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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11]김수복 장백현 주경동서 쓰러지다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5-26 09:43:02 ] 클릭: [ ]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11)

■ 리 함

1989년 1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연변인민의 항일투쟁》에는 2800여명 연변의 항일렬사명단이 실려있다. 그중 그 시절 룡정현 817명 항일렬사명단에는 희생시간을 1938년 8월로 알리는 항일녀렬사 김수복이 있어 주의를 끄당긴다. 아직 룡정시민정국 렬사명부를 보지 못하여 김수복렬사의 성장과정을 알수는 없지만 1983년 5월 길림성부녀련합회에 의해 내부자료로 출판된 《길림성녀렬사영명록》(吉林省女烈士英名录)에서 렬사의 간략한 략력을 보아낼수 있다.

 
김수복화상(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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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金寿福,1915ㅡ1938),화룡현 광개촌 후동(厚洞) 사람, 조선족, 1930년 혁명에 참가, 중공장백현 7도구구위 부녀위원, 1938년 8월 장백현 7도구에서 희생, 유체는 7도구에 묻히여있다.

김일성장군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7집에서 《녀투사들의 혁명절개》를 개괄적으로 소개할 때 김수복을 스치고있다.

김수복은 장백현 주경동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이밖에 1980년대 초반에 그제날 개산툰구 후동촌과 개산툰구 출신들이고 화룡현유격대 출신들인 김창렬(金昌烈,개간툰 후동촌 사람, 1983.1.16), 홍춘산(洪春山,개산툰 광소 사람, 1983.3.12), 손태극(孙太极,1983.3.18), 방정환(方正焕)1983.10.13), 황운룡(黄云龙,1983.10.13) 등 항일투사들 증언자료가 있다. 모두가 당년의 개산툰구와 달라자구 사람들이고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였던 항일투사들로서 모두가 하나같이 화룡현유격대와 이 유격대로 개편된 동북인민혁명군 화룡퇀에 후동출신의 김수복이 있었고 장백현에 가서 희생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소속부분이 서로 다른데서 그들은 김수복을 언급만 할뿐 구체적인 그 무엇을 알려주지 못하였다.

아직 김수복 래력 관련 다른 자료들은 접하지 못하였지만 우의 간략한 두 자료와 여러 항일투사들 증언을 통해 김수복렬사가 걸어온 발자취를 개략적으로 더듬을수 있어 다행이라 하겠다. 김수복녀전사 최후의 모습은 장백현 주경동(朱景洞)참안력사에서 비교적 자상히 알려져 오늘에 전해진다.

김수복녀전사의 출생지 화룡현 광개촌(光开村)후동은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후동촌을 가리킨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 후동촌은 화룡현 개산툰구 산하의 한 조선이주민들 마을로서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고장이다. 김수복은 이 마을의 한 조선인농가에서 태여났고 1930년 연변을 진감한 대중적 5.30폭동이후 혁명활동에 뛰여들었다. 1930년이면 갓 16살인데서 김수복은 처음 소선대원으로 활약하다가 공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18살때에는 개산툰유격대 권총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겨울 화룡현 평강구, 삼도구, 개구, 대구의 장총대 대원들이 현위 군사부의 지시를 받고 산구에 위치한 어랑촌에 모여 화룡현항일유격대로 통일되였다. 중공화룡현위와 산하 평강구위도 어랑촌으로 전이하였다. 이는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가 정식으로 수립되였음을 표징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도 김수복 소속 개구 권총대와 다른 권총대들은 모두 지방에서 활동하고있었다.

1933년 년초 수백에 달하는 일제침략자들과 그 주구 경찰놈들이 삼면으로 어랑촌근거지에 달려들었다. 세상에 이름난 1933년 음력 1월 18일(양력 2월 12일) 어랑촌근거지 보위전인 13용사 전투는 이렇게 벌어졌다. 신생한 화룡현항일유격대는 적들의 제1차 대토벌을 물리쳤지만 유격대 중대장 김세 등 유격대원 9명과 제4임 현당위서기 최상동 등 10여명이 피못에 쓰러졌다. 이어 황포군관학교 출신 제1임 군사부장 방상범도 근거지밖에서 희생되였다.

2

새로 부임한 제5임 현당위 서기 김일환과 제2임 군사부장 김락영 등은 현안의 삼도구, 개구, 대구에서 활동하는 권총대들을 어랑촌근거지에 집결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김수복 소속 개구유격대 권총대는 어랑촌근거지로 전이하여 여러 항일무장들과 더불어 화룡현유격대대로 개편되였다. 지금에 이르러 현유격대대 녀전사 김수복이 어느 중대에 귀속되였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 시절 김수복은 이미 중국공산당 당원이였다.

1934년 봄에 이르러 김수복 소속 화룡현유격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3퇀(그후 제2퇀으로 불리움)으로 개편되였다. 그해 봄이후 김수복은 소속부대와 더불어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ㅡ처창즈근거지 개척전투에 뛰여들었다. 1935년 음력 10월, 김수복 소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화룡2퇀과 연길1퇀은 처창즈근거지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하면서 연변 최후의 항일근거지인 안도현 내두산근거지로 진출하였다. 그때 연길1퇀은 안도현 미혼진에서 밀영생활을 하면서 활동하고있었다.

1936년 2월 21일, 2퇀 퇀부는 내두산군중대회후 내두산 밀림속의 부대병영과 병원, 병기공장, 피복공장 등 귀틀집들을 태워버리고 내두산을 떠났다. 군중들은 눈물을 뿌리며 부대를 바래였다. 2퇀 전사들도 눈굽을 적시였다. 그들은 항일의 승리를 기약하며 내두산 서남쪽에 있는 무송현 마안산일대로 전이하였다. 3월에 이르러 김수복 소속 화룡2퇀은 마안산에서 항일련군 제2군 제3사로 개편되였다. 4월과 5월에는 3사부대를 따라 무송현 만강전투, 동강전투, 서강전투 등 허다한 전투들에 참가하였다. 이 시절의 김수복은 3년 남짓한 기간의 부대생활 경험과 전투단련을 거친 로련한 항일녀전사. 6월 6일 림강현 서남차습격전은 김수복이 이해 4월 무송 만강에서 조직된 3사사령부 직속 녀성련에 가입한후 녀성련만의 단독전투에 나선 첫 전투였다. 이 시기 3사는 항일련군 2군 6사로 재편성되였다.

1936년 8월, 무송현성 진공전투이후 김수복은 김일성장군이 지휘하는 6사부대를 따라 만강물줄기를 거스르며 백두의 되골령을 넘었으며 장백땅의 첫 총성으로 되는 9월의 대덕수전투와 소덕수전투 그리고 일련의 전투들에 뛰여들며 항일련군 녀전사로서의 위훈을 쌓아갔다.

1936년 9월이후와 1937년 봄과 가을 사이 6사 사장 김일성장군은 김주현, 권영벽, 김정숙, 최희숙, 박록금 등 30여명의 동지들을 장백현의 압록강 국경지대와 조선국내 각지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하였다. 김수복은 1936년 이해 겨울 장백현 관방자(官房子)전투에서 부상을 당한데서 6사 사령부에서는 그를 장백현의 18도구 주경동에 보내여 치료 겸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관방자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동상을 입은 부상병들은 김수복외에도 최동학(崔东鹤), 홍학포(洪学浦), 김병희(金炳熙), 김룡일(金龙日) 등 5명에 달하였다. 6사의 후방부관이고 정치공작원인 김주현(金柱铉)은 주경동의 김룡석(金龙锡) 지하공작원과 상의하고 이들 모두가 주경동에서 치료를 받으며 몸을 춰세우도록 하였다.

주경동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4명의 부상병들은 상처가 나아 부대로 돌아갔지만 최동학은 동상이 심하여 마을에 남아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였다. 김수복은 심한 부상이 아닌데서 6사사령부에서는 김수복이 계속 원기를 춰세우는 한편 18도구와 20도구를 포괄하는 상반구(上半区)부녀회 위원 겸 18도구 부녀회주임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김수복은 걸어다닐수 있게 되자 가만있지 못하였다. 그의 발자취는 18도구의 마을마다, 허다한 집들에 찍히면서 많고많은 부녀들이 지은 신과 모은 식량, 필수품들을 지하조직망을 통하여 6사부대에 보내였다. 김수복과 그에 앞선 부대의 정치공작원들에 의해 주경동은 물론 장백현의 골골마다 마을마다 조국광복회 기층조직과 당조직이 뿌리내리면서 군중성 항일련군 원호사업이 크게 활기를 띠였다.

 
한때 김수복 등 녀전사들의 모습이 어렸을 장백현 18도구의 깊은 계곡(자료사진).
 

3

조선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현의 혁명화, 항일화는 적들의 지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아냈다. 급해맞은 적들은 장백일대에 무력을 증파하는 한편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닥치는대로 잡아가두고 죽이고 불사르며 마구 날뛰였다. 김수복 등 6사 정치공작원들이 활동하는 주경동마을의 《주경동참안》(朱京洞惨案)이 그 대표적인 참안으로 기록된다.

장백지방을 보면 백두산의 주맥인 되골령이 이 현의 북부를 가로막으면서 되골령의 지맥들이 줄줄이 압록강쪽으로 뻗으며 골골들이 생겨났다. 이런 골골들에 조선서 살길을 찾아온 이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닦고 마을을 이루면서 7도구(七道沟)부터 25도구까지란 특이한 지명이 생겨났다. 주경동은 18도구 골안에 있는 고원(高原)마을로서 18도구 《후촌》(后村)에서 5리, 룡천진(龙泉镇) 서남 10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있다.

민국년간에 이 고장에는 샘우물(泉井)이 있었고 주씨(朱姓)라는 사람이 밭을 일구며 농사를 지었다. 1932년에 이르러서는 20여호의 조선이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마을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샘우물과 주씨성을 따라서 마을이름을 《주경동》(朱井洞)이라고 불렀다. 이 주경동이 차차 중국이름으로 《주경동》(朱景洞)으로 번지게 되였다. 부근의 골골과 언덕들에도 산재호들이 적지 않았다.

1937년 단오날(양력 6월 13일), 정치공작원 김주현은 김수복과 토의하고 부근 여러 마을의 부상병들이 주경동에 모여 부상병들 회의를 가지기로 하였다. 회의를 앞두고 적들의 시선을 전이시키고저 부분 청년들을 내세워 축구경기를 벌이였다. 김주현과 장증렬(张增烈)도 적들의 동향을 관찰하기 위해 축구경기에 뛰여들었다.

그런데 헌병대 2도강 파견반 정탐이고 특무인 조선사람 최상률(崔尚律)이 군중속에 섞이였다가 김주현이 허리에 찬 권총을 발견하였다. 김주현의 크나큰 실수였다. 최상률은 그 걸음으로 2도강마을로 달려가 헌병반장 최기청소위 (崔基清少尉, 조선사람)에게 보고하였다. 최소위는 최상률에게 주경동을 계속 감시하면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주현도 신분을 알수 없는 최상률의 출현에 주의를 돌리고 즉각 마을의 지하공작자들을 불러 경각성을 높이며 보초를 강화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로부터 거의 두달이 지난 음력 7월 3일(양력 8월 8일), 주경동의 6사 부상병들이 우리 지하조직에 망라된 지봉팔(池凤八)의 집에서 장기를 두었다. 김룡석은 딸애더러 마을밖 보초를 서게 하였다. 이 딸애가 동쪽의 보리밭에서 어떤 사람이 마을쪽으로 기여오고있음을 발견하고 즉각 보고를 올리였다. 김수복은 적들의 습격이라고 단정하고 김룡석과 상의하고 부상병들을 급히 전이시키면서 마을사람들도 피신할것을 요구하였다.

아니나다를가 헌병대 최기청소위가 헌병 8명과 경찰편의대를 끌고 초모자에 백성차림으로 주경동에 기여들었다. 부대의 몇몇 부상병들은 소식을 받고 급히 마을을 벗어나 수림속에 숨어버렸으나 중부상자 최동학은 피할수 없어 체포되고말았다. 주구의 밀고에 따라 김룡석, 지봉팔, 김룡련(李龙连)과 가정주부로 꾸미고 활동하던 김수복 등 20여명도 붙잡혔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마을의 부녀들과 아동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복이 활동한 옛 모습을 보여주는 오늘의 내두산 첫 마을의 귀틀집.

4

적들은 주경동마을 사람들을 룡천진마을로 끌고가서 마을사람 안경화(安京华)의 집뜨락에 꿇어앉히고 심문을 들이댔다. 이자들은 먼저 민부들을 불러다가 몇개의 구뎅이를 파게 하고 지봉팔로인을 구뎅이로 끌고가서 채찍과 몽둥이로 구타하며 조직선을 대라고 윽박질렀다. 온몸에 피가 랑자한 지봉팔로인이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으니 놈들은 총으로 쏜 뒤 구뎅이에 처넣었다. 이어 김룡석을 심문하였으나 김룡석은 아무것도 대주지 않았다. 특무 최상률이 뭇매를 들이댔다. 김룡석의 안해가 나서서 특무놈과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최기청소위가 나서서 마을의 부녀와 아동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하고는 김룡석과 김수복, 최동학, 홍근일(洪根日) 등을 2도강헌병대로 끌고가게 하였다. 도중에 길에서 세살배기 애를 업은 한 부녀와 맞띄웠다. 주경동마을 김룡련의 안해였다. 특무 최상률이 김수복과 저 녀자를 아는가고 물었다. 김수복은 알은체하면 적들이 놓아주리라고 생각하고 안다고 말했더니 적들은 김룡련의 안해마저 붙들고 같이 끌고갔다.

길을 가다가 최소위는 마차 한대를 세우고는 최상률한테 체포한 사람들을 실으라고 하였다. 그럴 때 김룡석은 담배를 피우겠다며 잠간 세워 줄것을 바랐다. 김룡석의 거듭되는 요구에 최소위놈은 거절하다가 동의하고말았다. 김룡석이 담배주머니를 주무르며 고의로 천천히 걸을 때 최소위가 앞서 가게 되였다. 이때라고 김룡석은 담배주머니에서 소뿔로 만든 빼또칼을 꺼내 최소위놈의 대가리와 잔등을 몇번이고 강타하였다. 최소위놈이 아프다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권총을 꺼내다가 나무가지에 걸려 넘어졌다. 그사이 김룡석은 재빨리 수림속으로 달아났다.

이어 부상자들을 실은 마차가 다가왔다. 분이 상투밑까지 치민 최소위놈은 최상률과 압송하는 김수복, 홍근일 그리고 김룡련의 안해와 업고있는 아이 모두를 그자리에서 죽여버리라고 아우성치고는 중상자 최동학만을 2도강헌병대로 끌고갔다.

적들이 떠나간후 도망갔던 김룡석이 돌아와보니 항일련군 녀전사 김수복과 마을사람 홍근일은 상처가 중하나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급급히 룡천진으로 숨어들어 친속을 불러 같이 김수복과 홍근일이를 주경동으로 업고갔다.

이튿날 헌병대 중대장 일본상위놈이 숱한 토벌대를 끌고 살기등등해 다시 주경동에 달려들었다. 악독하기 그지없는 특무 최상률은 리주연(李柱渊)농민의 네살짜리 어린것을 끓는 가마에 넣어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사선에서 구출된 김수복은 다리에 중상을 입은데서 다시 체포되고 부녀와 아동을 망라한 20여명의 무고한 마을사람들이 붙들렸다. 적들은 주경동마을의 20여호 민가를 전부 불태워 페허로 만들고도 모자라 체포한 김수복 등 20여명을 마을밖에 끌고가서 전부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세번째날 2도강헌병대 놈들은 붙들어간 최동학을 고문하다가 죽여버리고는 배를 가르고 심장과 간을 끄집어내여 사람들을 훈시하기까지 하였다. 적들은 사흘이라는 사이에 주경동에 머무른 김수복 등 항일련군 전사들과 마을사람 30여명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천인공노할 주경동참안을 빚어냈다. 김수복은 이틀사이에 주경동에서 두번이나 체포되여 항일련군 녀전사의 빛나는 삶을 마감지었다. 장백현과 항일련군 부대를 들썽한 주경동참안이였다.

연변 두만강중류의 개산툰 후동촌 출신이고 항일련군 2군 6사의 녀전사인 김수복은 이렇게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와 그 주구놈들과 싸우다가 떠나갔다. 김수복녀전사의 유해는 지금 조선 평양의 대성산렬사릉원에 안장되여있다. 김수복은 중화인민공화국 항일렬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렬사로 추인된 불멸의 항일련군 녀전사로 영생하고있다.   

(2015년 3월 20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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