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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28]중국축구의 첫《한류전도사》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0-31 14:32:54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28)

-1997년 연변오동축구팀 4강신화를 창조한 고 최은택감독

 
지난 2007년 2월 5일, 연변오동팀(현재 연변장백산팀 전신)을 갑A련맹전 4강으로 끌어올리며 《중국축구의 첫 한류(韓流)전도사》로 널리 존경받았던 고 최은택감독이 불행하게도 페암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졌다. 연변축구팬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축구팬들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 중국 최대의 포털사이트 시나닷컴에서는 축구팬들이 댓글 릴레이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 네티즌은 《1997년 최감독님이 이끄는 연변팀의 맹활약을 지켜보며 중국프로리그에 비로소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최교수님, 천국에 계신 당신을 너무나 뵙고싶습니다. 영원히 당신같은 진정한 호인(好人)을 잊지 못할것입니다.》고 아쉬워했다.

《연변축구에 대한 업적, 중국축구에 대한 공헌을 우리 중국인은 잊지 않고있습니다》, 《최교수님이 가져다준것은 축구뿐이 아닌 인격의 가르침이였습니다.》는 내용의 글들이 올라오면서 중국 전역이 들썩이였다. 적지 않은 네티즌들은 《존경받는 한국감독님》이라는 표현으로 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을 표달하였다.
 
한피줄을 위한 마음으로

고 최은택감독은 중국에서 축구지도자로 널리 이름을 떨친 주인공. 특히 1997년 약체 연변오동팀감독을 맡아 중국 1부리그인 갑A련맹전에서 4강이란 놀라운 성적을 거두어 그해에 《최고감독상》을 받은분이다.



《그런 식으로 공 차려면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지으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을것이면 논밭 갈고 부모께 효도라도 하라.》며 정신력이 흐트러진 선수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던, 중국축구계가 《최교수님》이라 깍듯이 부르며 존경을 표했던 최은택감독, 당년에 그가 연변에 온것은 결코 금전과 명예를 탐내여 온것이 아니였다. 오직 겨레를 위하는 깨끗한 마음에서, 한피줄로 이어진 조선민족의 영예를 빛내주기 위해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은것이였다.

당시 구락부에서는 최은택감독이 로임을 받는것을 사절하자 달마다 생활비로 3만원을 지불해주었다고 한다. 중국의 일반 평민으로 말하면 그 돈이 거액일수 있겠지만 국내 갑A팀 감독, 특히 외국적 감독으로서는 보잘것없는 액수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당년에 전위환도팀의 사령탑을 잡았던 독일적 감독 슬라프나가 이렇게 묻기까지 했겠는가?

《듣자니 당신은 연변오동팀에서 로임을 받지 않는다는데 그게 정말인가?》

그러자 최감독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난 도우러 온것이지 돈을 위해 온것이 아니다.》

최감독은 로임을 받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구락부에서 내주는 생활비마저 태반 선수들한테 소비했다고 한다. 나젊은 선수 왕광위가 돈지갑을 잃었다는것을 알고 그는 자기 돈지갑에서 500원을 꺼내여 왕광위에게 주었고 외국적선수들의 장거리 전화료금을 한번에 1000원씩 지불해주기도 했다.

당시 60세 고령이고 관심병으로 앓고있던 최감독은 《축구선수이기전에 인간이 되라!》고 시시각각 선수들을 편달했다.

평소에 최은택감독은 비가 오나 해볕이 내리쬐나 이미 작성한 훈련방안을 변동하지 않았는데 그 자신도 서늘한 그늘에서 선수들을 지휘한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비를 맞고 해볕에 타면서 선수들의 매 하나의 동작까지 구체적으로 세심히 가르치군 하였다.

연변오동팀이 8.1팀과의 원정경기를 치르기 전날에 비행장에서 최은택감독은 뜻하지 않은 원인때문에 갑자기 중풍징조가 나타났다. 코치와 선수들은 석가장으로 가지 말것을 최감독에게 권고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석가장에 이르러 선수들은 억지로 최감독을 병원에 호송하였다. 하지만 8.1팀과의 경기직전에 그는 어김없이 경기장에 도착하여 감독석에 앉았다. 이 광경을 보고 선수들은 저마다 눈물이 글썽하였다. 이러한 감독앞에서 선수들이 어찌 결사전을 벌리지 않을수 있으랴!

연변팀의 로선수였던 황경량은 이렇게 감명깊게 말하였다.

《최감독의 모든 소행은 죄다 우리를 위한것이다. 로임도 받지 않으면서 림시로 도와주러 온 사람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무슨 리유로 열심히 뛰지 않을수 있겠는가!》
 
엄한 규률 엄한 요구

평소에 그처럼 인자하고 마음씨 후더운 최은택감독이였지만 일단 정상훈련에만 들어가면 어느 선수이거나를 막론하고 엄하게 요구하는 《마귀감독》으로 되였다.

최은택감독의 새로운 관념은 체력, 속도, 박투, 진공, 쾌속패스를 강조하며 고정적 진영을 확정하지 않는것이였다.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은후 그는 《규률위반행위가 있는 선수는 제명한다》는 철같은 규정을 세운 동시에 전체 선수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팀에는 절대적주력이 없기에 누구나 주력이 될수 있고 안될수도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훈련에서 표현이 출중하고 상태가 좋은 선수면 경기에 출전할수 있고 주력선수로 될수 있었기에 특히 나젊은 선수들은 훈련에서 고도의 적극성을 보이였다. 당시 팀에는 근 30명 선수가 있었는데 태반이 전해의 후보선수거나 2팀에서 갓 올라온 신진들이였다. 그들은 비록 정식경기에 등장하지는 못했으나 주력선수들을 수시로 위협하였다. 연변오동팀의 경쟁기제는 이렇게 형성되였다.

이 토대우에서 최은택감독은 팀에 이름난 선수가 별로 없는 현황을 감안하여 팀전체가 하나로 단합된 시력을 강화하는데 모를 박았다. 매일 오전, 오후 훈련을 하는외 전 팀의 식전훈련을 견지하였는바 이는 이전에 없었던 일이였다. 팀의 훈련시간을 매일 다섯시간내지 여섯시간으로 규정, 이같이 많은 훈련량은 연변팀에 있은적이 없었다. 한편 최감독은 리론강의를 결부시켜 선수들마다 정체적관념, 정체적배합의식을 갖추게 하였다.

갑A의 기타 팀 감독들은 선수들의 훈련질을 높이는 문제에서 늘 골머리를 앓았다. 체능훈련은 강압적규정이 있으니 해결할수 있었으나 기전술훈련에는 강압적규정이 없고 표준이 없으니 선수들이 진력하지 않아도 감독은 속수무책이였다. 하지만 연변팀에서는 이 문제가 스스로 해결되였다. 오동팀에서는 훈련하지 않거나 훈련에 열심하지 않는다고 인정되면 다음달 로임이 퍽 줄어들고 훈련에서 같은 실수가 거듭되면 경기에 등장할 자격을 잃게 되였다.
 
《내 지도밑에서 잘하지 않으면 팀을 떠나야 한다.》

최은택감독은 팀의 실력이 잠시 손해를 받을지언정 규률위반행위와 라태현상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훈련을 잘하지 않았을 경우 선수들은 벌금을 당하거나 육체적책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이를테면 1대1, 2대1의 대항훈련에서 공을 빼앗기였을 경우에는 인차 이악스레 달려들어 공을 되빼았아야 한다는것이 요구인데 처음에 적지 않은 선수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열성이 부족하였다. 그때마다 최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훈련을 중지시키고 100메터, 200메터 고속도달리기 처벌을 안기였다. 워낙 10메터, 20메터 달리면 되였을것을 그렇게 하지 않아 열배나 더 달리는 처벌을 받은것이였다. 이런 고강도 훈련에서 전해의 주력이였던 몇몇 이름있는 선수들은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해 스스로 팀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리하여 최은택감독의 전법에 적응되지 못하는 선수는 자연 도태되고 그의 전법에 적응하는 선수는 남게 되였다. 그후부터 선수들은 감독을 존경하고 자각적으로 훈련에 참가하였는데 훈련시 좀 주의하지 않아 꾸지람을 듣거나 육체적책벌을 받아도 최감독을 원망하거나 불만을 품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모든것을 내심으로 달갑게 받아들였다. 한것은 최감독이 곳곳에서 자기들을 생각하면서 지불한 신고가 자기들이 기울이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준엄한 시련
 
최은택감독의 세심한 가르침밑에 팀 내부가 전에없이 단합되고 선수들의 사기도 부쩍 높아졌다.

《연변팀은 올 련맹경기에서 지난 3년간 갑A보존을 위해 아글타글하던 전철을 더는 답습하지 않을것이며 목표도 갑A보존이 아니라 8강에 진입하는것이다. 그런데 내가 감독을 2년내지 3년 한다면 몰라도 이제 경기를 앞둔 시간은 두달밖에 안되니 별수없이 강압적수단으로 엄하게 훈련시킬수밖에 없다.》

최은택감독은 여느때보다 시간의 긴박성을 느끼였다.

당시 연변팀에는 전해의 주력선수였던 고종훈과 리광호, 후보선수였던 황경량, 장경화, 황동춘, 현춘호, 리찬걸 등과 2팀에서 갓 선발해 올려온 김청, 문광혁, 왕광위, 송소우 등 선수들로 근 30명이나 있었지만 실제 개인기술이 뾰족하게 뛰여난 선수는 몇명밖에 안되였다. 이런 《로중청》 3부류의 선수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정체적힘에 의거해 싸우는 팀으로 묶어세운다는것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최은택감독은 우선 선수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각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료해한후 그 개인적인 능력을 잘 배합할수 있는 전술적인 능력을 갖도록 인도하였다. 선수들의 개인기술은 하루아침사이에 크게 달라질수 없기때문에 그들의 정체적배합의식을 높이고 정신적으로 잘 단합시켜 열심히 싸울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에 알심을 넣었다.
 
축구선수로 말할 때 체능은 최저의 조건이였으므로 최감독은 특히 선수들의 체능훈련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대운동량훈련과 초부하체력훈련을 통해 매개 선수들의 체능상태를 극한에 도달시켰고 또 대항성경기훈련을 통해 선수들지간의 정체적전술배합을 보다 숙련되게 하였다.
 
허나 이러한것들은 필경 아주 짧은 시간내에 진행된것이여서 폭풍우의 시련을 받기 마련이였다. 최감독이 창도한 공격형축구의 새로운 전법을 익힐사이도 없이 대부분이 신진들이 대오를 무어가지고 총망히 97갑A련맹경기에 뛰여든 연변팀은 첫5륜경기에서 1무 4패로 겨우 1점을 기록하고 갑A말석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였다.
 
그러자 사회 각계로부터 이러저러한 평판, 지어 어떤 사람들은 감독교체를 부르짖기까지 하였다. 팀의 성적부진에 대하여 최은택감독은 코치와 나어린 선수들을 원망한것이 아니라 드넓은 흉금으로 모든 책임을 혼자서 걸머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선 연변팀을 춰세울수 없다며 주동적으로 사직을 제기하였다.

연변체육운동위원회와 축구구락부에서는 최은택의 사직을 접수할수 없었다. 연변축구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려면 최은택교수와 같이 능력있는 감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인정한 그들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의 이러저러한 평판을 물리치고 최은택교수를 계속 감독으로 모시기로 결정한외 전체 선수들에게 감독의 두리에 굳게 뭉쳐 당면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 분투할것을 호소하였다.

 
팀의 코치들도 최감독의 요구에 적극 배합해나섰다. 평소에 최감독의 의미를 선수들에게 많이 전달하고 또 선수들이 리해하지 못하는것을 제때에 최감독에게 반영함으로써 감독의 요구와 현실간에 존재하는 모순을 풀고 상호지간에 호흡이 통하게 하였다.

주정부에서도 최감독의 신로교체를 적극 지지해나서면서 제1단계에서의 성적부진의 책임이 《최감독에게 있지 않다》고 명확히 태도를 표시하였다.

최은택감독은 외계의 평판을 모를리 없었지만 바로 정부와 구단, 선수들의 드팀없는 믿음과 적극적인 부추김속에서 다시 연변축구를 개조할 방도를 구사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연변축구의 현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비록 첫 5껨의 리상적이 되지 못한 경기성적에 대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다소 실망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최감독은 자신이 창도한 352공격형축구의 전술과 전법에 대해 추호의 동요도 없었으며 훈련방법도 개변하지 않았다.

《갑A보존은 물론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실로 실력이 미약해 강급해도 무방하지 않나싶어요. 연변팀의 이 상태를 그냥 두고서는 연변축구의 전도를 운운할수 없거든요. 이 상태를 돌려세우지 않고선 안되는거지요.》

제1단계경기에서 역경을 몸소 치르고난 최은택감독은 어느 정도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팀의 사령탑을 잡은 그로선 팀이 아무리 참패하고 험악한 경지에 이르렀어도 절대 락심한 내색을 내비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저곡에서 헤여나올수 있다는 신심을 갖도록 선수들을 고무격려하였다. 절망에 빠졌던 선수들은 새로운 신심을 가졌다. 오히려 최감독의 새로운 훈련방법과 기전술에 적응하면서 온몸이 물자루가 되여 열심히 훈련하였다.

5월 하순에 최은택감독은 휴전기간의 훈련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연변팀을 이끌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 체류해있는 20여일동안 연변팀은 한국의 프로팀, 실업팀 등과 도합 14껨의 경기를 치렀다. 최감독은 단순히 연변팀을 이끌고 경기를 치르는데만 그친것이 아니라 한국의 이름있는 감독들을 모셔다 연변팀의 전법에 대한 수정의견을 적극 청취하였다. 이렇게 훈련과 경기가운데서 연변팀선수들은 실천속에서 352전법의 진정한 함의를 터득하였고 배운것을 경기에서 실천하게 되였다. 최은택감독은 또 체능이 좋은 나젊은 선수들을 대담하게 등용하여 그들의 충만된 체능과 완강한 달리기능력, 적극적인 공빼앗기에서 352전법의 정수를 체현시키기에 왼심을 썼다. 이런데서 팀의 기전술수준은 눈에 뜨이게 제고되였고 아울러 일부 나젊은 선수들의 진보가 매우 빨라졌다…
 
97갑A련맹전 제2단계경기가 시작되였다. 최감독의 지도하에 경기상태가 정상에 오른 연변팀은 첫껨경기인 8.1팀과의 대결에서 2대0으로 승전고를 올리고 다시 실력이 상당한 전위환도팀을 2대1로 보기 좋게 꺾어놓음으로써 중국축구계와 여론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특히 전위환도팀과의 경기에서 연변팀은 전면진공 전면방어의 위력을 진짜로 과시하였다. 전 팀의 선수들이 시종 쉼없이 뛰여다녔고 끊임없이 진공하였으며 공격점도 어느 한 선수한테 국한되지 않았다. 공격수와 하프선수는 빈번이 위치를 바꾸면서 륜번으로 공격하였는데 대방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후반전 20분후부터 연변팀은 완전히 경기주동권을 잡고 전위환도팀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이 기세를 빌어 연변오동팀 선수들은 필승의 신념, 완강한 박투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매껨의 경기를 치러나갔다. 뽈을 차면 찰수록 더욱 날래고 용맹해지는 오동용사들은 강팀과의 대결에서도 대담히 공격형축구를 구사하여 곧잘 묵사발을 먹이였다. 이리하여 연변팀은 직업축구련맹경기이래 처음 련속 9껨의 불패의 신화를 창조하였고 최종 4등이란 좋은 성적을 따내였다.

*         *         *

97갑A련맹전 연변오동팀의 성공은 연변팀 사상 첫 한국적 외국인 감독이였던 고 최은택감독의 끈질긴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하기에 당년에 그에겐 수두룩한 영예의 꽃다발도 안겨졌다.《연변조선족자치주 영예시민》, 《연변대학 겸직교수》, 《길림오동약업집단 체육고문》, 《97전국축구갑A련맹전 최우수감독》…

특히 그가 중국축구에서 뿌리를 내린 뒤 1998년부터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리장수 등 많은  한국인 감독들이 련이어 중국프로축구에 축구 한류를 전파해나갈수가 있었다.

참으로 연변축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사심없이 헌신해왔던 고 최은택교수, 정녕 최은택교수야말로 연변축구를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존재-거룩한 형상으로 높이 솟아있을것이다!  

/허도


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를 마치면서

 
바로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1965년, 연변의 조선족선수(한족 1명)들을 위주로 한 길림성축구팀은 중국 2부리그에서 1부리그에 진출한 첫해에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의 우승을 따내면서 동북호랑이의 영예를 만천하에 떨쳤고 중국축구계를 놀래운 연변신화를 엮었다.

그로부터 50년후인 2015년 축구진흥의 훈풍을 타고  연변장백산팀은 장백호랑이의 위용을 만천하에 떨쳤다. 을급팀에 탈락했다가 보충명액으로 갑급에 가까스로 잔류한 연변팀이 갑급리그1위로 슈퍼리그에 진출하는 신화를 써내면서 중국축구계가 들썽이고있다. 개혁개방이후 시장화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원인으로  연변축구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종 중국축구계에서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며 단결되고 용감하며 도전하는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문화브랜드의 하나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정신재부의 하나로 되였다. 

 
연변축구팀 설립 60주년, 전국우승 50주년을 맞으면서 《길림신문》 축구사이트는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연변조선족자치주체육국, 연변축구협회, 연변장백산축구구락부의 후원으로 총 28편에 달하는 대형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를 펼쳐 연변축구50년을 회고하고 현황을 점검하고 앞날을 내다보았다.
 
보도는 1965년 전국축구갑급팀 우승을 한 일부 대표적 원로들과 각 시대 연변축구의 발전을 위해 공헌을 한 축구인과 공신들을 찾아 그들의 업적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조명하였다. 이 계렬보도는  사회각계 많은 독자들의 환영과 관심을 받았으며 해내외 많은 매체들이 전재하여 큰 환영을 받았다.

취재중에 아쉬운 점이라면 부분적인 원로들이 타계하였거나 자료류실이 엄중하여 미처 정리할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문화대혁명시기와 개혁개방이후의 일부 축구인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재를 접수하지 않아 일부 대표적 인물취재가 루락된것이다.

연변축구의 지난 50년의 려정을 돌이키고 앞으로 나아갈 발전을 제시하고저 시작된 이번 계렬보도는 각계의 지지로 예기의 목적에 도달하였다. 이번 계렬보도에 물심량면으로부터 협조를 주신 여러 부문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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