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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4]우리 민족의 축구명장-박익환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21 07:24:31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14)
 
 
연변에서 우리 조선민족의 축구가 처음으로 시작된지도 어느덧 한세기가 많이 지났다. 1905년 서울의 로선생이라는 분이 장동촌에 축구공을 갖고오면서부터 연변의 축구가 있게 되였다.

1910년 단오절을 맞으면서 룡정시 덕신향 장동촌의 소학교와 장재촌에 있는 명동소학교간에 사상 첫 대항선경기가 있었다. 그후 여러 소학교들에서 축구경기가 있었으며 1926년 개산춘 제도촌에서 연변에서 사상 처음으로 장년팀 대항선경기가 있었다. 연변의 축구는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연변팀(간도성팀)은 전 만주국대회에서 기본상 1등을 하여 전  만주국(지금의 동북3성)에서 연변팀을 꺾을 팀이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성장한 축구명장 박익환의 큰 공로와 갈라놓을수 없었다.

오늘 소개하가고 하는 박익환(朴益焕)에 대해 과거에 많은 축구선수와 축구팬들은 의론이 많았지만 인제는 시간이 흘러 그에 대해 아는 분들이 적어졌다. 안다면 년세가 많은 축구선수나 축구계 로 교수들이 알고있을 뿐이다.
 
 
1935년 전 만주국대회에서 1등한 간도성(연변팀)팀(앞줄 왼쪽 두번째 사람 박익환).

박익환명장은 《명정포》라는 별호를 달고 간도성(연변)팀과 전 만주국, 조선반도, 일본전역까지 중국의 조선족으로 제일 이름난 선수였으며 그의 친형님인 박주환도 연변팀과 위만주국팀의 중견선수로 《호랑이》라는 별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축구명장이였다. 필자는 축구선수와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팬들 한테 과거의 축구명장들도 기억 하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박익환은 대정 칠년(大正七年)(1918년) 12월 7일 화룡현 팔도하자 남양촌(지금의 룡정시 덕신향)에서 태여났다. 소화(韶和)2년(1927년) 4월 1일, 팔도하자 보총소학교(지금의 덕신향 남양소학교)에 입학하여 소화 8년(1933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소화 9년(1934년) 4월 1일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여 소화 12년(1937년) 3월 15일에 졸업하였다.(참고: 저항시인 윤동주와 룡정 은진중학교 때와 연세대학시절에 동창생임 연세대학 시절에 박익환은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윤동주는 시에서 이름을 날렸다.) 소화 13년(1938년) 4월 1일에 일본 광도현 오시흥문중학교에(일본 히로시마)입학하여 소화 15년(1940년) 3월 6일에 졸업하고 이해 4월 1일에 연의전문학교(연세대학)에 입학하였다.

박익환은 어려서부터 뽈차기에 흥취를 가졌으며 커서 간도성(연변)팀과 만주국 국가대  선수로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에까지 이름난 명선수였다.
 
 
1935년 5월 20일 연습중 잠시 쉬고있는 모습.(왼쪽으로부터 6번째 박익환)

1998년 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 조선민족문화사대계》 체육사에는 박익환명장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괴뢰만주국 축구계에는 신경(지금의 장춘) 안동, 목단강, 할빈, 길림, 대련, 봉천(지금의 심양) 등 지구의 축구명장들이 많았다. 그때의 중간방어수(하프)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를 고르자면 연변팀의 박익환을 꼽을것이다. 룡정태생인 박익환선수는 체대가 크고 아주 건장하며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중학시절에 벌써 연변과 괴뢰만주국 일본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한국일보》《일간스포츠》는 1978년 9월 13일과 1979ㄴ연 5월 12일부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기사화하였으며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를 고르자면 연전(연세대학)팀의 박인환이다. 그의 축구기술은 현대 축구명장들의 축구기술과 이를바 없었다》. 허리구실(하프)을 잘하는 모든 선수들은 박익환한테 큰 기대를 모았다.》고 기사화하였다.

박익환명장은 간도성(연변)팀의 선수시절에 많은 간도성대회와 전 만주국축구대회에서 연변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그의 공로가 절반이래도 과언이 아니였다고 한다.
 
 
1940년 10월 2일 전조선 종합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중 기념촬영(왼쪽으로부터 6번째 박익환).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체육사는 《1937년 8월초에(만주국 축구선수선발대회)가 신경(장춘) 남령경기장에서 진행되였다. 경기에서 신경(지금의 장춘), 대련, 연변, 삼강, 룡장, 봉천(심양), 길림, 안동(지금의 단공) 등 지간에 치렬한 경기를 펼쳐졌다. 연변팀은 모든 적수를 누른후 마지막에 강팀인 대련팀을 3대0으로 격파시켜 또다시 만주국 축구계에서 우러러보는 강호로 확인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간방어수(하프)로 활약한 박익환은 (만주국》축구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유망한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후 박익환은 축구명장으로 되려는 큰 뜻을 품고 넓은 축구무대를 찾아 조선에 나갔다.》고 하였다.

한국에 나간 박익환은 처음 공을 찬 학교는 부전학교(지금의 고려대학)이였다. 뽈을 잘 차는 것을 알게 된 연전 전희전문학고(광복후 연세대학을 개칭)에서 인츰 스카우트하였다. 남달리 축구의식이 높은 박익환은 돌파능력이 강하고 드리블이 좋은데다가 가동작이 민첩하고 문전슛이 준확하여 축구계와 팬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따라서 그의 명성도 날로 높아갔다.

그당시 조선반도에서 강한 팀들로는 함흥축구팀, 평양축구팀, 경정(서울)축구핌, 연세대학팀, 고려대축구팀 등이였다. 이 팀가운데서 우승팀만이 세계컵축구선수권대회 예선경기에 참가할수 있었다.
 
 
1940년 11월 15일 제21회 전 조선종합축구대회 우승후(왼쪽으로부터 네번째 박익환).

1940년 5월 2일 경성(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경기에 박익환이 소속된 연세대학팀은 경성구락부팀을 6대0으로 압승하여 서울을 대표하여 조선예선축구대회에 출전하게 되였다. 이해 5월 18일에 개막된 제4회 조선축구예선선수권대회에서 강팀인 평양축구단을 맞아 격돌끝에 3대2로 격퇴했다. 조선반도의 최강을 자랑하는 함흥축구팀은 연세대학팀을 어렵지않게 이길수 있으면 자기네 팀만이 예선경기에 참가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들도 박익환선수를 잘 알고있었ㄷ. 연세대팀은 함흥팀에 비해 약세이면서도 패기가 높아 절호의 챤스를 놓치지 않고 공격한끝에 함흥팀을 1대0으로 눌러 패권을 잡았다. 함흥팀은 불운이 겹쳐 연세대팀의 드센 역습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자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조선반도에서 우승한 연세대학팀은 이해 5월 24일 일본에서 열린 제6회 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기게 되면 월드컵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자격을 얻을수 있었다. 조선을 대표한 연세대학팀은 첫 경기에서 일본축구계에서 제일 최강을 자랑하는 와세대대학팀과 격전을 벌렸다. 와세다팀은 독일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한 명장들을 주축으로 한 강팀이였다.

일본은 늘 그러했듯이 원정온 《팀》에는 의례 자기 팀을 유리하게 이끌 속셈이 작용하여 심판으로 상대방을 패배시킬 목적으로 부정행위를 마구 실시하였다. 그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써 도리가 있어도 제기할수 없었다.
 
 
1941년 6월 3일 제5회 경기도 전문축구대회 우승을 기념 본교 본관앞에서 기념촬영.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은 조선의 축구건아들은 한 마음으로 단결되여 이를 악물고 격돌하였다. 허리(하프)가 든든한 연세대학팀은 절대적 우세로 한꼴을 넣어 와세대대학팀 진영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후반전에 들어서 일본 심판의 고질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한심한 업사이드임에도 불구하고 묵과해서 고의로 두꼴을 넣게하여 결국 연세대학팀이 파하게 하였던것이다. 그때 경기를 관람하던 많은 량심적인 일본관중들은 《과세대학팀이 졌다. 심판이 공평하지 못하다. 연세대학팀이 이겼다》라고 하면서 분노를 토하기도 하였다.

박익환을 비롯한 선수들은 억울한 분위기에서도 일본동북대학팀을 6대0으로 누르고 강팀인 관서대학팀을 또 3대0으로 격파시켰다. 그때 박익환의 공로가 매우 컸다. 그는 두 날래(공격수)한테 주는 패스는 자로 재는듯 준확하여 축구계와 일본관중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한국일보》1978년 5월 12일부에는 《박익환은 연세대학교에서 언어와 행동이 고와서 전교의 학생과 선생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기에 어려운 생활속에서 생활하는 그를 도와나선 학우들의 도움을 받았다. 뜻밖의 익사로 가버렸으니 연세대학교의 손실이였을 뿐만 아니라 학국축구계의 큰 손실이였던것이다.》라고 기사화 하였다. 문헌자료에는 《만약 박익환이 중도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2차대전이후까지 살았더라면 그는 대선수로 자라나 국가의 명예를 건 경쟁속에서 크게 활약했을것이다》라고 적었다.
 
 
1940년 5월 18일 제6회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 파견 예선대회에서 우승하고 기념촬영(뒤줄 오른쪽 네번째 박익환).
 

유명선수는 이렇게 되여 너무 어린나이에 저세상 사람을 되였는가? 그당시 박익환선수의 죽음을 두고 조선과 중국에서 같지 않은 설이 돌았다. 즉 《뽈을 잘 차니 일본놈들이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차 사고로 죽었다.》, 《경기도중에 고의로 죽었다》는 등 설이 돌았다. 그리고 몇 년간 노력을 들여 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체육사에는 《앓아 죽었다.》고 문헌에 남겼다. 그들의 말은 《만주국 때부터 뽈을 차온 연변대학 체육계의 박로석 교수의 말을 믿고 남겼다》고 한다. 허나 모든 설은 사실과 모두 달랐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박익환의 당안자료를 찾아보았다. 그의 학전부에는 박익환의 연세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습성적과 출생지로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학적부에는 《소화 7월 6일 교내수영장에서 익사하였다.》고 적혀있었다.

박익환의 죽음은 이러하였다. 소화 17년(1942년) 7월 6일 축구팀 선수들은 학교수영장으로 수영하러 나갔다. 그때 박익환선수는 다른 선수들보다 좀 늦게 나가게 되였다. 박익환이가 좀 늦게 나오자 한 팀의 꼴키퍼 장기량선수가 《왜 늦었어?》하면서 옷도 벗지도 않은 박익환을 수영장에 밀어넣었다. 수영재간이 전혀없는 박익환이는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삼키기 시작하였다. 기타 선수들은 그가 헤염치는줄로만 여겼다. 선수들이 다시 그를 보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1941년 5월 31일 제5회 경기도 전문학교 축구대회 우승 기념촬영(경성운동장),오른쪽 네번째 박익환.

박익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꼴키퍼 장기량(张基良)은 자신의 경솔한 장난으로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었던것이다. 친구가 세상을 뜨자 장기량 꼴키퍼는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극히 말리는데서 실현되지 못하엿다. 문헌자료에는 《장기량과 박익환이는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그들의 관계는 실과 바늘관계였다》고 하였으며 《룡정 팔도하자에 있는 부모 보러갔다가 생활이 곤난하여 학비로 마련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그럴때마다 만주에서 소지주로 생활이 괜찮은 장기량은 부모들을 속여가면서 돈을 갖고와서는 박익환의 학비를 여러 번 대주군 하였다.》고 하였다. 문헌자료에는 《장기량은 유명 축구선수인 친구를 죽음에 몰아넣자 학교를 그만두고 3년간 만주에서 류랑생활을 하다가 부산에 있는 형님인 강기호가 약방을 꾸리는 형님을 도와 약방을 운영하였다.》고 기사화하였다.

연세대학 시절에 함께 뽈을 차온 범영광(范荣光)이 1988년 부산을 찾아가서 장기량을 만나자 그때를 생각하면서 그는 《땅을 치면서 통곡하였》는 사실도 《한국일보》에서 기사화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우리 민족의 축구영웅 박익환선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학교장(葬)을 지내주었고 대학교 본관의 뒤동산에 그의 유체를 매장하고 비석까지 세웠던것이다. 《연세대학축구사》에서(참조) 축구영웅 박익환은 24세의 너무 어린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가 고인이 된지도 7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연변팀과 전 만주국팀, 연세대학팀 등 팀의 선수를 드넓은 그라운드를 누빈 박익환축구명장의 업적은 우리 조선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김원범, 촬영:김몽훈,사진제공:황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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