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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82)—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옛터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06 15:32:27 ] 클릭: [ ]

항일전쟁시기 섬북 연안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투쟁 지휘중심이였고 중국혁명의 성지였다. 중국의 수많은 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한편 중국의 새로운 혁명을 위해 기능을 련마하였다.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연안에 모여 중국혁명에 투신하였고 기능을 련마하면서 미래 조국건설을 준비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연안에서 태항산으로 또 여러 항일근거지로 파견되여 사업과 투쟁을 진행함으로써 중국항일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연안의 보탑산과 연하수에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이 남겨놓은 노래가 남아있고 라가평에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여 학습하고 훈련하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있다. 이는 중국항일전쟁에 대한 조선혁명자들의 기여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오늘까지 사람들을 부르고있다.

연안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한후 답사팀은 10월 28일 저녁 10시 30분 기차로 연안을 떠나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갔다. 서안과 락양 등지의 부분적 사적지들을 답사해야 했기때문이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섬서성 소재지 서안에 도착한것은 10월 29일 새벽 5시였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서안 기차역은 사람들로 붐볐고 희미한 불빛사이로 여러 장사군들이 손님들을 붙잡고 뭐라고 열심히 흥정하는것이 보였다. 우리는 역을 나와 곧바로 짐 맡기는 데로 갔다. 택시기사들이 달려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열심히 물었다. 우리는 그들을 제치고 보관소에 짐을 맡기면서 주인에게 장안현(長安縣) 두곡진(杜曲鎭)으로 가는 방법을 문의하였고 택시가격을 물어보았다. 주인은 그곳을 자상히 알려주었을뿐만 아니라 만약 자기를 믿어주면 자기가 택시를 찾아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가격을 흥정하고 주인이 찾아주는 택시를 타고 서안시 남부교외에 자리잡은 두곡진으로 향했다. 차는 불 밝은 서안시를 빠져나와 교외로 달렸다.

우리 나라 7대 고도의 하나인 서안은 유명한 력사문화도시이다. 서주(西周)로부터 시작해 12개 봉건왕조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기때문에 수많은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있다.봉건왕국으로 전국통일을 완수한 진시황의 릉원과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이 서안교외에 있고 한나라때의 유명한 실크로드가 이곳에서 시작되였으며 당조(唐朝)의 불교문화를 설명해주는 대안탑(大雁塔)도 이곳에 있다.

중국서북의 교통, 문화 중심도시인 서안시는 항일전쟁시기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일본침략군의 서북진출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동시에 각종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중경에 있던 한국림시정부에서도 광복군부대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우리가 찾아가는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옛터가 있다.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 옛터.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옛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 리범석의 거처 옛터

날이 희붐이 밝기 시작하여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도착하였다. 길량켠에 민가들이 줄지어있었는데 길을 사이두고 중학교와 마주한 량식창고 하나가 있었다. 이곳이 바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옛터이다.

커다란 마당주변에 단층 줄집이 3면으로 늘어서있었다. 벽은 모두 흰 회칠을 하였지만 낡은건물 모습은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창립된 한국광복군은 각 전구에 대원을 투입하여 활발한 항일무장선전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 김약산이 광복군 부총사령으로 임명되고 김약산이 령도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였다. 그리고 원 광복군 각 지대는 제2지대로 개편되였다. 광복군 참모장이였던 리범석은 이때 제2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여 서안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광복군 제2지대 지대부는 바로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위치한 이 량식창고에 설치했다. 서안은 화북과 린접해있기때문에 화북전선으로 진출하기 편리한 곳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였다. 이곳에 지대부를 설치한 리범석은 산서성과 하남성에서 류랑하고있는 조선청년들을 쟁취함으로써 대오를 확대해나갔다.

리범석은 1943년 3차에 걸쳐 대원들을 적 강점구로 파견하였다. 대원들은 적정을 탐지하고 적후의 조선청년들을 쟁취하는 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또한 일제에게 체포되여 많은 희생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국민당부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5월, 리범석은 미국 정보일군의 도움으로 두곡진에서 이른바 《한미합작반(韓美合作班)》을 세웠다. 합작반은 제2지대 성원과 리범석이 중경에서 거느리고 온 대원 그리고 보계의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조선병사들을 집중하여 조직되였다. 그들은 주로 미군 교관에게서 첩보, 정보일군으로 훈련받았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대원들은 각지에 파견되여 정보활동에 종사했으며 일부는 상해에서 공습목표를 무전으로 미군항공대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리범석은 한미합작반 성원을 광복군정예부대로 재편성하고 이들을 거느리고 1946년 봄에 조선남부로 나갔다.

지대부가 있던 량식창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두곡진 도계보(桃溪堡) 64번지는 리범석이 거주했던 집터이다. 지금 그곳에는 단층 벽돌집 한채가 있었다. 집주인은 로봉주(盧鳳柱)였는데 부모들에게서 리범석에 관련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고 한다. 그의 회억에 의하면 리범석 지대장은 개를 무척 즐겼는데 그의 애완견이 죽자 관을 해 묻었다고 했다.

철기 리범석.

철기(鐵騎) 리범석(1900-1972)은 서울사람으로서 1915년에 이미 려운형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를 거쳐 운남에 간 그는 운남강무학당 기병과를 졸업하고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동북에서 리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독립군양성에 진력하였고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934년 리범석은 관내로 들어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있었고 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참모장으로 되였다. 항일전쟁시기 리범석은 서안에서 국민당과 적극 협조하면서 줄곧 광복군 제2지대를 지휘하였다.

8시가 가까워 날이 훤히 밝자 우리는 두곡진을 떠나 다시 서안으로 갔다. 거리에는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붐볐다. 길가의 해묵은 오동나무는 황금색으로 단풍이 들어 고도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주고있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간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팔로군 서안판사처로 찾아갔다.

서안시 북신가(北新街)의 칠현장(七賢莊)은 번화한 시중심에 위치한 조용한 정원이였다. 검은 칠을 한 널대문이나 줄 지은 단층건물은 너무나도 간소하여 평범한 농가와 흡사하였다. 다만 정문어구에 공화국 원수 엽검영이 쓴 《팔로군 서안판사처 기념관》이라는 몇글자가 눈에 안겨 올뿐이였다.

기념관입구에는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사무처, 섬서 주재 국민혁명군 팔로군판사처라고 쓴 옛 간판이 량쪽에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정원과 여러 기념전시청으로 구성되여있었다.

1936년 봄 중국공산당은 칠현장의 한곳을 빌려 비밀련락소를 설치하였다. 이때로부터 1946년 팔로군판사처가 서안에서 철수할 때까지 10년간 칠현장은 항일통일전선을 수호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판사처는 팔로군에서 수요하는 물자를 구입해 보냈고 섬감녕변구에 물적 자원을 제공하였으며 국민당통치구의 애국청년들과 국제인사들을 연안에 보냈다.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서안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공산당을 찾고 혁명성지 연안으로 갈수 있었다.

연안으로 들어간 조선혁명가들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은 중경의 조선혁명자들과 련락을 취하는 중요한 거점으로 이곳을 거쳐다녔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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