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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4)—사평해방의 전투영웅 김동원렬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5 22:14:11 ] 클릭: [ ]

1948년에 이르러 수억 중국인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국혁명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평화를 주장하면서 광범한 로농대중의 리익을 대변하고 민주주의 련합정부를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과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국민당간의 격전은 근 2년간 지속되였다.

국민당군의 전면공격과 중점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공산당부대는 이 시기에 와서 전반적인 대반격 단계에 들어갔다. 특히 동북에서의 국민당군은 심양, 장춘을 비롯한 몇개 대도시에만 둥지를 틀고있는 상황이였기에 동북해방은 거의 결정적이였다.

승리에서 더욱 큰 승리를 이룩하기 위해, 그리고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독재통치하에 있는 전국 광범한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중앙에서는 부대를 인민해방군으로 통칭하기로 정식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48년 1월 1일부터 동북의 원 민주련군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고 민주련군 총부를 동북군구 겸 동북야전군 지도기구로 개칭했다. 림표가 동북군구와 동북야전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직무를 맡았다.

당시 동북군구 산하에는 료동군구, 기찰열료군구, 길림군구, 송강군구, 합강군구, 목단강군구, 룡강군구, 료길군구, 눈강군구를 두었는데 총 31만 병력을 확보하고있었다. 그리고 동북야전군 산하에는 1종대, 2종대, 3종대, 4종대, 6종대, 7종대, 8종대, 9종대, 10종대 도합 9개 종대에 10개 독립사를 확보하고있었는데 병력은 42만여명에 달했다.

동기공세의 막바지에 이르러 동북야전군 사령부에서는 다시 눈길을 사평에 돌렸다. 제2차사평전투의 혈전과 제3차사평공격전의 실패의 상처가 지금도 지휘원들의 가슴에 맺혀져있었던것이다. 사령부에서는 네번째 사평전투를 진행함으로써 사평을 공점하고 장춘과 심양간의 국민당군의 련계를 철저리 차단하고 각기 고립시킬 결심을 내렸다.

1948년 2월 27일, 제4차 사평전투를 위한 작전명령이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에 하달되였다. 명령에 따라 1종대와 3종대, 7종대 그리고 사령부 포병부대 주력이 사평공격의 주력부대로 나섰다. 공격전은 1종대 사령원 리천우(李天佑)와 정치위원 만의(万毅)가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로 하였다. 사령부의 포치에 따라 2종대, 6종대, 8종대, 10종대는 창도, 개원부근에서 적지원군을 막기로 하였다. 조선족장병들이 많은 10종대는 계속 개원부근에 포진했고 리홍광지대는 철령동남부에서 활동했으며 독립6사는 기타 부대들과 함께 길림과 장춘지역의 적을 견제하고있었다.

1만 9,000여명 병력을 가지고있는 사평의 국민당수비군은 북산을 등지고 주변에 크고작은 보루를 쌓았다. 놈들은 괴뢰만주국시기에 축조된 영구성, 반영구성 방어공사를 토대로 견고한 건물마다 방어시설을 구축했으며 거리마다 수많은 화점을 배치해놓았다.

주공임무를 맡은 1종대, 3종대, 7종대 장병들은 다투어 상급에 결심발표를 하고 혈서를 쓰면서 사평을 해방할 굳은 신념을 다졌다. 조선족장병들도 뒤질세라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려 했다. 3종대 포병부대의 많은 조선족장병들은 비록 보병들처럼 폭약을 들고 전진에 돌입할수 없지만 정확한 포사격으로 적진을 헤치고 아군의 공격로선을 개척할 결의를 다졌다.

1종대 2사의 조선족 반장 김동원은 주공임무를 줄것을 상급에 요구하면서 당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꼭 임무를 완수할것이라고 표했다. 1948년 3월 12일 6시 30분, 사평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동북인민해방군 포병주력의 70%를 차지하는 포병부대가 포격을 가했다. 사평성곽주변은 포연이 자욱했고 아군의 앞길에 놓인 철조망이 포격에 찢어지고 매설해놓은 지뢰들이 폭파되였으며 적의 크고작은 보루들이 하나하나 제거되였다.

이어 적의 포병진지와 장갑차진지에 포탄이 날아가 터졌고 성벽도 포격에 허물어져내리기 시작했다. 7시 50분, 주공방향의 각 부대 포병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사격은 아주 맹렬했을뿐만 아니라 또 아주 정확했기때문에 민가에 대한 파괴는 거의 없었다.

1종대 포병으로 있었던 김주필로인은 사평전투에서 우리 군 포병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우리 거기 가서 어떻게 되였는가면 아무래 한 5리 두어두고 포를 걸었을것입니다. 눈으로 짐작해서 포를 걸어놓고 쐈는데 그러다가 아군이 시내 전투로 쑥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또 포 한문을 끌고 시내전에 들어갔습니다. 갸(적)들이 집중해있는데 가서 포를 쏴서 점령했습니다…120미리포는 일곱명이 쏘는데 탄알수가 세명이나 됩니다. 그 포를 말이 끌고 사람이 밀고 해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카브돌이가 많고 적의 화력이 세기때문에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말이 끌지 못하고 우리 여덟이 인력으로 밀고들어갔습니다. 쇠바퀴니깐 소리 난다구 거기에(바퀴에) 다이야를 달고 들어갔습니다. 50메터 들어가서 모래주머니를 가져다 포를 고정시키고 사격했습니다. 직사포를 쐈지요. 한 여덟발을 쐈는가? 쏘니까 야들이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위력이 대단합니다. 포탄이 80근 됩니다. 아주 치렬했습니다…제가 겪은 전투가운데서 아마 사평전투가 제일 치렬했습니다…》

8분뒤, 보병의 공격이 시작되였다. 주공임무를 맡은 1종대 2사 4퇀 1영 2련의 1반 반장 김동원은 적성벽과 가까운 엄페호에 숨어있다가 전반 전사들을 이끌고 신속히 돌진해나갔다. 그는 적의 비발치는 탄우속을 뚫고 10메터에 달하는 장애물을 뛰여넘어 성벽에 닿았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포격에 맞은 성벽의 허물어진곳을 찾아 성곽으로 뛰여올라가 붉은기를 흔들었다. 2련 전사들은 김동원이 헤친 길을 따라 성벽을 넘어 곧 성내로 돌진해들어갔다. 보병이 공격해서 김동원이 붉은기를 성곽에 꽂을 때까지 7분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평성에 첫 붉은기가 휘날리자 수만 장병들이 큰 고무를 받았다. 아군은 일제히 나팔을 울리며 돌진했으며 전사들은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사평성내로 돌진했다.

1종대 포병 김주필 로인(화룡).

동북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포진지.

허물어진 성벽을 넘어 공격하는 장병들.

포를 밀고들어가며 싸우는 포병전사들.

1종대 정찰병이였던 박봉룡로인은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와~’ 하는 소리가 귀가 터질지경이였습니다. 수십만명이 일제히 소리 지르니, 그 소리에 적은 혼비백산하였고 아군의 기세는 더욱 충천했습니다…》

1종대주력이 북쪽에서 사평을 공격 때 3종대 주력도 동남방향으로 공격했다. 3종대 7사와 8사는 공격도중 측면으로부터 은페된 적화점의 사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냈다. 비교적 완벽한 적지하방어시설이 아군의 공격을 막아나섰던것이다. 지휘원들은 할수 없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적의 화력을 다시 정찰한 뒤 계속 공격했다.

3종대포병부대에는 많은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부동한 정도로 모두 문화수준을 갖춘 조선족장병들은 전투전부터 만단의 준비를 하였다. 도시를 공격하고 거리와 골목을 다니며 적의 화점이나 보루, 견고한 건물의 거점을 파괴하려면 포를 더욱 령활하게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무겁고 육중한 대포를 어떻게 령활하게 끌고다닐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섰다.

3종대 9사 산포영의 부패장 신분으로 사평전투에 참가했던 권상준로인은 당시 산포에 바퀴를 달아 시가지 전투에 끌고 들어가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포가 생긴 모양을 그림까지 그리면서 설명했다.

《대포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작할적게 포의 중심을, 중량의 3분의 2를 뒤에 오도록 했지요. 그리고 포수가 여섯이였는데 일반적으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야 했습니다. 무거워 곤난이 많았지요. 야전이 아니고 성시전투이기때문에 말로 끌고서 달리기는 정 곤난하지요. 당시 사에서는 ‘세 장인이 모이면 제갈량도 못 당한다’는 구호를 제기하면서 모두 함께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것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포병은 성시전투에서 어떻게 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것인가를 연구했고 보병도 폭약을 가지고 적보루를 어떻게 폭파할것인가를 연구했습니다. 포병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성시전투에서 포를 말로 끌고다니면 사격할 때 불편할뿐만 아니라 목표가 너무 큰것이였습니다. 인력으로 끌자면 무거워 허리도 못펴고 그랬습니다.

저는 매일 이 문제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적에게서 로획한 류탄포 네문이 있어 전포련을 조직할수 있었습니다. 패장은 〈로팔로〉였는데 포를 다룰줄 몰랐기에 부패장인 내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야했습니다. 그래서 포를 관찰하던중 나는 포를 자동차에 거는 쇠고리를 개조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쇠고리는 평소에 아무 쓸모도 없기에 그것을 360도로 돌수 있는 작은 바퀴로 만들어볼 생각이였습니다. 바퀴를 하나 더 달면 포를 욺직이기 쉽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사들과 함께 먼저 나무로 바퀴를 만들었지요. 그러니 허리도 펼수 있었고 포를 360도 자유롭게 돌릴수 있어 사격목표를 찾기도 쉬웠습니다.

후에는 고무바퀴로 바꾸니 더욱 좋아 전사 둘이면 포를 밀고다니며 사격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사평전투때 우리는 그냥 인력으로 포를 밀고 들어가 싸웠습니다. 보병이 화력지원을 요구하면 곧 달려가서 포를 쏘았습니다. 많은 적의 화점을 제거하면서 시중심까지 들어가 끝내 사평을 해방했지요. 우리가 포를 밀고 들어오니까 보병들이 보고 모두 깜짝 놀라는것이였습니다.》

3종대 9사의 포병부대는 포를 밀고 사평시내로 들어가면서 보병부대가 좌절을 받으면 곧바로 포사격으로 길을 열어주곤 하였다. 그리하여 공격부대는 드디어 시 중심부로 공격해 들어갈수 있었다.

한편 오전 9시 15분쯤 되여 서남방향으로 공격하던 7종대도 돌파구를 헤치고 만주은행, 료북은행을 비롯한 적거점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적의 체계적인 방어는 헤쳐졌으며 남은 적은 사평동부로 철수하였다.

철길을 따라 돌진하던 1종대 김동원과 2련 전사들은 적방어선에 막혔다. 철길옆에 쌓은 작은 보루의 검은 구멍에서 경기관총 사격이 퍼붓고있었던것이다. 앞에서 달리던 몇몇 전사들이 쓰러지고 기타 전사들도 땅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하고있었다.

성급한 김동원은 몸을 뒹굴어 적의 정면을 피한후 신속히 우회해 적보루옆에 몸을 붙였다. 그는 불을 토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적경기관총대를 꽉 움켜쥐고 화구로부터 와락 나꾸어챘다. 뜻하지 않게 기관총을 빼앗긴 놈들은 어쩔바를 몰랐고 기관총을 들고 보루에 돌입한 김동원앞에 모두 손을 들고 투항하였다.

가장 일찍 성벽을 돌파하고 철길을 따라 돌진하던 김동원전투소조는 이번에는 적의 방어가 가장 견고한 철도구름다리에 부딛쳤다. 이곳은 사평시중심부에 위치한 중요한 교통요도이고 거점이였다. 7메터 높이의 다리우에서는 중산(中山)대로와 공영(共荣)대로를 한눈에 굽어볼수 있었고 남북으로는 시중심으로 통하는 철도와 기차역을 통제할수 있었다. 놈들은 다리에 두층으로 된 견고한 보루를 만들어놓고 다리주변에는 크고작은 보루를 설치했으며 철조망까지 쳐놓았다.

아군은 오후 2시 15분에 구름다리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하였지만 수많은 희생만 냈을뿐이였다. 십여명 적을 추격하던 김동원반장과 세명 전사가 철도구름다리에 도착했을 때 도주하던 놈들은 구름다리서북쪽의 보루로 도주하려 했다.김동원은 신속히 따라서면서 도주하던 놈들과 함께 보루에 들어갔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보루의 7,8명 적병을 쓰러눕히고 놈들의 기관총으로 사격하기 시작했다.

구름다리서북부의 보루를 잃게 되면 전반 구름다리 방어체계가 붕괴되기때문에 놈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김동원과 전사들은 적의 돌격을 9차나 물리쳤다. 크게 작게 모두 부상당한 그들의 솜옷은 피로 얼룩졌지만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김동원 반장은 《자, 우리 마음을 합쳐 한사코 이곳을 지켜냅시다. 뒤에 대부대가 곧 도착할것이니 놈들은 얼마 버티지 못할것입니다!》라고 전사들을 고무해주었다.

김동원이 전사들과 함께 이를 악물고 계속 적을 사격하고있을 때 수류탄 하나가 곁에서 터져 그는 장렬히 희생되고말았다. 김동원이 희생된후 기타 전사들은 대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싸웠다. 김동원과 3명 전사는 아군의 공격을 위해 20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절약했던것이다. 그리하여 공격부대가 도착한후 전사들은 철길을 따라 공격해들어가 철도구름다리 방어체계를 쉽게 제거할수 있었다.

3월 13일 새벽에 이르러 동북인민해방군 1종대와 3종대 장병들은 화력을 집중해 적의 마지막 거점인 대백루(大白楼)를 공점함으로써 23시간만에 사평을 전부 해방했다.  사평전투가 끝난후 1종대 정치부에서는 김동원을 특등전투영웅으로 추인하고 모택동메달을 수여했다.

사평렬사기념관의 김동원 렬사소개글.

사평시 상징적인 조각상(김동원렬사의 모습 왼쪽).

사평렬사기념탑.

1925년 조선 회령에서 태여난 전투영웅 김동원은 10살때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와서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일제의 가혹한 통치하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그는 광복을 맞는 해에 민주련군을 찾아가 목단강군구 제4퇀에 입대하였다.

목단강지역 토비숙청에서 전공을 세운 김동원은 1947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또 반장으로 되였다. 이해 동북민주련군의 하기공세가 끝난후 그는 가장 먼저 탄원해 주력부대인 1종대 2사 4퇀에 편입되였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4퇀 1영 2련 1반 반장으로 있었다.

사평해방전투에서 김동원은 가장 먼저 사평성곽에 붉은기를 꽂고 적의 화점을 여러개 까부시며 아군의 공격에 큰 기여를 했으며 사평해방에 청춘을 바쳤다.

사평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 조선족전투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사평시박물관에서는 전우들의 회억에 따라 김동원렬사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의 형상에 따라 사평해방영웅동상을 만들어 세웠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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