북경에 보내여 컴퓨터공부를 시켰다. 돌아온후 당시 신문사 리금남사장과 권세환, 김대혁 등 책임자들은 평소에는 물론 연장근무를 할 때마다 심지어 밤을 새면서 그들과 동고동락하고 기자, 편집들과 추호의 차별이 없이 대하며 배려하고 돕고 격려해주었다.

드높은 사업열정과 책임감, 짙고 뭉클한 인정으로 배려하고 키워준 신문사를 그녀는 차마 떠날수 없었던것이다.

더욱 감사한것은 신문사 당조직에서는 그녀에 대한 양성을 늦추지 않아 종당에는 모든 면에서 어렸던 그녀를 어엿한 공산당원으로 육성시킨것이다. 그로부터 사업과 생활에서의 뚜렷한 목표가 생겼고 자신에 대한 요구도 더욱 높아진 김민은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닌 신문사의 일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였고 따라서 사업의 수요와 신체원인으로 생면부지의 교정부, 광고부, 재무부, 자료실 등 여러곳으로 다녔지만 한마디 군소리 없이 허심하게 배우면서 수걱수걱 일했다. 일에는 상하귀천이 없고 다만 신문사와 독자들을 위한것이라면 무슨 일이든 족하다는것이 김민의 생각이였다.

《길림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항상 초창기때의 성취감, 자기에 대한 신문사의 양성과 도움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면서 김민은 《길림신문》은 자신의 생활이자 청춘이였다고 자랑스레 말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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