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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8] 6사 녀성련 첫 련장 박록금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4-24 15:21:23 ] 클릭: [ ]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8)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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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금 (자료사진) 

1936년 봄,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 각지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제7군 부대들은 륙속 동북항일련군으로 개편된후 산하에 선후로 부녀련이거나 부녀대, 부녀반, 부녀퇀을 건립하였다. 이해 봄 동만과 북만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항일련군 제5군이 왕청현과 훈춘현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을 중심으로 녀성퇀ㅡ부녀퇀을 조직하였다면 항일련군 제2군 3사(후에 6사로 개편)에서는 박록금을 련장으로 하는 제2군부대의 첫 녀성련을 조직하였다.

박록금(朴录今, 1915.3-1940.10)은 동지들로부터 녀장부로 불리였다. 그의 본명은 김영희로서 1915년 5월 3일에 함경북도 경성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후에 가정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에 이사하였으며 1930년이후 현내 5개 혁명조직구로 이루어진 2구에서 생활하였다. 2구는 소왕청을 중심으로 대왕청, 대감자, 류수하, 신흥, 덕원리, 마반산, 십리평, 리수구 등지가 포괄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마을인지는 아직 밝히지 못하였다. 2구에서 생활할 때 박록금은 공산당원으로서 당구위 부녀위원까지 했다는 녀성혁명가이다. 남편은 강증룡인데 그들 부부간은 1932년 한날한시에 왕청현유격대 1중대에 참가하였다고 전해진다.

5개구가운데서도 중심은 2구인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였다. 이 근거지는 현재 왕청현소재지-당년의 대두천과 동으로 13킬로메터쯤 떨어진 산간지대인데 현위가 이 근거지 마촌에 자리잡고있었다. 왕청현유격대는 1932년 봄에 소왕청 최창호네 물방아간에서 김철, 량성룡 등 12명으로 선참 조직되였다. 얼마후에는 중대로 발전하고 그해 11월에는 3개 중대를 가진 대대로 발전하였다. 박록금부부가 왕청현유격대 1중대에 가입한것은 이 시기의 일이다. 1934년 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왕청3퇀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박록금이나 강증룡이나 모두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난데서 록금이 20살도 안된 나이에 결혼할 때 결혼이불 한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때 왕청현유격대대 정위는 안도유격대에서 넘어온 김일성이였다. 어느날 김일성정위는 1련 정치지도원으로부터 박록금이 금방 해산하였지만 록금이 머무르고있는 소왕청근거지의 친정집에는 변변한 포대기 하나 갖추지 못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가보니 정말 그러하였다. 김일성정위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 제80페지에서 재봉대에 지시하여 밤도와 두툼하고 푹신한 이불 한채와 애기포단, 애기옷을 만들어 보내주기까지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1934년 4월,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 활동하던 화룡2퇀의 주력부대는 적들의 대거토벌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화룡현 서북부로 진출하여 안도 대사하, 처창즈일대를 개척하는 서막을 열어놓았다.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연길, 왕청퇀의 일부 련들을 뽑아 독립퇀을 무어 화룡퇀과 배합하여 안도현 대사하, 처창즈일대에서 일련의 전투를 벌려 적들을 구축하고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는 과업을 수행하게 하였다.

1934년 5월이후 박록금의 남편 강증룡은 왕청퇀 7중대 소대장이 되여 소속부대를 따라 안도독립퇀에 소속되여 처창즈근거지를 개척하는 일련의 전투들에 참가하였다. 그 시절 몇몇 항일근거지들을 제외한 연변 4개 현의 지방당조직이 모두 파괴되고 항일근거지들에서 하산풍이 일 때 박록금은 달린 아이로하여 부대를 따르지 못하고 지방에 남게 되였다. 그러나 녀성혁명가인 박록금은 혁명대오에서 떨어질수 없었다. 박록금은 어린 아이를 친정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남편을 찾아, 대오를 찾아나섰다. 그는 끝내 천신만고끝에 장백산쪽에 이르렀고, 김일성장군과 남편을 다시 만나 새로 조직된 항일련군 제2군 3사부대에 가입하게 되였다.

박록금이 당구위 부녀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오늘의 왕청현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 옛터 입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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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새봄에 항일련군 제2군 3사는 무송현 마안산에서의 확건을 거쳐 신속히 장대해졌다. 이해 4월, 3사 사장 김일성은 소속부대를 지휘하여 무송현 만강을 습격하여 이곳 주둔 위만군부대에 섬멸적 타격을 주었다.

전투후 부대는 무대를 꾸미고 문예공연을 하였는데 화룡적 전사들이 무대에 올라 《아리랑》 우리 민요가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왕청적 녀전사 박록금 등은 무대에 올라가 《도라지》를 건드러지게 부르며 성수난 춤을 이어갔다. 훈춘적 전사들은 무대에 흥이 난 로씨야춤인 댄스를 올리였다. 로씨야 댄스는 발로 무대를 쾅쾅 차면서 돌아가는데 장백의 심산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만강의 조선화전민들은 난생처음 희한한 댄스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만강에 항일련군ㅡ김일성부대가 왔다는 소문은 조선인 화전민으로 이루어진 이곳 80여세대(중국인이 몇세대 되지 않음) 산재부락에 쫙 퍼지였다. 어느덧 허락여툰장네 집마당은 삼삼오오 모인 숱한 사람들로 자연스런 마을사람들 대회가 열리고 김일성이 이 세상 제국주의길과 무산계급의 길을 두고 격앙된 연설을 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이해 4월 무송현 만강에서의 또 하나의 희사는 만강부근의 수림속에서 6사 사령부 직속 녀성중대가 새로 조직된 일이다. 왕청땅에서부터 혈혈단신 남편을 찾아, 항일부대를 찾아 남만의 무송현 마안산까지 찾아왔던 녀전사 박록금이 녀성련 첫 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해 새봄에 무송현 마안산에서 신속히 새 사단으로 편성된 항일련군 제2군 3사가 한달밖에 안되는 사이에 사단사령부 직속 녀성련까지 조직하였다는것은 놀라운 발전이 아닐수가 없다. 전쟁은 예로부터 남자들 전유물과 다름 없었다지만 우리 조선민족 녀성들이 손에 무기를 잡고 남자들 못지 않게 싸우게 되였다. 그뒤의 일련의 전투들은 우리 민족 녀성들이 과연 남자들 못지 않은 항일전사들임을 보여주고있다.

무송현의 최남단 마을ㅡ만강에서 위만군부대를 들부시며 4월의 한때를 보낸 박록금 소속 항일련군 2군 3사는 5월에는 동강부근에서 중국인 조국안이 거느린 1군 2사부대와 회합한 뒤 함께 동강툰의 위만군병영을 기습하여 숱한 적들을 살상하고 전리품들을 로획하였다. 동강전투에는 갓 조직된 녀성련이 참가하였는데 녀성련은 그번 전투에서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소문이 났다. 더우기 녀성련의 연길현 출신 김확실 등 3명의 녀전사들이 어스름한 달빛속에서 각각 한발씩 총을 쏘아 위만군병영을 이어주는 경비전화선을 잘라버리며 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이야기는 동강전투의 산물로 오늘에 이어진다.

같은 달 3사 7퇀은 명령을 받고 무송의 소탕하부근에서 위만군기병대 30여명을 짓부시는 전투를 벌리였다. 이날 전투에는 사령부 직속 녀성련도 참가하였는데 아군은 위만군기병대 2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만 해도 16자루를 로획한 전과를 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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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탕하전투직후 박록금 소속 3사부대는 무송현에서 남으로 근 100리 떨어진 서강을 향해 진군하였다. 서강은 위만군병영이 들어앉은 적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였다. 3사 사령부에서는 당지 군중들을 통해 적들의 형편과 《집단부락》의 형편을 자상히 알아내고 산하 7퇀에 맡기여 돌연습격의 전투로 서강의 위만군 40여명을 격파한 뒤 6월초에 무송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림강현 서남차로 진격하였다.

림강현 서남차 부근에는 위만군수비대가 도사리고있었다. 이자들은 수비대 병실공사를 벌리면서 말을 타고 다니였다. 3사지휘부에서는 병실공사장 습격전투를 벌리기로 결정하고 이 과업을 박록금의 녀성련에 맡기였다.

6월 6일 점심시간에 초모자를 쓰고 호미를 둘러멘 몇몇 녀전사들이 마을 북쪽으로부터 농민복차림을 하고 마을부근의 병실공사장에 접근했다. 그들은 망루곁을 지나다가 갑자기 덮쳐들어 보초병의 총을 빼앗아냈다. 이때라고 공사장 근처에 매복해 있던 녀성련 전사들이 박록금련장의 신호총성과 함께 일제히 짓쳐나가 위만군놈들의 가슴에 검은 총구를 들이댔다. 저항을 시도하던 위만군 두놈은 그 자리에서 격사되고 나머지 16명은 황황히 두손을 들고말았다. 박록금이 지휘한 녀성련만의 한차례 멋진 싸움이였다.

서남차습격전은 전후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8자루의 총도 고스란히 아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전투가 끝난후 공사장 가까이까지 다가들었던 3사부대는 위만군수비대 건물앞에 야외무대를 꾸미고 문예공연을 하였다. 문예공연은 군민련환모임으로 번져갔다. 녀성련의 녀전사들은 박록금을 선두로 무대에 올라가 성수나게 춤을 추며 노래부르며 돌아갔다. 나중에 수비대건물에 불을 지르고 성벽과 망루를 짓부셨다. 포로한 위만군들에게는 해설사업을 한뒤 로자를 쥐여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짧디짧은 두어달동안에 2군 3사부대는 남만 무송의 만강, 동강, 서강과 림강의 서남차 등지에 신출귀몰하면서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다. 전투의 세례속에서 3사부대도 크게 늘어나 원래의 7퇀, 8퇀의 토대우에서 9퇀과 10퇀이 새로 편성되였다. 이들 2개 퇀의 주체는 항일을 원하는 원 구국군과 산림대의 장병들로 이루어졌다. 이후 제2군 3사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로 개편되였다.

1936년 8월 17일, 박록금 소속 항일련군 2군 6사는 여러 항일부대들과 더불어 무송현성진공전투를 치른후 사장 김일성의 친솔밑에 동강을 거쳐 무송현의 최남단마을ㅡ만강에 다시 들어섰다. 6사부대는 두번째로 만강에 들어서며 무송현성에서 69킬로메터나 떨어진 이곳 조선화전민들에게 연극 《혈해》, 즉 피바다를 선물하였다. 되골령 북쪽기슭의 태고연한 수림속에 자리잡은 만강, 만강의 적지 않은 청년들이 무대에 뛰여올라가 부대에 참군하겠다고 용약 나섰다. 그중 리학송, 허영준 등 9명의 청년들이 비준되여 총을 메고 항일의 대오에 들어섰다.

만강에 다시 머무른 2군 6사는 마을 사람들과 작별하고 다시 만강 물줄기를 거슬러오르며 천고의 수림을 헤치였다. 박록금과 녀성련은 부대속에서 행군하였다. 되골령을 넘으니 조선의 국경지대인 장백땅이다. 이해 5월에 김재수, 김정필 등과 함께 선발대의 책임자로 장백에 파견되여갔다가 돌아온 김주현이 길잡이로 나섰다. 김주현의 안내하에 우리 부대가 장백땅에 진출한후 처음 들린곳은 군중계몽과 혁명화가 잘된 2도강부근의 덕수골ㅡ신창동마을이다.

1991년 여름, 박록금이 참가한 오늘의 조선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 보천보전투 력사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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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36년 9월 1일이다. 이날 박록금 소속 2군 6사부대는 대렬선두에 기발을 높이 들고 나팔소리를 내며 위풍이 당당하게 신창동마을에 들어섰다. 부대는 김일성장군의 지시에 좇아 연극공연을 펼치려고 가설무대를 준비하는 한편 군중대회를 소집하고 항일선동공작을 앞세웠다.

점심상을 금방 차려놓았는데 적들이 달려든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2도강 주둔 위만군과 혜산에서 급파된 일제수비대 수백명이 불시에 밀려들었던것이다. 부대는 수저를 들다 말고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적들은 신창동에서 몇리 떨어진 신창동 웃마을에서 걸음을 멈추고 당지 마을 사람을 신창동에 보내 항일련군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다.

신창동에서 웃마을의 사람을 마주한 김일성장군은 돌아가서 항일련군부대가 그대로 있더라도 보고하라고 일깨워주었다. 이 사람이 세번째로 왔을 때는 부대가 이미 대덕수쪽으로 옮겨간 뒤였다.

적들이 신창동마을에 들어서니 과연 항일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적들은 또 신창동사람 리경화를 보내여 항일련군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닥달하였다. 리경화는 중도에서 돌아와 저쪽부대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을 돌려대였다.

적들은 드디여 시름을 놓고 대덕수쪽으로 꾸역꾸역 밀려갔다. 신창동 뒤산에 이르니 저앞에서 항일련군 녀전사들이 춤추고 노래부르며 오락판을 벌이고있었다. 사령부의 지시를 받은 박록금과 그의 녀성련 녀전사들의 걸작이였다. 적들은 웃음판이 흔들흔들했다.

이때라고 우리 부대는 작전부서에 따라 어느결에 적들의 꼬리를 물고 불의 습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일제수비대 대장놈도 비명에 죽고말았다.

이는 2군 6사가 장백땅에서 벌린 첫 멋진 싸움이였다. 대덕수전투는 말그대로 조선사람들에게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알려진 2군6사가 장백땅에 나타났음을 만방에 알리는 첫 총성이였다. 이 첫 전투에서 박록금을 대표로하는 녀성련의 녀전사들이 적들을 꼬이는 역할을 잘 놀면서 전투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신창동은 그리 깊지 않은 좁은 골안에 자리잡은 조선인마을들이다. 마을 량켠에는 낮다란 산이 둘러있고 시내물이 골안을 따라 졸졸 흘러내린다. 마을 뒤쪽 산등성이를 소덕수등판 또는 마등창(马登场)이라고도 부르는데 부대는 이날밤 명령을 받고 이곳에 풍막들을 세우고 식사하고 숙영하였다.

이튿날 아군은 마등창수림속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 무렵에 아군의 몇배에 달하는 적들이 전날 패전의 보복으로 15도구방향과 이도강방향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 달려들었다. 이에 앞서 2도강쪽에서 밀려든 적들은 신창동마을에 기여들었다가 헛물만 켰는데 마침 마을의 한 녀인이 함지에 점심밥을 가득 담아이고 곧추 소덕수 등판에 오르고있었다. 일본군 장교놈이 망원경을 들고 녀인이 사라진 쪽을 살펴보니 한낮인데도 성긴 숲속에서 잠을 자고있는 항일련군의 모습이 안겨들었다. 그속에는 녀성련의 녀전사들도 들어있었다.

《요-씨!》(일본말로 옳지 됐다는 뜻) 일본장교놈은 흡족해서 제멋에 중얼거리였다. 때를 같이하여 귀청을 때리는 총소리가 함께 일본장교놈이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15도구쪽에서 달려든 적들한테도 총알이 날아갔다. 적들의 협공을 저들 개싸움으로 역전시키는 전술이였다. 그 사이 6사부대는 마등창숲속을 슬쩍 빠지였다. 적들은 그런줄도 모르고 맞불질하며 결사적으로 싸워댔다.

 
1991년 여름, 필자가 찍은 보천보전투지휘처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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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나 흐른 뒤 2도강쪽에서 밀려든 놈들은 견디기가 어려워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때에야 제편끼리 싸운것을 알고 사격을 멈추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적 쌍방간의 손실은 너무도 막중했다. 이날 악이 난 적들은 항일련군의 뒤를 물며 희샤즈거우쪽에 장막을 치고 숙영하다가 밤에 또 아군의 야간습격을 당했다. 설상가상이였다.

적들은 박록금과 녀성련이 참가한 장백땅에서의 첫 총소리―덕수골 대덕수전투와 소덕수전투에서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지 사람들은 대덕수전투를 치른 신창동뒤산더기를 《장군봉》이라고 친절히 불렀다. 김일성이 《축지법》을 쓰고 《둔갑술》을 쓴다는 소문이 장백의 국경지대에 파다히 퍼지였다.

대덕수, 소덕수 전투가 벌어진 이해 1936년 9월부터 11월까지 기간 박록금 소속 2군 6사는 장백현의 반절구, 13도구, 20도구, 2도강 등지에서 련속 적들을 답새기며 압록강연안일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후 2군 6사부대는 되골영의 희샤즈거우밀영으로 유유히 움직이였다. 희샤즈거우밀영은 제1밀영과 제2밀영, 제3밀영, 제4밀영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밀영은 적들의 《토벌전》 전초기지인 2도강에서 북으로 12킬로메터가량 들어간 홍두산 줄기에 자리잡았다. 2도강이라야 장백현성에서 북으로 26킬로메터밖에 안되는 거리이다.

대덕수, 소덕수 전투이후 6사 사령부에서는 리동학을 책임자로 하는 소부대를 파견하여 장백현 땅을 훑으며 인재발굴에 전력하게 하였다. 1937년 봄과 가을 사이에는 선후로 권영벽, 김주현, 김평, 김재수, 김정숙, 박록금, 김정필, 마동희, 지태환 등 30여명의 동지들을 정치공작원으로 압록강 국경지대와 조선국내 깊이에까지 파견하였다.

1937년 새해벽두에 박록금은 장백현 20도구 신흥동 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되였다. 그는 신흥동 위촌장 리제순의 집에 거처하였다. 리제순은 6사의 지하공작원이였다. 박록금과 리제순 등 동지들의 노력으로 신흥동마을은 짧은 기간내에 혁명화되여가면서 항일련군 2군6사 원호사업이 자못 활기를 띠였다. 1936년 9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사이 20여호 밖에 안된다는 신흥촌사람들이 쌀 300여두, 솜버선 200여컬레, 광목 150여필과 적지 않은 의약품, 필수품을 보냈다는 자료가 이를 잘 알려주고있다.

그 시절 어느날 6사의 파견을 받은 리동학이 소부대를 거느리고 신흥촌에 나타났다. 리동학은 적들의 시선을 전이하기 위하여 마을의 청년들과 장년들을 모두 《가두고》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낮에는 오락회를 가지고 하모니카에 맞춰 《적기가》 등 혁명가요를 부르며 성수나게 조선춤과 로씨야댄스를 추었다. 마을사람들은 하나둘 모이더니 어느덧 오락회마당을 둘러쌌다.

이튿날 아침 항일련군 소부대가 떠나갈 때 《가둔》 청장년들을 내놓으며 경찰관주재소에 가서 김일성부대가 다녀갔다고 보고하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직접적조치였다. 그리고는 리제순을 《붙들어》가지고 마을을 떠났다. 박록금도 따라서 마을에서 없어졌다.

그제날 박록금 소속 항일련군 제2군 6사가 활동하던 압록강반, 오늘도 압록강은 유유히 흐른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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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금과 리제순 등 동지들의 피타는 노력으로 부대원호 사업과 더불어 항일련군 2군 6사가 지도하는 조국광복회조직은 장백현 전 지역에 뿌리를 박았다. 1937년 초봄까지 장백현의 거의 모든 중심마을들에 지하당조직들이 조직되였다.

드디여 1937년 2월, 김일성장군은 위증민장군과 함께 장백의 횡산밀영에서 권영벽, 김평 등이 참가한 6사 당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권영벽을 서기로 하고 리제순을 부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와 리제순을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장백현의 항일투쟁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고 혁명의 불길은 장백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거세차게 타올랐다. 박록금은 6사부대의 한 정치공작원으로서 장백현 전 지역을 혁명화하는데 나름의 기여를 하였다.

1937년 3월, 무송현 서강에서 동북항일련군 제2군 군정간부회의가 열리면서 대부대에 의한 조선국내진출작전방침이 검토되였다. 이 작전방침에 따라 박록금 소속 2군 6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일제히 새 여름군복을 갈아입고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이튿날 구시골 등판에 이르렀다. 원정부대는 다시 구시물동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지체없이 조선대안의 곤장덕에 이르렀고 이날 6월 4일 밤에 보천보진공전투를 승리적으로 벌리였다.

원정부대는 다시 구시물동을 건너 6월 5일 이른새벽에 구시골에 이르렀다. 조선 혜산의 경찰대장을 통하여 보천보 보고를 받은 국경특설경비대장 오가와는 30여명의 국경경비대를 비상소집하여 자동차에 앉아 선두에서 원정부대를 추격하였다. 아군은 적의 추격을 미리 예견하고 구시골에서 아침식사를 끝낸 뒤 구시산 릉선에 매복, 대기하고있었다.

오가와부대는 구시산매복진에 걸려들어 섬멸적타격을 받았다. 국경특설경비대의 뒤를 따르던 히로바시부대와 구마다부대, 위만군부대 수백명이 싸움터에 이르렀을 때는 우리 부대가 이미 멀리 떠나간 뒤였다. 박록금은 김확실 등 녀전사들과 함께 보천보전투와 구시산매복전에 참가하여 녀전사들도 남전사들보다 못지 않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박록금 소속 2군 6사는 19도구 지양개에서 6사의 조선국내진공작전을 후원하고 협조해준 2군 4사와 1군 2사 부대와 승리적으로 상봉하면서 오월단오날 이들 2개 부대와 공동으로 지양개 등판에서 성대한 군민련환대회를 가지였다. 지양개 넓은 등판은 항일련군 장병들과 조국광복회 회원 수백명으로 차고넘치였다.

그날 박록금은 녀전사들을 이끌어 대회에 축기를 만들어 올리는 일을 맡아나섰다. 박록금은 또 3개부대의 적지 않은 조선족 녀전사들과 더불어 조선치마저고리차림으로 군민련환대회에 나타나 지방처녀들과 함께 쌍그네를 뛰여 화제로 되였다. 숲속에서는 노래소리가 들썽하며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조선복장차림의 녀전사들이 춤판을 고조에로 이끌며 돌아갔다.

장백땅에 뿌리 내린 조국광복회 조직들과 당조직의 흥기, 이런 조직들을 통한 장백사람들의 부대원호사업은 적들의 지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아냈다. 급해맞은 적들은 1937년 10월에 장백일대에 무력을 증파하는 한편 이른바 《혜산사건》을 조작하고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2군 6사가 한해 남짓한 기간 피타는 노력으로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은 거의가 파괴되고 권영벽, 리제순, 박록금 등 수많은 동지들이 불행히 체포되고 피살되였다. 때는 김일성장군이 이끄는 2군6사부대가 몽강일대로 진출한 뒤였다.

박록금은 중공장백현위 서기와 부서기들인 권영벽, 리제순을 도와나서다가 적들이 조작한 《혜산사건》에서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조선혜산경찰서를 거쳐 함흥형무소에 이송되였다. 그는 함흥형무소에서 일제놈들과 굴함없이 싸우다가 1940년 10월에 옥중에서 고귀한 생을 마치였다. 지금 조선 평양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는 박록금의 유해가 모셔지고 반신상이 세워졌다.

2015년 3월 20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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