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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7] 1962년 중국축구 최우수득점수-지운봉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0-01 10:50:50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17)
-축구명장원로들이 회고하는 60년대 길림성축구팀 지운봉대장

 
일전에 필자는《길림신문》체육담당 김룡기자가 1965년에 길림성대(연변팀)가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에서 1등을 했을 때 당년에 길림성대 대장인 지운봉의 사적을 취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룡기자가 제공한 취재 선색은 도문의 신창근씨 한분 뿐이다.

36세 나이에 42년 전에 타계한 저 세상 사람의 사적을 취재하기란 그야 말로 앞길이 막막한 취재였다.

그래서 연변대학체육학원 허준호전임원장이《오선생이 제일 보람이 있고 제일 간고한 취재를 맡았구만》하면서 몇 년전에 그가 지운봉을《중국축구명인록》에 올리는 임무를 맡고 그의 사적을 취재했는데 편집부의 요구에 따라 중문으로 1000자 가량 되는 원고를 작성하기마저 정말 힘들었다고 하였다.

지운봉은 1965년에 28세 나이에 길림성축구팀 대장을 맡고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에서 1등 상과 풍격상을 함께 따냈고 3년전인 1962년에 벌써 중국축구《최우수득점수》(最佳得点手)의 명예를 따낸 중국 축구의 명장이였다.
 
 
지운봉가족사진.

그런데 지운봉이란 이름이 금방 빛을 뿌리기 시작한 1973년에 그가 36세 나이에 간암과 심장병으로 세상을 영별할 줄이야!.

지난 9월 25일, 전 세기 5~60년대 8.1팀 축구운동건장으로 주은래의 접견까지 받은 축구명장 박광철(80)옹이 지운봉을 그리는 애탄이다.

《중국 축구계의 떠오르는 새별을 30대에 별찌로 만들어 땅에 버린 저 하늘이 너무나 무정했구나!》
   
《전국10대 최우수득점수》

9월 24일 필자는 신창근씨를 만났다. 지운봉은 신창근씨(60)의 고모부란다.

신창근씨는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보고 듣고 한 고모부이야기와 아버지가 보관했던 고모부의 보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창근씨에 따르면 고모부는 아주 상냥하고 자상스럽다. 방학이면 늘 고모부네 집에 놀려갔는데 그때는 헝겊뽈을 만들어 차던 시대라 고모부네 집에는 언제나 가죽뽈이 있었기에 창근씨는 가죽뽈을 안고서 동네를 다니며 자랑했단다.

고모부네 집에는 늘 길림성팀의 사람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렸는데 고모부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다.고모부는 운동에 흥취가 있는 나어린 아들 (池泉)에게 《운동을 하려면 술과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아버지의 엄격한 교양으로  국가청년팀에까지 뽑혔던 지천이는 지금까지 담배는 피우나 절대 술은 절대 안 한단다.
 
 
《1962년 전국10명 최우수득점수》(뒷줄 왼쪽 세번째 지운봉)

《문화혁명》때 고모부는 뽈을 차려 쏘련에 다녀 왔다는 것으로《쏘련특무》라는 억울한 모자를 쓰고 비판투쟁을 받으며 농촌(도문시 량수진석두촌)에 쫓겨가 사상개조를 하였다.

신창근은 고모부가《해방》을 받고 석두촌에서 돌아 오던 날 전 촌의 사람들이 울면서 큰길까지 나와 고모부네 일가를 전송하는 것을 보고 고모부가 농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었을가를 알았다며 자애로운 고모부를 그렸다.

고모부는 병상에서도 어린 아들에게 축구리론과 기술을 전수하기를 잊지 않았다.
사망직전에 고모부는 당년에 길림성팀감독인 정종섭에게 아들 지천이를 훌륭한 축구운동원으로 배양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농촌에서 돌아오자 고모부는 길림성 3대감독으로 임명을 받고도 병 때문에  임직을 못해보고 안타갑게도 인생을 마감하였다.

고모부의 사망에 국가체육운동위원회와 각 성시해당부문에서 조문단을 파견했고 여러   관계부문의 책임자들이 친히 화환을 보냈다.

고모부의 사진, 운동복 등 유물은 신창근네 보관하다가 지천이가 성가한후 그에게 넘겨줬다.

신창근씨는《1962년 전국 10명 최우수득점수(射手) 》들의 합영사진과 1958년에 쏘련에서 지운봉을 소개한 보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주력 공격수》

이하는 신창근씨가 제공한 1958년 8월 6일에 쏘련 샤흐타르 카라간디(卡拉干达市)에서 진행한 중국 장춘축구팀과 쏘련 샤흐타르 카라간디 전업 B팀간의 국제축구우의경기를 소개한 보귀한 력사자료를 도문경제개발구의 진광수씨가 번역한 것이다.
 
 
구쏘련 간행물에 소개한 지운봉사적.
 
ㅡ 중국운동원들에게 형제적인 문안을 드린다

형제국가 중국은 최근에 체육사업 발전에 허다한 조치를 대고 있다.

그 결과 매우 많은 전업운동원을 배육한데서 매년 중국체육대표단이 여러 가지 국제체육활동과 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다. 이에 근로한 샤흐타르사람들은 큰 자호감을 느낀다. 특히 우리가 자호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제1차 국제경기를 우리의 제일 우호적인 벗인 중국운동원들과 벌리기 때문이다.

ㅡ 중국에서 운동의 도시로 불리는 장춘에는 400여개 무명단체들이 운동에 종사하며 30여만 인구에 매 3명에 1 명이 운동에 종사한다. 장춘에서는 대형운동을 거행하기 위하여 대형운동장을 두 곳에, 자전거훈련관, 수영관, 4000여개 좌석의 체육광장, 80여개 운동장을 새로 건설했고 기업과 공장직장, 기관, 학교에서 체조운동을 견지한다.

이번에 온 장춘팀의 지운봉선수는 이팀에서 교체를 하지 않는 절대《주력공격수》로 우리가 잘 지켜봐야 할 선수다.

《나는 지운봉을 추천합니다》

신창근씨가 《우리 고모부의 사적을 도문철로 박광철축구로장이 잘 알것입니다》는 선색 제공에 따라 필자는 9월 25일 저녁 7시경에 박광철옹(80)을 만났다.

박광철옹은 1957년에 연변청년팀에서, 이듬해에 연변축구팀에서, 1960년부터 10년간 8.1팀에서《주력변선공격수》로 활약한 60년대 중국축구운동건장으로 10차나 출국하며 1963년에 주은래의 접견까지 받았다. 그후 8.1팀이 해산되자 1969년에 조직에서는 그에게 국가청년팀의 감독으로 배치, 허나 그는 고향의 어머니가 걱정되여 조직의 배치를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온 중국 축구명장이며 원로이다.

 
첫줄 왼쪽으로부터 세번째 지운봉.

1973년에 지운봉이 상해에서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 올 때 박광철은 도문철도분국 체육위원회주임신분으로 도문시체육위원회 허명룡주임과 함께 기차역에 나가서 지운봉을 맞이 하였다.

박광철옹은 축구는 의식이 기초, 전술이 수단, 체질이 소질이라고, 지운봉은 의식, 기본이 좋고 전술이 다양하며 속도가 빠른 머리로 뽈을 차는 출중한 선수였다며 몸이 유연하고 뽈을 곱게 찼는데 특히 하프에서 공간을 리용해 자로 재는 듯이 뽈을 정확히 공급했다고 한다.

박옹은 필자가 보여주는 《1962년 전국 10명 최우수득점수》 사진과 《길림신문》에 실린《연변축구 50년 최우수인물》 투표 명단을 세심히 보더니 사진속의 뒷줄 왼쪽 세번째가 지운봉이고 앞줄 오른쪽 첫 사람이 지청룡이라고, 《길림신문》에 실린《사상최우수진영》후보명단에 있는 로지천이 지운봉의 아들이라며 지천이가 어머니가 개가한 후 계부의 성(로)에 자기의 이름(지천)을 붙혀 이름을 개명했다고 했다.

《부자간이 함께 최우수인물투표 명단에 올랐으니 대단하지요》,《나는 지운봉을 <공훈인물>로 추천합니다》고 박옹이 《투표》했다.

지천이는 1967년 생으로 1981년에 연변주체육운동학교에 입학, 1986년에 국가청년팀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길림성팀에 입대, 1992년에 다리뼈부상으로 퇴역하였다.

 
지운봉을 공훈인물로 추천하는 박광철옹.

신창근씨를 통해 그의 고모(신화옥, 지운봉의 부인)를 취재하려던 차 고모가 불시로 북경에 있는 딸네 집으로 간다며 신창근더러 원 길림팀 박광순옹을 찾으면 고모부의 사적을 잘 안다기에 9월 29일 필자는 박광순옹을 전화취재를 하였다. 《지운봉이 연길시 2중, 연변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몇년간 놀다가 1956년에 기림성축구팀에 입대하였소, 그는 1959년(?)에 국가청년팀에서 훈련을 받은 출중한 하프죠, 그시절에 우리 조선족의 량지(兩池)가(지운봉,지청룡) 중국 축구계를 들썽했다오.》

《최우수득점수》

지운봉의 사적을 허준호나 그의 삼촌 허명룡이 잘 알것이라는 박광철옹의 소개를 받고 필자는 그날 밤으로 여러 곳에 련줄을 달아 연변대학체육학원 전임원장 허준호의 전화번호를 알고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늦은 밤에 연길에 있는 허원장을 찾았다.

허원장은 《오선생이 제일 보람이 있고 제일 간고한 취재임무를 맡았다》며 추석날에 상해로 떠나니 래일(26일)아침에 부모산소(석현진 수남촌에 있음)를 가는 길에서 만나 자기가 몇년전에 《전국축구명인록》에 올리려고 힘들게 조사한 친필자료를 보이겠다고 했다. 정말 감사했다. 늦은 밤에 전화를 한것이 천만 다행이였다.

이하는 허준호전임원장의 친필자료다.

지운봉, 당원, 1937년 연길 출생. 길림성축구팀 대장으로 지난 세기 60년대 중국축구계의 《미남자》로 불렸다.

지운봉은 축구장에서 머리가 명색하고 빨리 돈다. 그의 축구기술은 세련되기로 길림성기술파의  전형이며 중국 축구단의 1류수준이다.

1962년 《북경석간》(北京晩報)은 국가청년팀의 지운봉을 중국 축구 《최우수득점수》라고 칭하며 그의 사적을 보도했다.

 
쏘련 홍보문에 《주력공격수》로 소개 된 지운봉

지운봉은 수차나 쏘련, 조선 등 나라에 출국하였다.

1965년 중국 갑급축구련맹경기에서 길림성팀이 1등상과 풍격상을 동시에 받았을 때 지운봉이 대장이였다.

그는 고상한 인격과 작풍으로 전팀을 이끈데서 신로축구계의 옹호와 애대를 받았다. 길림성축구팀이 전국 축구단의 최고봉에 오르게 된데는 지운봉이 흘린 물동이 땀 공로가 슴배여있다.

만약 지난 세기 50년대 중기에 리광수, 손중천, 지청룡의 고도로 세련된 진공전술풍격이 길림성팀의 일대 법보였다면 60년대 중기 지운봉, 허경수, 동경춘을 핵심으로 한 제2대들의 빠른 속도에 높은 기술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새로운 특점이 전국 축구계를 경동시켰다.

지운봉은 1973년에 간암과 심장병으로 사망, 향년 36세였다.

이번 취재는 필자의 30여 년의 기자생활에서 시간이 제일 긴박하고 가장 힘이 들기로 새벽부터 뛰여 다닌 취재이며 기자의 욕심에 만족을 주지 못한 유감스러운 취재로서 기사 내용이 불충분함을 독자들에게 특히 부언한다.혹시 지운봉의 부인 신화옥 할머니를 만났다면은 취재에 도움이 되였겠는데 신창근씨가 알려주는 핸드폰으로 련계하니 그 번호가 공번이라기에 아쉬움을 남긴 취재로 마감한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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