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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50년24]연변축구에 인생을 건 사나이-고훈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0-22 07:57:40 ] 클릭: [ ]
연변팀 전국 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24)
 
음악인의 아들로 태여나 부모의 강권도 마다하고 오롯이 축구만을 사랑했던 한 사나이, 축구선수로부터 조리감독, 코치, 감독 겸 구락부 주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공과 좌절을 겪었고 또 그 축구로 하여 억울하게 감옥행까지 했던 사나이, 연변축구 사상 가장 오래동안 감독직에 있으면서 연변팀에 《거물사냥군》이라는 미명을 만들어준 장본인인 고훈의 축구인생은 연변축구력사의 중요한 한페지가 아닐수 없다.
 
예술인가정에서 태여나 축구를 선택
 
1958년 10월 30일, 훈춘의 한 음악가정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예술을 전공하라는 부친 고자성(연변가무단 창시인의 한사람)의 권유도 마다하고 축구를 선택했다.
 
1974년 부친 몰래 연변체육운동학교에 입학한 고훈은 훤칠한 키와 순발력 그리고 출중한 개인기와 판단력으로 길림성3팀(연변청년팀)에 발탁되였지만 허리병으로 뽈을 찰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축구에 대한 집념으로 연변군분구 축구팀에 응시하여 축구선수로 된다. 1976년에는 당시 국내 갑급리그에서 5대 강팀중 하나였던 심양부대축구팀에 입단하고 1977년부터 팀의 간판공격수로 중국갑급리그를 주름잡는다.
 
 
 2005년 갑급진출후의 연변팀 가족사진
 
 
1981년 고향축구팀이 있는 연변에 돌아오고싶은 마음이 불같았던 고훈은 병을 핑게로 연변군분구 정치부로 전근하여 연변군분구축구팀 감독 겸 선수로 되였다. 그로부터 고훈은 길림성팀(연변팀)의 감독 정지승의 부름을 받고 길림성팀의 유니폼을 입고 남정북전하게 된다. 

축구감독의 길을 모색하다
 
1985년 10년간의 군생활을 마친 고훈은 직업축구선수생활을 하면서 짬시간을 내여 심양체육학원 통신학부를 졸업하고 1990년에는 전국 제1기 축구감독강습반에 참가하여 길림성내 첫 사람으로 국가A급감독 자격증을 발급받으면서 점차 감독으로의 탈태환골을 준비한다.
 
그후 그는 연변팀의 조리감독, 코치 등을 력임하였는데 1998년 4월 27일, 오동선풍을 몰아왔던 최은택감독의 사직과 더불어 연변오동팀의 집행감독으로 임명되였다. 40세의 젊은 나이의 고훈은 놀라운 의력으로 사면초가의 압력을 이겨내고 5월 17일, 장춘 남령경기장에서 강호 대련만달을 1:0으로 이기는 신화를 엮어냈으며 그로부터 연변팀은 《거물사냥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99년 고훈의 지휘하에 길림오동팀은 순위 선두를 달리던 산동로능, 상해신화, 사천전흥, 료녕무순 등 팀을 차례로 타승, 최은택교수의 뒤를 이어 재차 오동선풍을 일으키면서 진정한 《거물사냥군》으로 갑A에 군림하였고 그 본인은 중국 유명 스포츠지로부터 두번이나 최우수감독으로 선정되였다.
 
 
2004년 갑급리그 진출에 성공한후 고훈감독과 팀주장 한송봉
 
《최은택교수는 우리(연변팀)에게 프로축구란 무엇인가를 가장 처음 깨우쳐준 사람이다. 프로의식, 프로정신과 전업축구가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가를 실제행동으로 보여준 훌륭한 교수였고 감독이였다.》 고훈은 최은택교수로부터 전수받은 축구전술, 경기운영 등 축구사상은 지금도 여전히 선진적이라고 평가한다.
 
2000시즌 7륜 경기가 끝난후 신체적원인으로 연변팀을 떠난 고훈은 11월 10일, 자비로 축구왕국 브라질로 축구연수를 떠난다. 그해 연변팀은 갑B로 강등하고 절강록성에 팔려가는 불운을 지닌다. 
 
2002년부터 을급팀인 상해천나팀(이듬해 상해련성에 합병됨)의 감독을 맡았던 고훈은 2003년 팀이 제2단계 경기에 진출하자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팀이 연변팀에 져준다면 프로정신에 위배되고 연변팀을 이긴다면 고향인민들에게 미안하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운명이랄가, 두 팀은 2004년 을급련맹경기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고 나란히 갑급리그에 진출했다. 이해 그는 연변세기팀을 이끌고 17련승, 18경기 무패행진 등 화려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연변돌풍을 일구었다. 결승전이 끝난후 두 팀 선수들이 고훈감독한테 달려와 함께 인사하는 감동이 출렁이는 장면이 연출되였다.
 
 
2004년 갑급리그 진출에 성공후 팬들과 함께 경축하고있는 고훈감독
  
 
연변팀의 전성기와 쇠락기를 함께 겪다
 
갑급리그에로 복귀한후 고훈감독은 자금난으로 허덕이는 연변팀의 사령탑과 구락부 주임까지 력임하면서 팀의 생존을 위해 로심초사하였다. 2007시즌 연변팀은 6위로 비교적 안정한 상태를 유지하였지만 연변 체육국과 축구협회에서는 축구사상 전무후무한 감독선거를 단행, 락선된 고훈은 사재를 털어 선수들의 생활비를 대줄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고향축구팀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고훈감독의 이름이 중국축구팬들에게 다시 알려진것은 2012년 2월 18일, 2006시즌 광주의약팀과의 승부조작사건에 련루되여 유기도형 3년 판결을 받았을 때였다.
 
이 사건에 대해 고훈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때 부친이 금방 돌아가고 집에 있을 때였다. 구락부가 자금난으로 선수들의 로임을 체불하여 선수들이 상급부문을 찾아가서 로임을 해결해달라고 시위하기도 했다. 직업도덕에 어긋났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다. 나한테 차례진 3만원은 팀 경비로 남겼다가 이듬해 조선팀이 연변을 방문했을 때 접대비용으로 썼다.》
 
 
심양부대시절의 고훈(앞줄 왼쪽으로부터 두번째) 
 
하지만 그는 60만원 회뢰죄로 2년을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구락부의 명의로 선수들의 밀린 로임을 발급했지만 자칫 나어린 선수들을 법정에 세울수도 있고 그러면 그들의 축구인생을 희생시킬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쓴것이다. 그는 자기가 벌을 받는 대가로 연변축구의 불씨를 남겼던것이다.
 
출옥후 연변장백산팀의 홈장경기는 한번도 빼놓지 않았고 훈련까지 지켜보았다는 고훈은 올해 연변장백산팀이 이룩한 슈퍼진출 쾌거에 대해 매우 감개무량해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박태하감독이 참 잘한다.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줄 알고 훈련과 경기 운영이 매우 령활하며 기전술이 다양하다. 임종현국장을 비롯한 체육국 지도자들이 참으로 잘 해주었다. 후근을 보장하고 권리를 감독의 손에 쥐여주어 감독의 지휘권을 든든하게 하였다.》
 
축구와 함께 뒹굴고 울고 웃은지 어언 40여년, 그중 30여년을 연변축구발전에 바쳤던 강철의 사나이 고훈, 연변축구의 전성기와 쇠락기의 가장 힘들었던 7년간 팀의 사령탑을 맡았던 감독으로 또 버림까지 받아야 했던 동북사나이 고훈, 자기가 걸어온 파란만장했던 축구인생을 개괄하면서 그가 한 의미심장한 한마디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나는 작고 연변축구는 크다. 우리는 연변의 축구선배들이 남긴 연변축구정신을, 그 불씨를 이어왔을뿐이다. 이제 그것을 김광주, 리광호, 고종훈, 장경화, 백승호, 문호일이 이어가고 윤광, 지문일, 배육문, 강홍권, 최민 등이 이어갈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김룡 김태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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