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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4)— 금주공격전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4 09:27:07 ] 클릭: [ ]

1948년 10월, 동북과 관내를 이어주는 길목인 금주주변에서 국공량당 최정예부대가 대결전을 치르고있었다. 금주공격임무를 맡은 동북야전군 각 종대는 금주시교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르며 견고한 적의 거점을 하나하나 제거하고있었다.

3종대 7사가 배수지에서 고전을 겪을 때 량갑산공격임무를 맡은 3종대 8사도 고전을 치르고있었다.

배수지동부 1000여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량갑산언덕에는 큰 봉화대가 있었다. 수비군은 봉화대를 천연진지로 만들고 주변에 대량의 지뢰를 매설해놓았다. 8사 사단부에서는 모든 산포를 집중해 량갑산의 적진지를 사격한후 24퇀 3영을 선봉으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은페호에 몸을 숨겼던 국민당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막아나섰기때문에 3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고말았다. 다시 2영과 1영을 선후로 돌격시켰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의 수비력량은 좀처럼 약화되지 않았다.

8사지휘부에서 적정을 살피던 3종대 한선초사령원은 적의 수비력량이 약화되지 않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이곳저곳 자상히 살펴보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찾게 되였다. 풀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량갑산봉화대밑으로는 빗물에 씻겨 형성된 작은 물도랑이 있었던것이다. 놈들은 그곳으로부터 계속 지원병과 무기를 봉화대주진지로 수송했기때문에 적의 수비력이 약화되지 않았던것이다.

한선초사령원은 포병을 시켜 물도랑을 통제하고 다시 부대를 조직해 돌진하게 하였다. 8사 조선족장병들은 정확한 포사격으로 물도랑을 엄밀히 통제하였다. 그러자 지원을 받지 못한 봉화대의 수비군은 신속히 무너지고 8사 전사들은 일제히 량갑산을 점령하게 되였다.

동북야전군 전선지휘부가 있었던 망우툰(금주근교).

동북야전군 전선지휘부 기념관(망우툰).

지휘부 내부.

금주이북에서 동북야전군 3종대가 적의 수비가 가장 막강했던 배수지와 량갑산 거점을 제거하고있을 때 기타 부대도 신속히 금주교외의 크고작은 적거점을 제거하였다. 금주남부교외를 공격하게 된 동북야전군 7종대는 3종대가 굴진의 방법으로 의현을 공격한 경험을 배워 밤도와 갱도를 팠다.

금주전역에 참가한 7종대 20사 58퇀 경위련은 연변의 조선족청년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들은 사단부의 통일적인 포치에 따라 금주서남부의 적거점까지 굴을 팠다. 10월 13일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이들은 200메터밖에서 줄을 당겨 미리 매설해놓았던 폭파약을 터쳐 적보루를 폭파하였다. 적진이 폭파되자 경위련 지도원 박상철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돌진하였다.

그런데 앞에 적화구가 또 나타났다. 비발치는 적탄에 전사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때 전사 박재화가 폭파약을 들고 달려가다가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손기섭, 김귀남, 김금돌 세 전사가 폭파약을 들고 부동한 방향으로 적보루를 향해 나갔다. 손기섭은 수차 부상했지만 피를 흘리며 달려가 끝내 적보루에 접근하여 폭파하였다. 전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적지휘부를 점령하였다.

10월 13일까지 금주를 포위한 동북야전군 각 종대는 드디어 외곽의 적거점들을 깨끗히 제거함으로써 금주성내에 대한 전면공격을 발동할수있는 조건을 마련해놓았다.

한편 동북야전군이 금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접한 국민당통수 장개석은 더는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말고 금주로 진격할것을 동진병퇀 사령인 후경여와 서진병퇀 사령 료요상에게 명령하고나서 자기도 급급히 《중경호》순양함을 탑승하고 발해만에 도착했다.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동진병퇀의 후경여는 10월 10일부터 정면으로 탑산진지를 공격했다. 발해기슭에 위치한 탑산은 사실 산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작은 마을이였다. 금주에서 40킬로메터 떨어져있기때문에 국민당군은 탑산만 지나면 두시간도 안되여 금주를 포위하고있는 아군의 배후를 공격할수 있었다. 탑산에는 동북야전군 4종대가 11종대의 배합하에 견고한 수비진을 치고 적을 막고있었다.

국민당군은 땅크, 대포, 비행기를 동원했을뿐만 아니라 바다의 함포까지 동원해 탑산진지를 집중공격하였다. 그리고는 수백명, 수천명씩 조를 나누어 거듭 탑산진지로 돌격해왔다. 동북야전군 4종대 장병들은 은페호에서 잠시 적의 포격을 피한후 공격해오는 적의 보병과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피를 말리는 전투는 꼬박 6주야 지속되였다. 발해연안 협소한 공간에서 만난 국공량당 십여만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한치의 땅을 다투고있었다. 피할래야 피할 곳도 없었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나서고 한개 부대가 전멸하면 다른 부대가 보충하면서 싸웠다. 적아 쌍방 사상자수는 모두 급격히 상승하였다.

강철의 의지로 굳어진 아군전사들은 끝까지 탑산진지를 지키고있었다.

며칠간의 접전속에서 국민당군은 탑산진지에 7,000여구의 시신을 남겼고 아군도 근 4,000명 희생자를 내였다. 참담한 진지는 그야말로 시체가 쌓여 산이 되고 피가 흘러 바다를 이루었다.  탑산에서의 숨막히는 대치상황을 조속히 끝내고 아군의 사상자를 줄이려면 신속히 금주를 공점해야 했다.

1948년 10월 14일, 하늘땅을 진감하는 탑산진지와는 달리 외곽전투를 끝낸 금주성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림표, 라영환, 류아루를 비롯한 동북야전군 최고지휘자들이 모두 금주부근의 모아산에 올라 이제 곧 개시될 총공격의 시각을 기다리고있었다.

오전 10시, 동북야전군 포병종대의 집중사격이 금주의 정적을 깨뜨렸다. 근 600문에 달하는 대구경대포가 동시에 금주를 목표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해방전쟁시기 공산당부대로 놓고볼때 이처럼 한번에 600문의 대포를 집중해 한개 목표를 집중포격하기는 처음이였다.

하늘땅을 진감하는 굉음속에서 성벽이 허물어져내렸고 크고작은 적보루가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금주주변 대량의 지뢰가 폭발되고 철조망, 록시가 파괴되였다.

한시간 남짓한 포격이 있은후 동북야전군 장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2종대와 3종대 그리고 6종대 17사로 구성된 북부공격집단은 3종대 한선초사령원의 통일적인 지휘에 따라 금주이북으로부터 남부를 향해 공격하였고 7종대와 9종대로 구성된 남부공격집단은 북부로 공격하였으며 8종대는 동에서 서부로 협공하였다.

아군장병들은 포병부대의 엄호하에 신속히 개활지를 넘고 해자를 건너 포격에 허물어진 성벽을 지났다. 그들은 구석구석 숨어 발악하는 적을 소멸하면서 일제히 성내로 돌진해들었다.

3종대 7사와 8사는 포격에 30여메터 너비로 허물어져내린 성벽을 넘어 금주의 괴뢰만주국 성정부건물을 목표로 돌진했다. 강철과 콩크리트로 축조한 성정부건물은 아주 견고했으며 모든 창구가 총구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부근의 경찰학교의 붉은청사도 성정부건물과 기각을 이루며 공격해오는 아군을 향해 교차사격을 가했다. 전사들은 적의 드센 화력에 머리를 들수 없었다. 게다가 성정부건물지붕에서는 국민당군이 로케트포와 박격포를 사격했기에 사상자도 많이 나왔다.

대치국면이 지속되였다. 배수지에 설치한 지휘부에서 부대의 공격상황을 살펴보던 7사 사장 등악은 공격이 여의치 못한것을 보고 화가 동했다. 곁에 있던 한선초사령원은 조급해하는 등악사장을 달래며 《용감한 우리 전사들을 나무랄것이 못되오. 책임은 공격지점을 잘못 선택한 우리 지휘원들에게 있는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 사단의 포병부대를 동원해 보병과 함께 돌진함으로써 적의 거점을 까부실것을 명령함과 동시에 예비대인 9사를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4일 황혼녘에 3종대 9사까지 공격에 투입되였다. 9사 27퇀은 사범학교의 적거점을 제거한후 적 땅크 한대를 까부시고 철길을 넘어섰다.

전사들은 백운공원의 적포병진지를 점령하고 류탄포 12문을 로획하였다. 그리고 중앙은행부근에 설치한 범한걸의 전선지휘소를 점령하고 적 70여명을 생포하였다. 한편 9사 25퇀도 철길을 넘어 중앙대가를 따라 공격하던중 국민당 6병퇀 사령부청사를 폭파하였다.

성정부청사와 경찰학교청사의 교차사격을 받던 3종대 7사와 8사는 장밤 적과 대치하면서 싸웠다. 7사 19퇀은 거듭 폭파조를 내보냈지만 건물을 파괴할수 없었다. 적건물이 너무나도 견고했기때문에 사단 포병부대의 직사포사격도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휘원들은 폭파약을 집중해 상대적으로 약한 건물 옆부분을 폭파하기로 결정하였다. 명령에 따라 몇몇 전사가 폭파약을 안고 달려갔다. 그들은 폭파약을 지정된 곳에 가져다 놓았을뿐만 아니라 희생된 전우의 폭파약까지 한데 쌓아놓았다.

폭파약이 키높이로 쌓이자 마지막 폭파수가 달려가 도화선을 당겼다. 《꽈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드디어 적 성정부청사의 한쪽 모퉁이가 떨어져나갔고 일부 벽이 무너져내렸다. 이때를 기다리던 전사들은 일제히 돌격해 건물내에 숨은 놈들을 하나하나 소멸하였다.

한편 경찰학교건물에 막혀 진종일 싸우던 8사 23퇀 전사들은 고립된 놈들에게 투항하라고 소리쳤다. 경찰학교건물보다 더 견고한 성정부건물이 무너져내리는것을 본 수비군은 더 싸울 의지가 없었다. 23퇀 전사들이 《투항하면 죽이지 않는다!》고 소리치자 건물내 고립되였던 193명 적군 병사들이 모두 두손을 들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10월 15일 아침까지 3종대 각 부대는 교통대학과 료서행서를 점령하고 또 93군 군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9사 27퇀은 승승장구로 전진해 중앙은행의 적수비군을 전부 소멸하였다. 그리고 기타 부대도 오후 6시까지 남은 적을 깨끗 이소멸하였다.

료심전역 기념관의 금주전역 재현도.

금주전역 기념비.

10월 14일 10시부터 15일 18시까지, 31시간의 격전을 거쳐 동북야전군 각 부대는 금주의 적 10만 수비군을 소멸하고 국민당 금주지휘소 주임인 범한걸을 생포함으로써 승리적으로 금주를 해방했다.

금주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당 동진병퇀의 공격도 멈추고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장개석은 부하 장교들이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는다고 몰아부치면서 실패원인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그는 계속 부대를 정비해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것을 동진병퇀에 명령하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할것을 서진병퇀 사령인 료요상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10만 정예군을 거느린 료요상도 동북야전군 10종대의 견제를 받아 큰힘이 되지 못했다.

대량의 조선족장병을 포함한 10종대는 한걸음 한걸음씩 료요상의 서진병퇀을 죽음의 길로 유인하고있었던것이다.

/ 중앙인민방송구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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