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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6)—자아희생적인 지달만영웅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8 19:36:34 ] 클릭: [ ]

1948년 3월까지 동기공세가 끝난 후 동북인민해방군은 전면적인 휴식정돈과 대규모적인 집중훈련단계에 진입하였다.

4월 11일, 동북야전군 군사사업회의에서 림표는 《대규모 병퇀작전, 정규화작전, 적의 핵심방어체계 공격》이라는 부대건설의 세가지 방침을 확정하였다.아울러 다년간의 작전경험을 총화하고 군작전원칙을 명확히 제기했다.

동북인민해방군에서 싸웠던 로전사들은 지금까지도 림표가 제기한 여러가지 작전원칙을 잘 알고있다.이를테면 《한개 중점을 확정하고 량쪽으로 공격한다》는 원칙은 전투과정에 화력을 집중해 적의 중점을 공격하고 병력이 충족한 상황에서 적을 량쪽으로, 세면으로, 네면으로 포위공격한다는 원칙이다.

《세가지 상황에 따른 세가지 작전방법》은 적이 수비할 때는 만단의 준비를 거친 후 파악이 있을 때 정면 공격하고 적이 수비할것인지 철수할것인지 망설일 때에는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공격준비가 되지 않아도 과감히 출격해 적을 포위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는것이며 적이 철수할 때는 명령이 있든 없든 병력이 적고 적정이 명확치 않더라도 과감히 돌진해 적을 추격한다는것이다.

《4개 조를 한팀으로 한다》는 원칙은 적의 견고한 방어체계를 공량하기 위한 수요로부터 제기된 원칙이다. 화력엄호조, 돌격조, 폭파조, 지원조로 나누어 한개 작전팀을 구성한다는것이다. 《네가지를 빨리 하고 하나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은 적을 빨리 따라잡고 돌파구를 빨리 돌파하며 적을 빨리 추격하지만 총공격 발동시기는 만단의 준비를 다 할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리고 맹렬히 타격하고 맹렬히 돌진하며 맹렬히 추격한다는 세가지 맹렬한 전술, 3.3제전술까지 합쳐 도합 6가지 작전원칙이 있었다.

통속적이고 쉽게 알수 있는 이러한 작전원칙은 실제적으로 작전에서 큰 위력을 과시하였다.동북야전군 군사사업회의에서 제1부 정치위원인 라영환은 군정규화건설에 관련해 보고를 하면서 부대 정치사상을 틀어쥐고 소고운동(诉苦运动)을 전면 개시할것을 요구했다.

라영환의 령도하에 동북야전군 각 부대에서는 일찍부터 부대정치교육의 하나로 소고운동을 창조적으로 진행해왔다. 소고운동이란 모든 전사들로 하여금 누구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우는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하는것이다. 전사들은 지주, 자산계급의 압박을 받아온 아픈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광범한 피압박자인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공산당을 따라 압박자들인 지주, 자산계급을 대변하는 장개석 반동집단을 때려부셔야 한다고 인식하게 되였던것이다.

동북인민해방군 장병들이 소고운동을 하는 장면

대정돈, 집중훈련 단계에 들어서서 동북야전군 각 부대의 소고운동과 함께 《계급성분을 검사하고 사업을 검사하며 투지를 검사한다》는 세가지 검사운동도 적극 진행하여 부대전사들의 인식을 높이고 계급의식을 한층 제고함으로써 전반 부대의 사기와 투지를 한껏 고조시켰다.

림표는 우리 부대는 드높은 혁명군인의 특질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늘 이렇게 강조하였다. 《우리는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부대에 참가한것이 아니라 인민의 해방을 위해 총을 들었다. 때문에 우리가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우리의 생명은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수억의 생명과 그들의 후대들이 우리를 수요하고있다. 우리의 생명에 비해 이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투쟁은 적극적이여야 한다. 우리는 상급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할뿐만아니라 상급의 명령이 없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꼭 해야 한다.》

이와 같이 개인의 생명을 바다에 던진 한알의 좁쌀로 생각하였기때문에 동북야전군의 수많은 전사들이 인민의 해방을 위해 스스럼없이 생명을 바칠수 있었다. 이러한 수많은 영웅과 렬사들이 있었기때문에 동북야전군은 무적의 강철대오로 성장할수 있었던것이다.

동기공세가 끝난 후 개원해방전투를 마친 동북야전군 10종대는 개원부근에서 휴식정돈을 진행하였으며 대량의 병력을 보충받았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동북의 광범한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했기때문에 신세를 고친 한족농민들도 대량 공산당부대에 입대하였고 또 국민당군 포로들도 교육을 거쳐 해방군에 재입대하였다.

10종대 28사 83퇀 3영은 오상의 조선족청년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많은 전사들이 희생되였기에 이 시기 많은 한족전사들을 받아들여 민족혼합부대로 되였다. 3영 8련 지도원 김교진이 남긴 자료를 보면 8련 130여명 전사들 가운데 조선족이 70여명이고 한족전사가 50여명이였다. 부대초창기부터 있었던 조선족전사들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전공이 컸을뿐만아니라 당원간부도 많았다. 이들은 늘 모범적역할을 발휘하면서 기타 전사들을 이끌어주었다.

상급의 지시에 따라 10종대 각 부대는 개원부근에서 집중훈련을 진행했다. 훈련에 사용할 폭약이 너무 적기때문에 83퇀 3영에서는 일본군이 남긴 폭탄을 해체해 화약을 꺼내 쓰기로 했다. 3월말의 어느날 3영 8련 전사들은 영지휘부가 있는 큰 집뜨락에서 훈련을 책임진 부영장의 인솔하에 일본군의 폭탄을 해체하고있었다. 일본인공장에서 기계를 다룬적이 있는 8련 지달만반장은 숙련된 솜씨로 폭탄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잘 모르는 최성걸을 비롯한 반의 꼬마전사들에게 자상히 설명을 해주면서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달만반장이 시키는대로 큰 폭탄을 해체하던 한 전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폭탄에서 소리가 납니다!》

지달만은 냉큼 달려가 심각한 표정으로 폭탄에 귀를 대고 들었다. 폭탄에서는 시계바늘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피해, 시한폭탄이다!》

지달만은 큰소리로 전사들을 피하게 하고나서 나무물통보다 더 굵은, 200근에 달하는 폭탄을 들어올렸다. 시간작동통제기가 풀렸기때문에 폭탄은 수시로 폭발할수 있었던것이다.

지달만은 신속히 주변을 살폈다. 뜨락의 낮은 단층집에서는 련장이상 간부들이 회의를 하고있었고 마당에는 이미 해체한 폭탄에서 털어낸 50여킬로그람의 화약이 쌓여있었다. 사태는 아주 위험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달만의 눈길은 마당동쪽의 방아간에 닿았다. 그는 육중한 폭탄을 안고 한걸음한걸음 방아간쪽으로 걸어갔다. 방아간의 뒤쪽은 깊은 물도랑이니 창문으로 폭탄을 내던지면 될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평소에 지달만반장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던 전사 최성걸이 급히 달려와 함께 폭탄을 들려고 했다.

《저리 비켜! 빨리!》

지달만이 벼락같이 호통치자 최성걸은 제자리에 멈춰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속만 태웠다. 지달만은 길게 숨을 들이쉬고나서 폭탄을 들고 계속 방아간으로 달려갔다. 한걸음 멀어질수록 간부와 전사들이 그만큼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재우쳤다. 최성걸과 기타 전사들은 숨을 죽이고 눈물이 글썽해서 지달만반장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빨리!빨리!》하고 소리쳤다.

방아간 문어구에 거의 당도할무렵 비틀거리는 지달만반장을 본 8련 전사 렴홍기와 다른 한 전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지달만을 도우려 했다. 바로 이때 《꽝~》하는 굉음과 함께 시한폭탄이 끝내 폭발하고야말았다. 방아간에 이어진 몇채의 빈 단층집이 삽시에 연기속에 묻혀버렸다. 최성걸은 미친듯이 연기속을 달려가면서 울음섞인 소리로 지달만반장을 불렀다.

회의도중 달려나온 김교진지도원도 파편에 부상을 입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페허속을 달려갔다.그의 눈앞에는 술을 잘 마시고 싸움에 능한 힘장사 지달만반장이 어른거렸다. 일제통치하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지달만은 홀몸으로 중국 동북에 와서 철도공사, 목재판, 일본인 공장들을 다니며 많은 일을 하였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지게 생겼고 일솜씨가 재고 행동이 민첩하였다.

그에게는 두가지 별명이 붙어다녔다. 하나는 힘이 세고 민첩하다는 뜻에서 《오토바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술이라면 서슬이라도 마실 애주가라는 뜻에서 《얼량(二两)》이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 1946년 5월에 그는 흑룡강성 할빈시 삼과수에서 팔로군 359려 5퇀 3영 8련에 입대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속에서 성장해 10종대 28사 83퇀의 3영 8련으로 되였던것이다. 로련하고 용감한 그는 전투에서도 침착하게 잘 싸웠다. 심양부근 무순시 장당역의 백룡산에서 싸울 때 그는 퍼런 연기를 토하는 적의 수류탄을 주어들고 다시 적진에 뿌리는 용감성과 침착성을 보여주었으며 솔선적으로 적의 화구를 폭파함으로써 공격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리승호, 강진모, 원영기와 더불어 《백룡산의 4용사》로 불리우기도 했다.

김교진지도원은 가장 우수한 반장을 잃은 슬픔과 훌륭한 전우를 잃은 아픔에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지달만반장이 술을 마시는것을 볼 때마다 술을 몰수하면서 승리의 그날 마음껏 술을 마시자고 했던 약속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았다.  지달만반장은 생사를 가리는 관건적인 시각에 추호의 주저도 없이 생의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죽음과 위험을 선택함으로써 소중한 생명을 바쳤던것이다.

사후 83퇀 3영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열고 지달만동지의 고상한 성품을 따라 배울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동북인민해방군 총부에서는 그에게 전투영웅칭호를 추수하였다.

인민해방군 10종대 28사 83퇀 3ㅇ영 8련 지도원 김교진이 남긴 자료

김교진은 8련 전사들의 상황을 자상히 기록해놓고있었다. 지달만렬사의 사적도 비교적 자상히 서술되였다.

대호산-흑산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8련 김교진지도원

지달만의 영웅적사적은 집중훈련에 투입된 아군장병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장병들은 소고운동과 세가지 검사를 통해 계급적각성을 높였고 조선족전사들과 한족전사들 사이에는 계급적정감을 토대로 한 두터운 우애관계가 형성되였다. 집중훈련에서 10종대 28사 83퇀 3영 8련 당지부는 모범당지부로 평의되였다. 그리고 8련 장병들은 사격, 투탄, 폭파 등 여러가지 훈련과목에서 모두 우수한 성적을 따냄으로써 28사 사단부로부터 우수한 전투집단으로 표창받았다.

10종대 8련과 같이 동북야전군 각 부대의 조선족장병들은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집중훈련을 마쳤고 드높은 기세로 새로운 전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중앙인민방송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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