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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5)—동북대반격의 승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8 10:02:18 ] 클릭: [ ]

동북인민해방군주력이 사평을 포위, 공격하고있을 때 동북국민당군 총사령인 위립황은 급급히 길림시의 국민당 60군을 장춘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춘과 길림의 국민당군을 한데 집중해 장춘이라는 이 큰 도시를 끝까지 수비하려는 타산이였다.

동북국민당군 부총사령인 정동국도 상황판단을 하고 언녕부터 길림시의 국민당 60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하지만 길림시주변의 동북인민해방군 여러 독립사단이 60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있었기때문에 60군은 철수도중 동북인민해방군 독립사단의 견제를 받을뿐만아니라 어디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동북인민해방군 주력의 포위, 공격을 받아 장춘에 도착하기전에 전부 소멸될 위험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정동국과 국민당 60군의 군장인 증택생(曾泽生)은 줄곧 철수행동을 취하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1948년 3월에 이르러 동북인민해방군 주력이 전부 사평부근에 포진했고 장춘과 길림사이에는 몇개 독립사단밖에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증택생은 60군 주력을 이끌고 장춘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상급에서는 철수하기전에 풍만저수지 언제를 폭파할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증택생은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를 고려해 이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는 60군의 주력을 앞세워 오늘의 장길고속도로 량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적의 움직임을 파악한 동북인민해방군 길림군구에서는 대부분 주력이 사평해방전투에 투입된 현실을 고려해 길림에서 철수하는 60군에 대한 집중공격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력량을 집중해 적의 약한 고리를 공격함으로써 적을 타격하도록 했다.

명령을 받은 장춘—길림부근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사들은 국민당군이 지날수 있는 교통요도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미리 매복해있었다. 고점자—전오가자 전투에서 수많은 피를 흘렸던 독립 6사는 새로운 전사들을 보충받은후 재차 전투에 투입되였다. 6사 장병들은 모두가 원쑤를 갚을 마음으로 공격명령을 기다렸다.

독립 6사 17퇀 3영 7련에 있었던 김병욱로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3월 8일날 그놈들이 나왔는데 그전에 우린 적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16퇀은 태평툰, 우리는 양대교산에 올라가 매복했습니다. 산에 올랐는데 놈들의 행군대렬이 나타났고 또 공격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태평정거소에서 적의 후방부대가 오는걸 툭 잘라가지고 싸웠습니다. 싸움이 붙으니 신호탄이 하늘에 올라가 터지고 우리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길로 막 내달리는 판이지요. 놈들은 사기가 아주 없었는데 우리패에서만 2백 수십명을 잡았습니다. 마지막에 동네 김치굴에 숨은 놈들을 발견하고 수류탄을 던졌는데 죽지 않은 놈들은 모두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때 우리 적을 얼마나 잡았는지… 많이 잡았습니다. 몇천명이 될겁니다. 그래서 오가자전투에서의 복수를 했지요. 그리고 장춘 따라 들어갔습니다.》

독립6사 17퇀 김병욱로인.

전투영웅 유태준.

전투영웅 한철혁의 사적.

1948년 3월 10일, 독립 6사 16퇀은 태평촌이북 약 500메터 떨어진 야산에 매복하고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군 기계화부대와 주력이 지나간후 후속부대가 매복권에 들어서자 일제히 공격했다. 3영 9련 1패의 조선족 반장인 유태준은 맹호마냥 적진에 돌입했다. 그는 반의 전사들을 이끌고 적 230여명을 생포하고 보총 170자루와 대량의 물품을 실은 마차 18대를 로획하였다. 9련이 신속히 적진을 돌파하자 8련과 10련도 뒤질세라 추격해 많은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한편 17퇀은 길림시 서부 약 100킬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매복해있었다. 전사들은 눈을 쥐어 입에 넣고 미숫가루를 곁들여 먹으며 허기를 달래면서 종일 매복해있었다. 3월 10일 오전 크고작은 보따리를 든 가족까지 섞여 뒤범벅이 된 적군 대오가 나타났다. 공격명령을 기다리던 17퇀 전사들은 일제히 뛰쳐나와 공격했다. 삽시에 요란한 총소리와 비명소리, 말 울음소리로 골짜기가 진동했다.

전사들은 적이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적 군관이 있는쪽으로 돌격했다. 3영 7련 반장인 한철혁은 산언덕의 한 초가로 달려가는 적군을 추격했다. 몇몇 장교의 인솔하에 초가집을 거점으로 대항해보려던 국민당군은 한철혁의 정확한 사격에 몇놈 쓰러지자 겁을 먹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한철혁 반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언덕에 위치한 초가집에서 적을 사격했다. 그들은 높은 위치에서 적의 거동을 한눈에 살필수 있었기때문에 얼마 안되여 대항하려는 적을 대부분 소멸하였다.

전투에서 한철혁반장과 전사들은 많은 적을 쓰러뜨리고 100여명을 생포하였다. 전의를 잃고 이곳저곳 도주하기에 급급한 놈들을 보자 전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들은 사처에서 놈들을 생포하느라 땀벌창이 되였다. 기민한 한철혁은 60미리포를 메고 풀숲으로 도주하는 적을 발견하고 쫓아갔다. 그는 정확한 사격으로 머리를 내민 그놈을 쏘아 눕히고 60미리포를 로획했다. 생포한 적과 로획한 무기를 후속부대에 넘겨준후 한철혁은 삼가툰(三家屯)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돌진했다.

한무리 적군이 군관을 따라 삼가툰마을 초가집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받았던것이다. 한철혁반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마을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소리질렀다. 사면초가에 빠진 놈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문밖으로 총을 내던지며 하나하나 걸어나왔다. 그리하여 한철혁과 전사들은 이곳에서만 무려 200여명의 적을 생포했는데 그가운데는 국민당군 소장 한명도 포함되였다.

급급히 도주하던 국민당 60군 주력은 후속부대가 아군부대의 공격을 받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아군 주력부대의 포위, 공격이 두려워 후속부대를 지원할 엄두를 못내였다. 놈들은 주력만 보존하고 장춘으로 무사히 철수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급급히 장춘으로 도주해버렸다.

장춘과 길림부근의 양대교, 태평촌, 차로하 등지에서 독립 6사를 비롯한 아군 장병들은 철수하는 국민당군을 습격해 900여명을 살상하고 4,000여명을 생포함으로써 국민당군 5,000여명을 소멸했다. 뿐만 아니라 대량의 선진적인 무기를 로획해 자신을 무장시켰다. 전투후 적의 소장을 포함해 대량의 적을 생포하고 많은 전리품을 로획한 한철혁반장과 유태준반장은 모두 사단부로부터 대공 1차를 받았다.

사평과 길림시가 해방됨에 따라 성세호대했던 동북인민해방군의 동기공세도 승리적으로 끝났다. 1947년부터 1948년 봄까지 전략적 대반격에 들어간 수십만 동북인민해방군은 하기, 추기, 동기공세를 펼쳐 동북대지를 휩쓸며 국민당군 40만명을 소멸하고 77개 크고작은 도시를 수복했다. 그리하여 해방구의 인구는 동북총인구수의 86%를 차지하고 면적은 동북총면적의 97%를 차지하게 되였다.

반면 국민당군은 두률명, 진성, 위립황에 이르기까지 동북의 통수를 세차나 바꾸었지만 불리한 상황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동북인민해방군의 련속되는 타격을 받은 국민당군은 장춘, 심양, 금주 세 도시에 갇혀 하늘만 쳐다볼뿐이였다. 동북에서의 중국공산당부대는 드디여 전략적 대결전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1946년하반기부터 국민당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막아내면서부터 전략적 대결전을 맞이해 1948년에 이르기까지 동북의 조선족열혈남아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두려움 없이 싸워왔다. 그들은 해방받은 기쁨을 안고 자기의 토지를 지켜싸웠고 토비숙청을 적극 진행하였다. 연변의 자제병들로 무어진 길림군구 독립 3퇀과 독립 6퇀은 길림, 장춘지역으로 출격해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에 배합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은 402고지 전투, 이도하자와 팔리포 습격전, 룡담산전투 등 크고작은 전투를 거쳐 신속히 성장했으며 독립 6사 16퇀, 17퇀으로 재편성되였다. 조선족장병이 3분 2를 차지하는 독립 6사는 고점자—전오가자에서의 피어린 혈전을 치렀고 또 도주하는 국민당 60군을 크게 격파한 양대교—태평촌전투를 치렀으며 드디여 형제부대들과 함께 장춘시를 물샐틈 없이 포위했다.

림강보위전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거쳐온 길남군분구의 조선족부대 72퇀은 퇀장 양상곤과 부퇀장 송무선의 지휘밑에 화전해방전투, 춘등하습격전을 치렀으며 드디여 장춘부근에 당도해 새로 편성된 조선족사단인 독립 11사에 규합되였으며 장춘포위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리홍광지대는 남만에서 활동하면서 간고한 림강보위전을 이겨냈으며 휘남해방전투후 주력부대와 함께 료서지역작전에 참가해 공주툰전투, 개원해방전투, 장춘포위전에서 활약을 보였다.

새로 편성된 동북민주련군 10종대에도 수천명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덕혜해방전투, 백룡산전투, 황화산전투, 개원해방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리고 3종대의 조선족장병들과 1종대의 조선족장병들도 두려움 없이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야전부대이건 지방 독립부대이건 막론하고 동북인민해방군의 6만여명 조선족장병들은 크고작은 전투에서 희생적으로 두려움없이 싸워 많은 승리를 이룩해냈고 또 많은 전투영웅들이 나타났다.

 

길남군분구 72퇀 부퇀장 송무선.

10종대 30사 렬사 김성룡묘소(치치할).

사평성곽에 첫 붉은기를 흔들었던 1종대 조선족 전투영웅 김동원, 법고전투의 전투영웅 1종대 강창록, 황화산의 불사조 10종대의 김수억, 김성룡, 휘남해방전투에서 목숨으로 적의 화구를 폭파한 리홍광지대의 지뢰수 조성두……이들은 모두 전략적 반격단계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 전투영웅이며 승리를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조선족장병들의 모범인물이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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