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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3)—개원해방전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5 12:14:13 ] 클릭: [ ]

1948년 2월, 공주툰대첩이 있은후 료서지역에 집결된 동북인민해방군주력과 국민당군주력간의 공방전은 계속 진행되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은 심양남부의 허점을 노리고 신속히 남진해 료양과 안산을 공점했고 3종대, 10종대, 1종대 3사는 석불사(石佛寺)부근에서 국민당군주력을 견제하면서 싸웠다.

아군이 료양, 안산으로 공격하자 국민당군은 급급히 신3군과 신6군을 남부로 파견하려 했다. 석불사부근에 대기하고있던 동북인민해방군은 3종대를 우익으로, 10종대를 좌익으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적을 견제하였다. 10종대는 길을 열기 위해 거듭 공격해오는 국민당군을 수차 막아내면서 적군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있었다. 한편 3종대는 기회를 보아 신속히 심양부근의 로변대(老边台)를 공격하였다.

전투가 국민당군 동북본거지인 심양부근에서까지 벌어지자 놈들은 더욱 당황하였다. 신3군과 신6군은 로변대를 지원하기 위해 발악적으로 공격해나왔지만 석불사부근에서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29사와 30사의 저지를 받았다.

29사 85퇀 장병들은 강대한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해오는 국민당군의 공격을 세차나 물리쳤고 30사 88퇀 장병들은 수류탄묶음과 폭약으로 적의 장갑차 두대를 까부시면서 국민당군의 공격을 다섯차나 막아냈다.

영웅적인 10종대 장병들이 막강한 국민당군의 공격을 거듭 물리치고있을 때 3종대 장병들도 과감한 공격을 가해 로변대부근의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심양부근의 크고작은 적 거점들이 하나하나 제거됨에 따라 법고를 수비하던 국민당군 림시 편성한 62사는 고립된 법고를 수비할수 없음을 간파하고 개원쪽으로 도주하려 했다.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량흥초 사령원은 법고의 적이 도주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머리를 돌려 도주하는 적을 추격, 소멸할것을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10종대 29사는 명령에 따라 전력으로 적을 추격하다가 통강구부근에서 적후미를 따라잡아 500여명 적을 포로했다. 그리고 28사는 대방신(大房身)의 적진을 돌파하고 적을 소멸했으며 30사도 경운보(庆云堡)의 적을 소멸하였다. 이로써 림시 편성한 62사는 대부분 소멸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종대, 1종대 3사, 리홍광지대 등 막대한 병력이 개원서남부에 집결되였다. 1948년 2월 23일, 10종대와 3종대 9사가 명령에 따라 개원을 해방하고 기타 각 부대는 개원남부에서 적의 지원군을 저지하기로 했다.

료서지역 주요 교통중추 법고.

료서평원의 마을.

무명렬사비.

10종대 장병들이 해방한 개원.

동북의 주요 철도간선인 중장철도한가운데 위치한 개원은 심양과 사평, 장춘, 서풍을 련계하는 중요한 중추이다. 때문에 개원을 해방하면 국민당군의 남북련계가 끊어져 중장철도 연선 국민당군 거점들이 더욱 고립되게 된다. 당시 개원에는 국민당 53군 림시편제로 된 30사 사부와 보안퇀, 토벌대 그리고 법고에서 도주해온 림시 편제로 된 62사 잔여부대까지 합쳐 3,400여명 병력이 있었다. 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개원 수비사령을 맡은 려위적퇀장은 7,000여명 민부들을 붙잡아다가 도시와 도시주변에 방어시설을 구축해놓았다.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는 명령에 따라 각자 위치로 출격하였다. 대량의 조선족장병들을 포함한 10종대 각 사는 개원부근의 적 거점을 제거하였고 리홍광지대를 포함한 기타 부대는 철령의 대범하동부에 매복했다. 리홍광지대는 기타 사단과 함께 철령으로부터 오는 국민당군을 막거나 개원의 적이 철령으로 도주하는것을 막는것이였다.

공격임무를 맡은 10종대 각 부대는 서로 선봉이 되겠다고 자진해나섰다. 10종대 30사 89퇀의 련지도원으로 있었던 김응삼로인의 회억에 따르면 원래 89퇀 1영 3련이 선봉임무를 맡았었다.

《89퇀에서 1영이 선봉영이고 영에서 또 우리 3련이 선봉련인데…선봉련이라서 부대의 중시를 받았습니다. 영장이 련장들을 데리고 돌파구를 어디로 정할것인가 지형정찰을 나갔는데 우리 련장이 지뢰를 밟고 다리에 부상입었습니다. 이러다나니 그만 못했습니다. 선봉영은 다 철수하고 2영이 그걸 맡았습니다. 그 부대가 한족영이였습니다. 우리퇀은 전체 조선부대였는데 후에 한개영의 한족부대가 우리 퇀에 왔습니다.》

개원전투는 외곽의 적수비거점을 제거하는데로부터 시작되였다. 1948년 2월 25일, 10종대 30사 90퇀은 형제부대의 드센 포화의 엄호를 받으면서 개원외곽의 방직공장을 공격해 적 한개 련을 소멸하고 90여명을 생포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기타 외곽의 거점을 제거함으로써 총공격의 길을 열어놓았다.

1948년 2월 27일 오후 4시,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주공임무를 맡은 각 부대는 눈길을 헤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아군의 포격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때는 우리 군에도 비교적 훌륭한 대포와 사수들이 있었다. 정확한 포격은 적의 화점을 하나하나 짓부셨고 이에 고무된 전사들은 더욱 용감히 돌진했다. 전사들은 철조망을 끊고 돌격조가 헤친 길을 따가 돌진하였고 사닥다리조가 놓은 사닥다리를 타고 해자를 넘고 성벽에 올라섰다.

치렬한 공격전이 한창일 때 심양으로부터 온 적 비행기 몇대가 날아와 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아군전사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관총 받침대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낮추 비행하는 적기를 향해 맹사격을 가했다. 적의 비행기는 할수 없이 고공으로 도주하였고 맹목적으로 포탄을 던지고는 날아가버렸다.

개원시내에 돌입한후의 전투는 더욱 치렬하였다. 적들은 거리마다 골목마다에 화구를 설치하고 중요한 건물에다 모두 병력을 배치해 한사코 발악하고있었다. 두려움 모르는 전사들은 폭파조를 파견해 적의 화점을 하나하나 까부시고 대포를 끌고와서 주요건물에 구축한 적 방어공사를 폭파해버렸다.

상황이 불리하자 개원 수비사령인 국민당군 려위적퇀장은 1000여명 잔여부대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은 포위를 뚫고 철령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곧바로 추격해오는 아군전사들과 미리 매복해있던 리홍광지대 전사들의 협공을 받아 전부 소멸되였다.

개원해방전투는 날 어둡기전에 승리적으로 끝났다. 아군 전사들은 국민당군 3,000여명을 소멸하고 적퇀장 려적위를 비롯한 군관들을 생포하였다. 개원해방전투는 조선족장병들이 많은 제10종대가 공점한 또 하나의 중요한 현성이였다.

개원해방후 부대는 개원부근에 주둔하면서 한동안 휴식과 군사훈련단계에 들어갔다. 전사들을 거느리고 정치사상동원을 하던 30사 89퇀 1영 3련의 김응삼지도원은 이때 자기를 찾아온 조선족어머니를 만나 오랫만에 고향소식을 알게 되였다.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찍 가출해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던 김응삼지도원은 한고향에서 살던 강재렬의 어머니를 잘 알고있었다. 하북로태농장에서 살던 김응삼네 가정과 강재렬네 가정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김응삼과 강재렬이 모두 집을 떠나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자 강재렬의 어머니는 개원부근에 왔다가 우연하게 조선족장병들이 많은 10종대를 만나게 되여 아들을 찾으려 왔던것이다. 그런데 3종대에 편입된 강재렬은 찾지 못하고 김응삼을 만났던것이다.

(김응삼) 《그때 강재렬의 어머니가 저의 가족소식을 알려주면서 편지라도 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편지를 써주니 전투가 끝난후 형님이 찾아왔더구만요, 부대에서 마차를 보내 전 가족을 싣고 반석으로 보냈다 하더군요. 그래 저도 해방후 부모를 찾아 반석에 갔다가 반석 사람이 되였지요.》

개원해방전투에 참가했던 반석의 김응삼 로인.

하북성 로태에서 혁명에 참가한 강재렬 로인.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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