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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5]문화대혁명때문에 빗나간 축구꿈…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8-18 18:16:34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5)

-축구원로 정동권옹의 이야기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뽈을 차지 못하고 아까운 시절을 흘러보낸 유감이 지금도 아쉽게 남아있는 축구원로가 있다. 바로 정동권(81세)옹이다. 지난 1965년 길림성팀이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 우승할 때 정동권은 시합들에서 직접 꼴을 넣지는 못했지만 하프위치에서 뛰면서 팀원들에게 결정적인 슈팅 챤스들을 만들어준 숨은 공로자이다.

1935년 11월 27일 화룡현 서성향 북대촌에서 출생한 정동권은 어릴 때부터 《뽈개지》라고 불리울만큼 축구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항상 동네조무래기들과 축구를 차군 했는데 공 다루는 기술이 능수능란하여 어른들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서성소학교 3학년때인가 학교축구팀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뽈을 차고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정동권한테로 뽈이 구을러왔다. 정동권이 그 뽈을 날렵하게 되차기를 했는데 뽈 차는 모습이나 기술이 례사롭지 않은지라 대뜸 축구교원의 눈에 들어 정동권은 뽈 한방에 바로 학교축구팀의 일원으로 되였다.

세번째줄 오른쪽으로부터 세번째 정동권선생.

그때 촌에서는 운동대회가 해마다 열렸는데 정동권은 아직 소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촌운동대회 선수로 뽑혀 어른들속에서 뽈을 차기도 했다. 당시 정동권의 매형 한분이 룡정에서 축구선수로 있었는데 어린 정동권이 뽈 차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축구선수로 발전하면 될 것 같다고 해서 1949년도에 룡정중학교축구팀에 들었다. 그당시 룡정에는 룡정 은진중학교, 3.1소학교, 룡정중학교 등 3개 학교 축구팀이 가장 실력이 강했는데 정동권이 선수로 있은 룡정중학교팀이 항상 1등을 하군 했다.

축구는 잘하지만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던 탓에 정동권은 청년팀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룡정고중에서 계속 공부하는수 밖에 없었다. 룡정고중 1학년때에는 박만복 등 8명의 유명 축구선수들이 있는 2학년 선배팀과 교내 축구경기에서 1:0으로 이기기도 했다. 축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정동권이였지만 당시 가정형편이 몹시 구차하다보니 축구화 한컬레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고중때 아버지에게 축구화를 사달라고 했는데 정동권의 축구꿈이 너무 간절한것을 보고 부친도 없는 살림에 돈을 마련해 정동권에게 축구화를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 축구화 파는 곳은 룡정에 딱 한곳이 있었는데 가격도 매우 비쌌다고 한다. 고중 3학년때 정동권은 연길현 대표팀 선수로 뽑혀 뽈을 차기도 했다.

1986년 길림성축구팀이 갑급팀에 진출후 주위령도들이 선수들을 위문.

고중졸업후 정동권은 연길에 있는 연변한어전수학교를 반년쯤 더 다니다가 1956년 3월에 흑룡강성 치치할시에 있는 제2기계부공장에 가서 조리기술원으로 일했다. 그때 북경에 있는 전국 화성축구팀이 치치할에 와서 축구경기를 하게 되였는데 정동권이 뽈 차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 그를 북경으로 데려갔다.

정동권은 화성축구팀에 8년간 머물러있었다. 화성팀에 가긴 했지만 처음에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주력선수로 써주지 않았고 후보선수로 벤치를 지키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한 불공평한 역경속에서도 정동권은 참고 견디며 부단히 축구기술을 련마했는데 나중에는 팀의 절대주력선수로 인정받게 되였다.

1963년도에 정동권은 형님의 사망과 함께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형편때문에 조직의 배치에 따라 길림성팀에 옮겨왔다. 그것이 또한 력사의 한페지에 길이 남아있는 길림성팀의 전국갑급련맹경기우승에 정동권도 이름을 올릴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1986년 조선 자강도를 방문한 길림성축구팀.

길림성팀은 1964년도에 을급팀에서 갑급팀으로 올라온 팀으로서 당시 선수들마다 탈락의 아픔을 딛고 다시금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대단한 결심과 용기로 팽배해 있었다고 한다. 정동권옹에 따르면 그해 년말의 동계훈련에서 길림성팀은 악전고투하면서 참으로 혹독한 마귀식 경기훈련을 진행했다고 한다.

정동권은 전국갑급련맹경기에서 길림성팀의 하프선수로 뛰였는데 대원들에게 적절한 패스로 뽈을 만들어주는 작용을 잘해 길림성팀의 우승 승리에 적극적인 기여를 한 숨은 공로자였다.

《1등하고 돌아오니 당시 주당위 요흔부서기가 연변빈관에서 축구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지요.연변빈관에서 개고기를 대접해 우리 선수들이 잘 먹었던 기억입니다.》 그때 선수들이 모두 그러했겠지만 전국 우승이라는 경축의 의미는 한끼 잘 먹었다는 소박한 인상으로만 남아있다.

1975년 길림성소년아동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연변소년축구팀.

정동권과 길림성팀이 전국갑급련맹경기의 우승까지 따내고 더 큰 청운의 꿈을 향해 신들메를 조이고있을 때 문뜩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문화대혁명때문에 길림성팀도 해체되였고 정동권도 한창 나이였지만 축구를 접어야 하는 비운의 력사였다.

《문화대혁명때문에 근 10년 동안이나 꼬박 축구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현재 이미 80고령을 넘긴 미수의 나이지만 정동권옹에게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한과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정동권은 1973년부터 연변주체육운동학교에서 축구인재양성사업을 시작했다. 연변청년팀 감독을 맡아 전국청년축구경기에서 4등을 하기도 했다. 1975년도에는 연변체육운동학교 소년축구팀을 인솔하였는데 전국운동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당시 소년축구팀은 실력이 상당하였고 뽈을 매우 잘 찼는데 연변주정부 남명학부주장마저 소년축구팀을 미래의 길림성팀이라고 높이 추켜 세울만큼 큰 중시를 돌렸다고 한다. 당시 소년축구팀에는 고훈, 렴승필, 조영원 등 유명 선수들이 있었다.

정동권은 1978년도까지 연변체육운동학교에서 사업하다가 그후 길림성팀 조리감독, 감독, 연변체육공작대 업무과 과장으로 사업하다가 1991년도에 내부퇴직하고 축구무대에서 손을 뗐다.

몸은 비록 축구무대를 떠났고 신장암으로 한쪽 신장은 떼여낸 병약한 몸이지만 정동권옹의 연변축구에 대한 사랑과 애착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1972년 길림성중학생운동회에서 우승을 한 연변팀.

특히 올해 연변장백산축구팀이 갑급리그에서 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동권옹은 당년의 길림성팀을 다시 보는듯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과거 길림성축구팀은 전국 우승은 했지만 어떤 경기에서는 지기도 했다고 강조, 그러나 연변장백산팀은 현재 21경기나 한껨도 지지 않고 무패행진하고있는데 이는 대단한 성적이 아닐수 없다면서 충분히 긍정하고 치하했다.

연변장백산팀선수들이 뽈을 차는 모습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동권옹은 연변팀 선수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쉴새없이 잘 뛰여다니는데 상당한 체력이 밑받침돼있다고 말했다. 공다루기와 패스, 챤스 만들기, 슈팅 등 각종 기술수준도 상당히 좋으며 시합이 매우 류창하고 통쾌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중국축구가 직업화의 길로 나가면서 많은 돈이 필요한건 사실이지만 돈이 많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것은 아니라고 부언하기도 했다. 제한된 돈이라도 선수들에 대한 분배가 합리하게 잘 쓰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한국의 박태하감독이 연변팀선수들과 더불어 팀을 잘 이끌어나가고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선수들이 더욱 잘 단합하고 힘을 내여 좋은 성적을 일구어내고있는것 같다고 말했다. 정동권옹은 연변장백산팀이 이대로 나간다면 슈퍼리그에 당당히 진출할수 있을것이며 설사 치렬한 슈퍼리그 전쟁마당이라 해도 쉽게 강급하는 일 없이 연변축구의 휘황과 용맹을 다시 한번 세상에 자랑하게 될것이라고 예언했다.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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