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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42) 고점자—전오가자 혈전(하편)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14 22:32:49 ] 클릭: [ ]

고점자로 진군하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6사 17퇀은 국민당군 182사 주력의 매복습격을 받아 고전을 치렀다. 17퇀의 주공임무를 맡은 2영 각 련이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있을 때 3영의 각 련도 처절한 전투를 치르고있었다.

련장 박하건의 인솔하에 공격하던 4련은 벌써 10여명의 희생자와 30여명 부상자가 나왔다. 아무것도 가리울것이 없는 눈우에서 적의 공격을 당하는 국면을 돌려세우기 위해 박하건 련장은 돌격조를 보내 마을어구의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게 했다. 명령을 받은 주병진은 10여명 돌격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적에게 접근해 육박전을 치렀다. 그는 뛰여난 총격술로 여덟명 적병을 찔러 넘겼지만 자기도 허벅다리가 찔렸다. 선혈이 바지를 적시고 아픔이 가슴을 찔렀지만 주병진은 이를 악물고 전투를 견지하면서 구석에 숨어있던 적 네놈을 생포하였다. 돌격조가 적진을 점령하자 4련은 화력을 조직해 계속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 싸웠다.

한편 17퇀 선봉에 섰던 3영 7련도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그들은 《3.3제》 전술원칙에 따라 3개 패가 삼각대형을 갖추고 마을로 들어가는 철다리쪽으로 공격했다. 전사들은 탄우속을 헤치며 눈길을 따라 신속히 둔덕에 올라섰고 철교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였다.

17퇀 3영 7련의 반장이였던 김병욱 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김병욱 17퇀 3영 7련 ).

《명령을 받구서 오가자동남쪽으로 작은 철다리밑으로 총창을 비껴들고 들어가는데 1패, 2패는 저쪽으로 먼저 들어가고 3패는 좀 처져 들어가는데 시체가 많았소. 어떻게 적이 알구서 쏴재끼는지. 철뚝에서 오가자까지 500메터 되나마나한데 거기서 조금 더 나오게 되면 지주집 탈곡마당이 있소. 그놈들 탈곡마당에 나와 해재끼는데 적의 기관총이 어떻게 쏘아대는지 우리 동무들 많이 희생되였소.》

철뚝에 올라선후 7련 박지헌(朴智宪) 련장은 신속히 상황을 파악하고 부대를 정비한 다음 전사들을 거느리고 마을어구의 지주집 탈곡장으로 공격했다. 전사들은 탈곡장주변에서 놈들과 육박전을 치르면서 지주집 대문앞까지 다가갔다. 놈들은 신속히 지주집으로 들어가 철대문을 닫아걸고 계속 밖으로 사격하였다. 앞장서 달리던 몇몇 전사들이 쓰러졌고 박지헌련장도 파편에 맞아 두눈을 잃고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전투를 견지하면서 꼭 지주집을 점령해야 한다고 전사들에게 강조했다. 전사들은 명령에 따라 두려움없이 공격하였다. 철가자산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대공 3차나 세웠던 7련의 김윤식부반장은 전사들의 수류탄을 한데 모아 철대문을 폭파하고 남먼저 지주집 뜨락으로 육박했다. 그는 다리에 적탄을 맞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지주집에 숨어 발악하던 놈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하는 아군전사들의 기세에 눌리워 모두 손을 들었는데 그 수가 80여명에 달했다.

김병욱 로인의 증언이다.

(김병욱) 《적들이 밖으로 자꾸 쏘는판이고, 많이 희생되였소. 마지막에 김윤식과 한철혁이 반의 모든 수류탄을 집중해 대문에 던지니 〈꽝~〉하고 문이 터졌고 문이 열리니 거기로 3패가 들어갔는데 거기서 많이 죽었소. 적들이 총집중하는 판이요. 우리는 들어가는 기회를 리용해 적의 곁에서 적이 나오는걸 쏴재끼는 판이구. 내 총알에도 얼마나 맞아죽었는지도 헤아릴수 없소.》

17퇀 3영 7련은 지주집부근에서 100여명 적을 소멸하였다. 하지만 적의 지원병은 더욱 많이 몰려오고있었다. 적의 파편에 맞아 실명한 상황에서도 계속 전투를 지휘하던 박지헌련장은 전세가 불리하자 철수명령을 내렸다.

80여명 포로를 데리고 철수하던중 전투영웅 김윤식이 희생되고 한철혁도 팔에 부상을 입었다.

5반 반장인 김병욱은 적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4반 반장 리백근을 끌고 철수하였다.

(김병욱) 《거기 리백근이라는 동무 있는데 4반 반장이요. 우리 둘이 결의한게 있지요. 〈넌 돈화에서 참가하고 난 연길에서 참가했는데 둘다 반장이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맹세하구서 그다음 결의형제 삼아 맺었소…그렇게 싸우는 판인데 철퇴명령이 내렸소…〈한사람이라도 여기 놓아두면 우리 결의한게 다 수포로 되고 넌 적에게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끌어내야 한다.〉 적들은 우리가 철퇴하는걸 알고 지독하게 쓸어나오지 뭐요. 그걸 모르고 숨이 붙어있으니 살리겠다고 가재걸음으로 끌어냈소. 마지막에 내 손이 말을 안 들었소. 너무 말을 안 들었소. 그래서 백근의 탄띠를 풀어 다리목에 매고 엎디여서 끄는 판인데 울로초신발이란게 눈이 들어가 발도 다 얼고 수갑(장갑)도 어딜 갔는지 없었소. 그렇게 밤새 끌고나오는데 무슨 맥이 있겠소. 철뚝에다 가져다놓으니 벌써 죽었단 말이요. 눈에다 덮어놓고 무덤 하나를 만들어놓으니 날이 훤히 밝는데 총소리가 조용하지 뭐요.》

독립 6사 후위에 섰던 18퇀이 당도하여 17퇀을 엄호하면서 적군을 물리쳤다. 피로 얼룩진 고점자—전오가자 전투는 드디여 끝났다. 수많은 희생을 냈던 이번 조우전에서 독립 6사는 국민당군 1200여명을 소멸했지만 700명에 달하는 희생자와 대량의 부상자가 나타났다. 국민당군이 유리한 지세를 점하고 아군을 매복, 공격한 아주 불리한 전투였지만 두려움 모르는 우리 전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때문에 승리적으로 적을 물리칠수 있었다.

김병욱로인의 증언이다. 《나는 부상은 안 입고 대공을 받았소. 그래 거기서 꼬량밥을 주는데 당연히 먹고프지요. 하나 쥐고 보니까 눈물이 나서 견디겠소? 〈동무들은 다 죽었다. 저녁 같이 다 굶고 나 혼자 살아서 밥을 먹어? 못 먹는다.〉 다시 들어다놓구. 그다음 밖을 내다보니 꺼멓게 누워있는게 다 희생된 동무들이란 말이요.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구만.》

화피창 렬사들을 기리는 길림시실험소학교 사생들.

렬사기념비의 부분적 렬사 명단.

전투시 지주집마당이였던 화피창진 동승소학교.

눈 내리는 화피창 전적지를 다시 답사한 마학범(가운데)과 리종호(오른쪽) 로인.

전우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는 로전사들.

렬사유가족 대표 리옥금(리백근 렬사의 녀동생).

렬사들에게 술을 붓는 로전사들.

2008년 4월 4일, 장춘과 길림지역 조선족군중들의 청명행사를 료해하기 위해 《영원한 기념비》 답사팀은 길림시 창읍구 화피창진에 갔다. 답사팀일행에는 고점자—전오가자 전투를 직접 겪었던 연변 왕청에 계시는 전투영웅 마학범로인과 연길에 계시는 리종호로인도 있었다. 치렬하고 비장하였던 그 전투를 회억하는 사람들의 무거운 심정을 헤아리는듯 이날따라 큰눈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17퇀 전사들이 포위되였던 절당은 지금은 마을 소학교자리로 변했고 지주집은 토성이 없고 평범한 민가로 바뀌여있었다.

전오가자마을에서 우리는 현지의 한족로인 왕희진을 만났다. 88세인 왕희진로인은 전투상황을 직접 목격하였고 전투후 마을사람들과 함께 많은 희생자들을 날랐다고 한다.

《그때 저는 청장년이였으니 전투상황을 알고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였습니다. 마을에 적 한개 영이 와서 싸움이 진행되였는데…마을에서 사람들이 동원해 마파리로 희생자들을 화피창으로 날라갔습니다. 모두가 조선족부대전사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가 직접 보고 들은데 의하면 길림 이 일대를 해방하는 전투는 모두 조선족이 했습니다.》

1948년 2월 16일 고점자—전오가자 전투에서 독립 6사의 530여명 우수한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사단부에서는 현지 정부와 군중들을 동원해 희생자들을 수습해 화피창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4월 15일에 길림성정부와 길림군구에서는 화피창에 렬사릉원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고점자—전오가자의 희생자 530여명에 장춘과 길림부근 기타 전투에서 희생된 희생자 도합 654명 희생자들을 한곳에 집중한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6사 길장제전역 렬사지묘를 만들고 키 높은 기념탑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상황이였기때문에 유감스럽게도 희생자들의 명단을 모두 정확히 밝힐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비석에 새겨진 173명의 렬사명단밖에 찾아볼수 없었다.

2008년 4월 5일, 고점자—전오가자 전투 생존자와 목격자, 장춘시차세대관심위원회와 로인협회, 길림시조선족로인협회 대표들과 조선족소학교 사생들이 화피창렬사릉원에 모여 성대한 성묘행사를 진행했다.

독립 6사 생존자들은 길림—장춘 제 전역에서 희생되였던 전우들을 잊지 않고 해마다 청명이면 찾아오군 한다. 고락을 같이하고 생사를 나누었던 전우들을 어찌하면 잊을수 있겠는가?

(김병욱) 《지금두 눈물이 자꾸 나오. 제일 가까운 사람 그것도 있단 말이요 리백근이라구, 4반 반장인데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끌어냈소. 후에 내가 화피창에 갔을 때 리백근의 동생, 동생이라야 오빠 어떻게 생긴줄도 모르는데…》

생전에 보지도 못했던 오빠의 사적을 김병욱로인에게서 들은 한 녀자가 자기가 리백근의 녀동생 리옥금이라고 했다. 렬사의 출생과 가족의 이름을 대조해보니 맞았다. 희생된 전우의 녀동생을 본 김병욱로인은 광영원에 찾아가 렬사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로 모시고 전우의 녀동생을 자기의 녀동생으로 삶겠다고 했다.

이때로부터 김병욱로인은 전우의 어머니를 자기의 어머니로 모시고 전우의 녀동생을 자기의 녀동생으로 삶고 행복하게 보냈다. 피로써 맺어진 혁명적 우의는 계속 이어지고있었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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