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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3)— 배수지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24 08:57:14 ] 클릭: [ ]

동북야전군 수십만 대군이 료서에 집결해 대결전을 준비하고있을 때 줄곧 흑룡강성 쌍성시에 있었던 동북야전군 지휘기관도 자리를 뜨게 되였다. 림표, 라영환을 비롯한 동북야전군 지휘기관은 다년래 줄곧 《쌍성》이라는 이 작은 진에서 가장 어려웠던 림강보위전을 지휘하였고 또 전략적 대반격을 지휘하였던것이다.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동북야전군 지휘부요원들을 실은 렬차는 우선 할빈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빈주선을 달렸다. 렬차에서 림표사령원과 라영환정위는 의현을 해방했다는 소식과 포병사령 주서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도 동북야전군사령부의 전문을 받고 주서가 희생된 소식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즉각 동북의 포병학교를 주서포병학교로 명명한다는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을 동북야전군 사령부에 전했다.

동북야전군 사령부를 실은 렬차는 적첩보원과 비행기 폭격을 피해 낮에는 쉬였다가 밤에만 달려 대결전의 전초선인 금주로 달렸다. 한편 이때 금주의 문호로 불리우는 의현이 공점되였다는 소식을 접한 장개석도 더는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는 급급히 비행기를 타고 심양에 도착해 관례적으로 사단장급이상 장교들을 모아놓고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분발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공산당의 포로가 될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동서협공》이라는 새로운 작전계획을 내놓았다. 그는 산동의 7개 사단과 금서, 호로도부근에 있는 4개 사단으로 《동진병퇀》을 편성하고 17병퇀 사령인 후경여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동부로부터 금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심양의 국민당군 최정예인 신1군과 신6군을 비롯한 12개 사단으로 《서진병퇀》을 편성해 9병퇀 사령원 료요상의 지휘하에 서부로부터 금주를 협공하게 했다. 장개석은 금주의 범한걸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야전군 주력과 대치하고있는 기회를 빌어 동서량쪽으로 동북야전군을 협공한다는 대결전구상을 이야기하면서 만약 이번에도 길을 열지 못한다면 래세에나 다시 만나볼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금주, 2000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금주는 동북과 관내를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했기때문에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충지로서 수많은 전란을 겪었다. 1948년 3월, 국민당은 금주에 이른바 동북《공산군토벌 총지휘부》 금주지휘소를 설치하고 수비전문가로 알려진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범한걸을 금주지휘소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범한걸은 제6병퇀산하의 93군의 7개 사단과 포병, 장갑부대까지 합쳐 10만 군사를 이끌고 금주를 수비하고있었다.

금주전역을 지휘할 동북야전군 지휘기관은 렬차를 타고 창무에 도착했지만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 림표도 국민당군이 동서협공준비를 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했던것이다. 그냥 이대로 금주를 공격하다가 최정예 국민당군의 협공을 받는다면 아주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것이라고 판단한 림표는 사사로이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문을 보내 금주공격을 포기하고 장춘을 공격하련다고 했다.

이를 안 정위 라영환은 급급히 참모장 류아루와 함께 림표를 찾아갔다. 그는 금주전역은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이고 동북국과 동북야전군에서 이미 동의한 사안이라고 강조하면서 지금 비록 적정변화가 있다하더라도 드팀없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험과 부담이 없는 전투란 있을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영웅적 동북야전군은 꼭 작전과업을 잘 완수해낼것이라고 했다.

주도세밀하고 내성적인 림표라지만 다년간 수많은 전투를 겪은 그도 군사작전에서는 대담성과 모험도 따른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재삼 고민하던 그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고 금주공략의 결심을 더 굳히게 되였다. 그는 즉각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문을 보내 전에 보냈던 전문을 무효로 선포함과 동시에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단호히 금주를 공점한다는 결심을 보여주었다.

관건적인 시기에 최고군사지휘자가 마음이 흔들리는데 대해 모택동은 화가 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련속 전문을 보내 금주전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금주전역의 결심을 내렸다는 림표의 다음 전문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렬차는 경적을 길게 울리며 드디어 창무를 떠나 금주로 향했다. 금주에 도착한 림표와 라영환은 금주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진 《망우툰》이라는 작은 마을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금주전선에 도착한 동북야전군 지휘부에서는 적정변화에 따라 작전계획을 일부 수정하였다. 동북야전군 제2종대, 제3종대, 제7종대, 제8종대, 제9종대 및 제6종대 17사와 포병종대 주력으로 금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금주공격전에 동원된 부대는 16개 사단에 25만 병력이였다.

그리고 제4종대와 제11종대는 금서이북의 탑산, 홍라선(虹螺岘)일선에서 국민당군 《동진병퇀》을 막게 하였고 제5종대, 제10종대, 제11종대와 1종대 3사를 비롯한 부대를 동원해 심양에서 출동한 국민당 《서진병퇀》을 견제하기로 했다.

의현을 공점한 동북야전군 제3종대 장병들은 의현에서 솜옷을 분배받고 잠시 휴식, 정돈을 하고있었다. 한선초사령원으로부터 전사들에 이르기까지 3종대 장병들은 다음 공격목표는 금주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동북야전군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주공임무를 맡은 3종대 장병들은 10월 7일 금주이북으로 이동했다.

《선풍부대》로 소문높았던 제3종대에는 조선족장병이 많았다. 금주전역에 대해 더 깊이 료해하기 위해 <영원한 기념비>취재진은 2008년 가을에 금주를 답사하였다. 40군 정위로 있었던 정순주장군의 소개로 우리는 40군 군부를 방문할수 있었고 40군 군사연구원들에게서 금주전역에 관련한 자상한 내용을 료해할수 있었다. 오늘의 중국인민해방군 40군의 전신이 바로 동북야전군 제3종대였던것이다. 특히 40군 간부휴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있는 조선족로전사들을 만날수 있어 더 기뻤다.

80세고령인 고영걸로인은 1946년 통화에서 리홍광지대에 입대하였다가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에 편입되였고 해방후 40군 120사 부정위로 사업하다가 리직하였다.

83세 고령인 배석규 로인은 통화현대대에 입대하였다가 3종대 8사 22퇀 경위련에 편입되였다. 그는 해방후 심양군구 땅크부대 18퇀 부정위로 사업하다가 리직하였다.

청원에서 입대한 신동춘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1946년에 청원조선족중학교의 박교장은 62명 조선족학생들을 거느리고 집단적으로 리홍광지대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신동춘로인은 해방후 40군 120사 후근부 정위로 사업하다가 리직하였다.

역시 80세고령인 리여길로인은 류하에서 리홍광지대에 입대하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1939년에 중국에 왔습니다. 통화의 류하현에 왔습니다. 1946년 6월에 리홍광지대 선전대가 와서 선전하니 입대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 다니지 못하고 소학교를 졸업한후에 부대에 왔습니다. 참군해서 리홍광지대 남대영 일본수비대 있는 5중대에 있다가 3종대에 병력이 부족하니 보충해왔습니다. 그때 한 300여명이 3종대에 왔는데 나를 포함한 150명은 3종대 7사 포병영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경위부대에 편입되였습니다.

함께 참군한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4촌형제까지 거의 전부 참군하였습니다. 집집마다 남자면 모두 참군하여 100명도 넘었습니다. 저는 줄곧 포병부대에 있었습니다. 포병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는데 보병이 올라가지 못하니 중국사람들이 폭파약을 가지고 폭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포병이 묘준사격하였습니다. 우리 포병부대의 포는 대부분 산포입니다. 산포는 분해했다가 조합할수 있고 사격거리는 7000메터에 달합니다. 직접 묘준하면 직접 목표를 폭파할수 있습니다.》

리여길로인은 해방후 40군 포병퇀장으로 사업하다가 리직하였다.

이처럼 동북에서 가장 일찍 야전군주력부대로 편성된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는 남만의 수많은 조선족청년들을 받아들였을뿐만 아니라 리홍광지대로부터 집단적으로 많은 조선족장병을 접수했던것이다. 정순주장군이 지적한것처럼 40군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군인들을 많이 양성해냈다. 이가운데 정순주장군과 옥종환장군이 가장 대표적이다.

호로도와 심양으로부터 막강한 적군이 공격해오기때문에 시간은 아주 소중하였다. 금주지역에 집결한 동북야전군 각 부대는 한주내에 금주를 공략할 의지로 신속히 외곽전투를 벌였다. 금주동부의 자형산, 남산, 서부교외의 비행장을 비롯한 거점은 하나하나 제거되였다.

금주공략의 난제는 북쪽에 있었다. 산에 의지했기때문에 금주이북은 지형이 비교적 높았고 적의 방어시설도 아주 좋았다. 제3종대장병들은 한선초사령원의 포치에 따라 7사와 8사를 동원해 배수지와 량갑산 거점을 공격하였다.

적배수지거점은 2층 건물높이의 물땅크로서 지형이 높은 산언덕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금주시내를 굽어볼수있었고 금주로부터 의현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할수 있었다. 국민당군은 물땅크의 물을 뽑아내고 세멘트건물주변에 중기관총과 대포를 걸어놓고 크고작은 십여개 방어진지를 만들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매설해놓았으며 건물담벽에는 《배수지 수비자들은 모두 강철로 다듬어진 사나이》라는 글을 써놓았다.

3종대 7사 장병들은 신속히 작전구역에 따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7사 20퇀 장병들은 완고한 배수지거점에 부딛쳐 치렬한 접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7사 산포영의 포병이였던 리여길로인은 포병진지에서 돌격하는 아군전사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었다.

(리여길) 《금주전투가 가장 치렬했습니다. 총공격에 앞써 금주북쪽에 배수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싸웠습니다. 배수지는 일본때 지하수를 끌어올려다 분배시키는 곳인데 적 가강련 한 200명가량 수비했습니다. 놈들이 공사를 어찌나 견고하게 했는지. 공격전 포병이 사격했습니다. 공사를 파괴해야 보병이 올라오는데 포병이 하나씩 전부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국민당이 파괴시킬 때는 전부 은페구에 있다가 보병이 돌격할 때 나와 사격하군 했습니다. 나와서 중기관총을 가지고 반격을 해서 우리 군 한 600여명 사망되였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두번째 소유의 포병을 전부 집중시켜서 사격한후 보병이 정면으로 돌격 안하고 우회해서 뒤쪽으로 공격해 30분내에 점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였습니다. 우리 포병부대도 절반은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북부교외 배수지거점을 제거하는 첫 공격은 결국 대량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하고말았다.

 
배수지전적지에서 로전사 리여길(좌)과 고영걸.
 

배수지 원건물에 새겨진 국민당군의 구호.

배수지전적비.

10월 12일 아침, 3종대 7사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 배수지를 공격했다. 수백발의 포탄이 날아가 적진지는 불바다로 변했다. 이 틈을 리용해 3련과 2련 전사들이 신속히 배수지로 돌진했다. 8년이상 군경력을 가지고있는 적수비군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땅속에 묻힌 물땅크 아래부분에 몸을 숨기고 아군의 포격을 피한후 신속히 빠져나와 돌격해오는 우리 부대 장병들에게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지뢰가 터지고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나왔다. 대량의 사상자가 난 3련은 더 공격하지 못하고 적과 대치하고있었으며 2련도 20분간의 반복적인 혈전을 거쳐 배수지동북쪽의 붉은벽돌집 4채를 점령했을뿐이였다.

아군이 배수지언덕에 발을 붙이게 되자 국민당군은 혈안이 되여 반격하기 시작했다. 적 퇀장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붉은벽돌집을 점령하러 나왔다. 하늘에서는 폭격기 두대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놈들은 장갑차 5대를 앞세우고 공격해왔다. 붉은벽돌집을 사수하고있던 2련 전사들은 맨 몸으로 수류탄을 안고가서 적 장갑차를 폭파하면서 적과 혈전을 치렀다. 하루종일 싸워 국민당군도 붉은벽돌집 진지를 점령하지 못했고 아군도 배수지를 점령하지 못하고있었다.

적아쌍방이 배수지진지에서 피를 말리는 접전을 계속 치르고있을 때 주변의 공격임무를 완수한 부대가 지원해나섰다. 2영과 3영 장병들은 배수지옆으로, 뒤로 공격해 끝내 배수지의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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