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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항일녀렬사의 충혼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02 15:07:32 ] 클릭: [ ]

-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

《81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항일녀렬사의 충혼》

항일렬사 최계옥녀사의 사적발굴과 기념비 복구 이전에 얽힌 절절한 사연

서언 - 색바래져가는 전설앞에서

건국 64주년을 맞으며 안도현 현성 토월산기슭에 안도현혁명렬사릉원이 새로 건설되였다. 안도현민정국에 따르면 1만 2000평방메터 부지에 550만원의 투입으로 건설된 현대적인 렬사릉원에 전 현 907명 혁명렬사를 모시였다. 그중 여직 각지에 분산되여 있었거나 최근년 추가 발굴한 렬사들이 50명되는데 렬사릉원에서는 별도로 단묘(单体墓)묘지구역을 설치해 모시였다고 한다.

묘지 앞줄 《항일전쟁시기》구역 5번째로 《최계옥렬사》묘비가 보이는데 주인공 최계옥렬사는 안도현항일유격대 통신원으로 1932년 10월 24일 임무 수행중 일본놈들에게 붙잡혀 머리태를 말꼬리에 묶이워 끌려가 안도현 석문진 동흥툰에서 놈들의 불에 타 희생된분이다. 81년만에 최계옥렬사는 이곳에 귀안해 목숨바쳐 지킨 사랑스러운 고향을 굽어볼수 있게 된것이다. 비로소 최계옥렬사의 후손 두 세대의 소원이 실현된셈이다.

최계옥렬사의 사적은 여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최계옥렬사의 후손들이 81년만에 외할머니를 혁명렬사릉원으로 이장해 모시는 장면이다. /사진:김영자

최계옥렬사는 연변(연길시)혁명렬사릉원 영명록에 이름은 있었지만 봉분, 사적기재는 없고 , 알게모르게 가족 혹은 촌급관리렬사기념시설에서 《관리》하는 렬사로 있었다고 할수 있다. 최계옥렬사의 영명은 혁명렬사릉원에 새겨지기전 1958년 가문 기타 4명 렬사의 영명과 함께 가문 후손들이 비준을 받고 세운 기념비에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을 가족들은 《최씨렬사비》라 불러왔다고 한다.

《최씨렬사기념비》에 영명이 새겨졌던 가문 기타 4명 렬사들도 당과 국가의 《분산된 렬사기념시설 천이, 정합, 구급보호》정책으로 바야흐로 연변(연길시)혁명렬사릉원묘지에 묘소를 앉혀 모시게 된다.

렬사의 위훈은 가슴 울먹이는 전설이자 정신적재부이고 힘이다. 지난 세월 우리는 눈앞의 물질적재부거나 실용적인 리득에만 집착하다보니 우리 주변에서 살아숨쉬던 소중한 정신적재부를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다. 기실 그 정신적인 재부는 여유로운 오늘을 선물해준 보이지 않는 소중한 얼이였다. 세월이 흘러흘러서 전설의 주인공들이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관련 당사자들이 얼떠름해지는속에 한때 하늘땅을 울리던 렬사들의 충혼은 아쉽게도 기억속에서 망각되고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당과 정부에서는 당면 그 어느때보다도 렬사기념사업에 대해 중시를 돌리고있다.

2014년 10월 1일 즉 건국 65주년전으로 전국 61만 5000개소의 분산된 렬사묘소와 1만 2000여곳의 분산된 렬사기념시설에 대한 구급보호사업을 완수하며 장기적으로 효력을 유지하는 관리기제를 실시하기로 한다. 2011년 3월 15일 민정부, 재정부에서 련합으로 공포한 《분산된 렬사기념시설건설관리보호사업을 강화할데 관한 민정부, 재정부 통지》에서 이 목표를 제출하였고 그뒤로 련이어 새롭게 《렬사찬양조례》, 《렬사기념시설보호관리방법》이 제정되였으며 또한 처음으로《렬사안장방법》(2013년 4월)이 제정, 실시되였다.

2013년 7월, 중공중앙판공청, 국무원판공청, 중앙군사위원회판공청은 《진일보로 렬사기념사업을 강화할데 관한 의견》(이하《의견》으로 략칭)을 발부하였는데 《의견》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쓰고있다.

《…렬사들의 정신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키 위하여 끝임없이 분투해가는 힘의 원천이다. 당중앙은 력래로 렬사기념사업에 고도로 되는 중시를 돌려왔고 일련의 정책조치로 렬사기념사업에 있어서 선명한 효과성을 거두었다. 형세임무의 발전변화에 따라 렬사기념사업에 아직 일부 부족점이 존재한다. 특히 어떤 지방과 부문에서는 이 사업에 대한 중시가 부족하고 공중의 참여도가 높지 못하며 관련 제도기제가 완벽화되지 못했다. 18차당대회정신을 관철하고 사회주의핵심가치관체계건설을 전력추진하기 위하여 당중앙의 동의를 걸쳐 중공중앙판공청, 국무원판공청, 중앙군사위원판공청에서 진일보로 렬사기념사업을 강화할데 관해 의견을 제출한다》고 했다…

우리 나라에서 렬사기념사업에 관한 정책법규가 이렇게 밀집공포된적은 없었다. 동시에 분산된 렬사기념시설에 대한 천이, 통합, 신축 및 구급보호공사에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에서는 100억원을 전문 배치하였는데 이 역시 있어본적 없는 일이다.

이 세기적인 대역사속에서 기자는 80여년간 전적지의 산기슭에 소리없이 묻혀져있은, 뼈 한줌 찾을길 없이 이름석자만 남겨진 최계옥렬사 및 그 최씨가문 5명 렬사의 묘비를 령사릉원으로 천이, 통합하는 과정을 추종 취재할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기자는 민족과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3대가 목숨바친 전형적인, 여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최계옥렬사와 최씨가문의 혁명사적을 료해, 정리하게 되였고 그 과정에서 기자는 국가적으로 렬사와 렬사사적에 대해 발굴, 정리하고 그 기념시설에 대해 구급보호하는 일대공사는 민족부흥의 길로 가는 관두에서 얼마나 절실하고 적시적인가를 절감하였다.

렬사기념시설에 대한 천이, 통합, 신축 및 구급보호공사를 비롯한 렬사기념사업을 강화하는것은 중화민족의 가장 보귀한 정신적 재부를 구급보호하는, 천추만대에 남겨주는 근본적인 민생공사이라고 본다.

몇년간 기자는 렬사들의 유적지와 렬사비를 찾아가는 한 국민의 반사(反思)행동과정을 통하여 력사의 귀중함을 알게 되고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이 력사의 절박함과 시급함을 알게 된다. 한세대를 뛰여넘어오도록 늦었지만 고래희를 딛고서라도 거룩한 영령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로심초사하는 주인공, 최계옥렬사의 후손인 박영철선생의 사명감과 용단은 우리에게 감동과 교시를 안기고있다.

또 당면 당과 정부에서 이토록 렬사기념사업에 대해 중시하고있음에도 기자는 최씨렬사이장공사와 관련되는 유관 집행인원들의 렬사기념사업에 대한 판이한 두가지 리해와 자세를 보았다.

기실 정의(正义)롭게 살고 응분의 책임과 사회적 의무에 충실해가느라면 그 자체가 하나하나의 찬란한 전설로 남게 될것이며 렬사든 보통인이든 그 전설은 우리가 민족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떠밀어주는 소중한 정신적문화유산으로 전해지리라고 확신한다.

기자는 9년전 《길림신문》의 해남도의 유일한 독자였던 박영철(73세)선생을 인터뷰한 적있다. 선생은 《길림신문》에 게재되는 《우리민족의 전통과 례절》을 꼬박꼬박 스크랩해오던중이였는데 두기의 신문이 빠져 연길행차에 특별히 신문을 복사하려다 기자와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그때 《언제 어디서든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잊어서는 안된다. 배우면서 자손들에게 전해주련다.》라는 선생의 말씀에 너무 인상깊었다.

그러시던 선생이 3년전, 외가집 충주최씨족보와 함께 《내 생에 완수해야 할 숙제》라는것을 안고 기자를 찾아왔다. 항일투사인 외할머니 최계옥렬사와 3대 4대로 이어지는 최씨가문 10여명 렬사들의 혁명사적을 내놓으면서 뼈아픈 자책과 남겨진 사명을 남은 생에 꼭 풀어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기자는 그로부터 3년간 선생이 그 뜻을 실천하는 과정을 견증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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