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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81)—연안에서 맞이한 승리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3-02-06 15:30:20 ] 클릭: [ ]

1945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세계반파쑈전선은 대승리를 눈앞에 두고있었다. 막강한 동맹군함대는 태평양섬으로부터 일본본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독일파쑈를 전승한 쏘련홍군도 중국동북으로의 파병을 준비하고있었다.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진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도 련속되는 타격을 받고있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일에는 쏘련군이 대일선전을 하고 중국 동북으로 대거 출병하였다. 사면초가에 몰린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은 방송을 통해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을 청취하였다.

최룡수교수(왼쪽 첫사람)연안의 라가평마을에서 조선혁명군정대학 상황을 소개.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중앙대강당.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전경(력사사진).

(최룡수 교수) 《이 마을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일본천황의 항복연설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울려퍼졌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너무나도 급작스레 전달되였다. 8년 피어린 항쟁을 해왔던 중국 전역에 기쁨의 환성이 터졌고 폭죽소리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홰불을 들고 거리에 떨쳐 나와 환성을 질렀다. 이날 연안성은 환호와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자들은 조선의용군행진곡과 아리랑을 부르며 즐거운 밤을 지새웠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쓰러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내였던가! 연안의 중국 군민들과 함께 즐거운 환성을 터치는 우리 조선혁명가들의 마음은 더욱 격동되였던것이다.

망국의 수치를 안고 수십년간 일제의 철제밑에서 허덕이던 천백만 조선인민들이 드디어 허리를 펴고 살수 있게 되였다. 자유를 찾은 기쁨과 환성속에서 그들은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들은 가렬처절했던 전투의 나날들을 회억하면서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전우들을 추모하였으며 이제 곧 진행하게 될 조선으로의 진격을 생각하였다. 해방받은 조국과 인민이 독립과 해방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씩씩한 전사들을 성대히 환영할것을 생각하니 모두가 가슴이 벅차기만 했던것이다.

(권립 교수) 《1945년 8월 11일에 주덕은 조선의용군이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제를 소멸할것을 명령했습니다. 9월 3일에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교의 300여명 학원들은 팔로군과 더불어 조선의용군과 더불어 연안을 떠나 동북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1945년 8월에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2천여명으로 확대됐습니다. 주덕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떠난후 12월초에 심양에 도착했을때는 3천여명으로 되였습니다.》

1945년 8월 11일, 연안의 팔로군 주덕 총사령이 제6호 작전명령을 내렸다.

《중국과 조선 경내로 출병해 작전하는 쏘련군에 배합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화북현지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는 즉각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격하여 일제와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해방의 과업을 완수하라. 총사령 주덕. 1945년 8월 11일 12시.》

이 명령에 따라 각지로부터 연안과 태항산으로 이동하던 조선의용군 각 부대는 발길을 돌려 동북으로 진출하게 되였고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도 동북진출을 준비하게 되였다.

중국 관내에서 가장 먼저 동북으로 진출한 부대는 주연이 이끄는 기동의 조선의용군 선견대 100여명이였다. 하북성동부에서 장기간 항일유격전을 전개해오던 이들은 일본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즉각 동북으로 진격하게 되였던것이다. 하북은 동북과 가장 가까웠기때문에 이들이 가장 먼저 행동하게 되였던것이다. 이들은 팔로군 기열료부대를 따라 9월중순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부대는 도중에서 하북지역에 산재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을 접수하여 그 수가 4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미리 심양에 와있던 신한청(愼韓靑)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세하여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縱隊)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 지대장은 신한청이 맡고 정치부 주임은 주연이 맡았다. 조선으로 진격하려는 열망을 안고있던 이 조선인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신의주까지 들어갔으나 쏘련군의 거부를 받아 다시 심양에 모였다.

한편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은 연안에서 각가지 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또 군력을 정비한 다음 1945년 9월부터 동북으로 향발하였다. 이들은 하북성 장가구에서 태항산으로부터 오는 부분적 대원까지 합쳐 400여명에 달했다. 부대는 중국 동북의 금주에서 태항산의 주력인 조선의용군 간부대대(幹部大隊) 300여명과 합친후 심양으로 진격하였다.

1945년 11월 초순, 심양시 근교에서 1000여명의 조선의용군이 모인 군인대회가 열렸다. 조선의용군 사령인 무정은 소수의 로혁명가들만이 조선으로 들어가고 의용군은 전투편대로 나뉘여 동북 각지 조선인 집거구로 들어가 계속 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대를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로 편성하였다.

한편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을 주석으로, 한빈과 최창익을 부주석으로 결정하고 동맹집행위원의 명의로 당면 정치주장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편협한 정당과 계급이 독점적으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것을 절대 반대할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동북 진출을 이룩한후 무정, 김두봉,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 혁명가들이 조선 국내로 들어갔고 박일우, 박효삼, 왕신호(김웅), 리익성, 주덕해, 리상조 등은 조선의용군 각 지대를 이끌고 계속 동북에서 싸웠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조선인집거구에서 많은 조선청년들을 혁명에로 이끌었으며 부대를 확대해 나갔다. 당시 중국 동북항일련군에는 더 많은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 부대에서 중국공산당부대와 함께 동북해방과 중국 전역해방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합방되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인민은 수십년간의 간고한 투쟁을 거쳐 드디여 일제의 패망을 보게 되였다. 중국 관내에서 피어린 항쟁을 하던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의 라가평이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일제 패망의 희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항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수많은 인파들속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즐기던 조선혁명가들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떠났다.

라가평마을을 나오면서 마을입구의 한 가옥에 《조선소채(朝鮮小菜)》를 판다는 작은 간판을 볼수 있었다. 조선족짠지를 판다는 뜻이다. 《혹시 이곳에 아직까지 조선족이 살고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으로 급히 찾아보았다. 집마당에는 작은 밀차 한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김치며 짠지 따위가 가득하였다.

주인은 40대 녀인이였는데 만나고보니 조선족이 아니였다. 반신아(潘新娥)라고 부르는 이 녀인은 신강의 조선족에게서 무침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면서 3년전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입구에 조선혁명군정학교 비석이 있었기때문에 조선족짠지도 잘 팔릴것 같아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괜찮게 된다고 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족에 대해 생소하지 않았고 조선족 짠지도 잘 사간다고 하였다.

라가평을 떠나는 우리의 마음에 아쉼움이 없지 않았다.

라가평에서 조선족 짠지를 파는 한족녀인.

연안답사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고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

최룡수교수는, 일본 포로를 감화시켜 반제투쟁에로 이끌던 연안의 일본로동학교옛터는 잘 보수되고 개방되고있지만 우리 민족의 군정학교옛터는 관리가 따라 가지 못한다고 애탄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줄곧 현지정부의 중시를 받지 못하다가 항일전쟁 승리 50주년을 기념하던 1995년에야 고작 비석 하나를 만들었던것이다. 학교교사옛터나 의용군대원들의 활동지가 분명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고있는것이 안타깝지 않을수 없었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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