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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박만복-우승 50돐 그날의 감격을 찾아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8-11 10:02:46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1)

-박만복감독이 회고하는 길림성축구팀 우승

 
원로축구인 박만복

《제1기 중국청년축구류학생》, 《제1대 중국축구(해방후) 운동건장》, 《제1임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 회장》, 《중국조선족 첫 국제축구련맹 주(洲)급축구강사》…

중국조선족 원로축구인의 한분인 박만복옹. 그가 이처럼 많은 《제1의 영광》중에서 가장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것은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의 첫 우승이다. 연변팀의 전신이였던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맡아 일궈냈던 중국축구 최고리그에서의 첫우승! 어언 반세기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중국조선족축구운동사에 대기록으로 남아있는 이 영광은 지금도 그의 가슴을 들먹이게 한다.

1935년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 영안촌에서 태여난 박만복옹은 1951년 왕청현 대흥구중학교를 다닐때부터 축구에 천부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3년 연변청년팀의 선수로 선발된 그는 연변팀이 상해에서 진행된 전국11개 도시 청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따낸 후 그해 중앙체육학원 출국훈련반에 뽑혔으며 이듬해 중국청년팀에 선발돼 중국축구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축구류학생으로 웽그리아에 류학을 갔다.

웽그리아 류학시절

당시 1.73메터의 신장에 몸무게가 65킬로그램이였던 그는 웽그리아의 축구명장이자 중국축구류학생팀의 감독이였던 안베르•웨피브(阿姆别尔․约瑟夫)선생으로부터 출중한 재능을 인정받아 《분사식비행기》라 불렸다. 1955년 국가팀 전포를 입은 그는 나라를 대표해 구쏘련, 동구라파, 동남아시아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족으로서, 국가대표팀의 주력으로서 영예를 빛냈다. 이후 국가체육운동위원회가 국가대표팀을 홍팀과 백팀으로 나눠 북경팀과 천진팀에 위탁관리를 시키게 되자 그는 북경팀에서 변선 수비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경기대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9년, 그라운드에서 한창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던 그한테 뜻밖에도 불행이 닥쳤다. 이해 10월 10일 남경 오대산에서 전국기관차팀과 평가전을 치르던전중 불행하게도 정강이 큰뼈가 끊어지고 작은 뼈가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은것이다. 두달간 남경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 후유증으로 선수생활을 접게 되였고 이후 조직의 배치로 북경팀의 조리감독으로 경험을 쌓던 그는 1960년부터 북경청년2팀의 감독으로 임명됐다. 선수시절부터 《길림성축구팀을 포함해 연변축구는 용맹 완강하지만 기본기가 없다》는 《모욕》적인 말을 수차 들어왔던 그는 이때부터 언젠가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고향축구를 춰세워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마침 기회가 왔다.

앞줄 왼쪽 세번째 박만복

1962년 8월경 당시 길림성의 체육을 주관하던 장문해 부성장으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왔다.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 발전전도 등을 뿌리치고 박만복옹은 서슴없이 연변(당시 길림성팀 연변서 훈련)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쳐왔다. 《용맹 완강하지만 기본기도 뛰여난 팀》으로 만들려던 길림성축구팀은 그의 희망과는 달리 1963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 15등을 기록하며 을급팀(당시 24개팀 참가. 12등까지 갑급팀으로 분류)으로 강등했기 때문이다. 1955년에 설립된 길림성축구팀은 《동북호랑이》라 불리며 일찍부터 중국축구계의 강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 전해까지만 해도 갑급리그에서 5위를 기록했던 터라 일시에 여론이 들끓었고 비난의 화살이 사처에서 날아왔다.

제5회 세계청년련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왼쪽 첫사람)

길림성축구팀의 장점은 용맹 완강하고 체력이 좋은것이기때문에 기술면에서 많이 제고시키면 된다고 판단한것이 문제였다. 일단 모든 실패의 책임을 떠메고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그해 동기훈련에서부터 중국체육계에 불고있던 《삼종이대(三从一大)》 훈련원칙에 립각해 대운동량훈련에 돌입했다. 《간고하고 엄격하며 실전적인데로부터 출발하여 대운동량 훈련을 진행하는(从严、从难、从实战出发、大运动量训练)》 이 훈련원칙은 대강도, 대밀도, 초경기량훈련을 견지하는것에 그 기반을 두고있었다.

선수들은 이런 《마귀훈련》을 시키는 박만복옹을 뒤에서는 《파쑈감독》이라 불렀지만 그래도 참고 끝까지 잘 따라주었다고 한다. 튼튼한 체력을 바탕으로 선진적인 유럽식기전술을 무장한 길림성축구팀은 이듬해 갑급련맹경기에서 일약 준우승을 따내며 다시 갑급리그에 복귀했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이 있었던 박만복옹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그해 남방에서 있은 겨울철훈련에서도 역시 《마귀훈련》으로 만전을 기했다.

인도네시아대통령과 악수

길림성축구팀 고유의 용맹하고 완강하며 쾌속공격을 구사하는 풍격이 시합 곳곳에서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러자 축구계에서는 《동북호랑이가 다시 내려왔다》고 대서특필했다.

길림성축구팀 선수들이 매번의 게임에서 평균 7000메터의 이동거리를 기록하고있다는 얘기에 조사연구를 나온 중국축구협회 전문가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간판공격수인 《제비》 동경춘은 1965년 갑급련맹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훈련성과 검열대회에서 총 2만 9889미터를 기록, 그중 9987미터는 막판에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이른바 스퍼트(冲刺)로 마무리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훈련지옥》에서의 결과는 화끈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함께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경기에서 길림성축구팀은 7승 2무 2패 합계 16점(당시 2점제)으로 우승을 일궈내고 뛰여난 시합풍격으로 당시 우승컵과 동등시하던 체육도덕풍격상까지 받는 쌍풍작을 따냈다. 특히 국가대표팀도 그해 전국갑급련맹전에서 순위를 기록하지 않고 참가했는데 마지막 총점에서 15점을 기록, 길림성축구팀에 뒤졌다는 후문이다.

연변축구팀으로서는 현재까지 전국 최정상급 축구리그에서 유일하게 따낸 전국 우승, 오늘날 연변축구의 부활에 밑거름이 되여 새로운 우승을 따내는데 응원이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것이 없겠다며 박만복옹은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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