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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58)—독립운동가 김철남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2-10-24 11:13:34 ] 클릭: [ ]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관내에서 중국 군민과 함께 피 흘리며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적후항일근거지에서 싸운 지사도 있었고 대도시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한 혁명가도 있었으며 항쟁의 제일선 전투에서 직접 싸운 투사들도 있었다. 또한 중국 항공부대에서 방어사무를 맡아본 장교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김철남이다.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중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일찍부터 민족독립의 길을 찾아 중국에 들어온 그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줄곧 국민당 장교의 신분이였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김철남(1895~1952)은 또 김병두(金炳斗) 라는 별명도 있다. 3.1운동후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국민당군에 복무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총감부(防空总监部) 과장을 지냈으며 1941년에는 귀양항공대대(贵阳航空大队) 대령으로 근무하였다. 중국에서도 김철남은 반일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1921년 12월 그는 손두환과 함께 중국 각지의 조선인동지들을 규합하기에 힘썼고 기관지 《신조선》을 발행하였다. 그후 상해에 거주하면서 한인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한인구락부를 조직하고자 발기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철남은 1943년 11월에 림시정부 교통부 차장을 겸직하고 이듬해 12월에 다시 참모차장에 임명되였다. 1945년 2월 7일 동지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14명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그가 서거한 뒤 1972년에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정부가 발급한 독립메달.

2004년 1월 21일에 답사팀은 음악공연과 교수에 다망히 보내는 김정평교수와 련락을 가지고 그의 동생 김중평교수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정평교수와 김중평교수가 바로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의 장남과 차남이다.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녀사가 장남 김정평, 차남 김중평,넷째 아들 김인평, 막내딸 김애평과 함께 북경에서 생활하고있고 셋째 아들 김야평은 미국에서 사업하고있었다. 이 가정은 말 그대로 음악가정이였다. 1929년생인 김정평교수는 중앙민족대학 음학학원의 교수이며 북경대학 음악감독 겸 지휘로 사업하고있다.

차남 김중평씨는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고 무한군구가무단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으며 셋째 김야평씨는 중앙악단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갔고 넷째 김인평씨는 북경음악주보 부총편으로 사업하다 퇴직하였다. 그리고 막내딸 김애평씨는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다 퇴직한 분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녀들까지도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국제음악 대상을 수여받는 화려한 활약상을 보이고있다.

독립운동가인 김철남에 관련해 알아보고저 한다고 하자 이들은 어머니 역소군녀사를 모시고 한자리에 모였던것이다. 96세인 역소군녀사는 청각이 좀 불편했을뿐 퍽 건강해보였고 자녀들의 도움으로 우리의 질문을 조금씩 알아듣고 아득한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장남 김정평 교수도 이따금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사업에만 열중하고 늘 집을 돌보지 않았다는 아주 평범한 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1895년 9월 12일, 조선 황해도 신천의 몰락해가는 봉건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하여 가정이 날로 몰락해갔기때문에 그는 어릴 때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목사가 꾸리는 학교에서 청소를 하고 등갓을 닦는 등 잡일을 하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총명한 그는 미국 목사의 도움을 받아 대학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늘 교회에 가서 교회음악을 들었고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하였다.

1915년 5월에 김철남은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할 념원으로 중국 상해에 왔다. 그는 상해, 남경지역을 전전하면서 혁명의 길을 찾았다. 그러던 김철남은 조선인 혁명자들의 규합에 심혈을 기울리다가 복건성 복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게 되였다.

1924년 손중산이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자 김철남은 이 학교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교도퇀 부퇀장으로 있으면서 교장판공실 부관으로 있던 조선독립지사 손두환과 익숙히 지냈고 또 학교의 다른 조선인 지사들과도 함께 활동하였다.

북벌전쟁시기 김철남은 북벌군을 따라 광주로부터 강서성 남창으로 진격하였다. 북벌군이 승전한후 그는 남창에서 중국 녀성 역소군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후 그는 국민당 총사령부를 따라 상해를 거쳐 남경에서 다년간 활동하였다.

상해, 남경에서 김철남은 국민당 고위장교로 있었기때문에 가정은 비교적 유족한 편이였다. 그는 이 시기 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상해, 남경에 오는 조선혁명자나 청년지사들은 모두 김철남을 찾아와 도움을 받았다. 그때면 김철남은 그들이 좌파든 우파든 헤아리지 않고 무릇 조선인이면 애써 도와주려 하였던것이다. 그는 늘 조선혁명자와 조선청년들을 집에 수용하였고 그들이 혁명활동을 진행하도록 지원해주었다.

상해에서 김철남은 한 고향 사람이며 경신학교 선배인 최중호(崔重鎬1891-1934)와 의형제로 지냈고 김구, 김원봉과도 많이 접촉하였다. 최중호는 조선의용대의 한 사람이였던 최채(崔采 1914-현재)의 부친이다. 그리고 로씨야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온 장성철과 가까이 보냈고 녀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락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온 박시창, 최창석(崔滄石 최용덕)도 김철남 일가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철남 일가는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도와주면서 묵묵히 독립운동에 기여한 혁명가족이다.

남경에 있을 때 그들은 삼산리(三山里) 1번지 화패루(花牌樓) 곁에서 살았다. 량쪽 부모에 많은 자녀까지 두었기때문에 모든 가정부담은 김철남의 부인인 역소군녀사가 짊어지게 되였다. 게다가 자주 찾아오는 조선혁명자들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역소군 녀사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이 임무를 감당해나섰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저당잡혀서 혁명자들의 로비를 마련해주었고 손수 옷가지를 만들어 입혔으며 혁명자들을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었다.

김철남 일가가 상해, 남경에 있을 때 장성철, 손두환,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최창석 그리고 녀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또 국민당 조기 항공학교를 졸업한 장성철은 기술이 뛰여난 비행기술자였다.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의 군정요원들의 비행기가 뜨기전에 꼭 그에게 비행기 점검을 맡겼다고 한다.

장성철은 비행기의 발동소리를 듣고 고장난 곳을 정확히 짚어내였다. 당시 국민당 공군의 가장 중요한 비행기 수리소가 곤명에 있었는데 장성철은 그 공장의 공장장이자 공정사로 있었다.

손두환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다년간 조선혁명가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또 독립운동사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최창석은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일자리도 없어 상해에서 고생이 많았다. 최창석 일가는 늘 김철남 일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최창석은 끝내 상해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조기 녀류비행사였다. 그의 부부는 김철남일가와 이웃하였다. 조선의 진보적인 혁명가들과 접촉이 많았기때문에 이들은 늘 밀정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권기옥부부는 한동안 김철남의 집에서 피신하다가 체포된 일도 있었다. 그때 김철남은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일을 모르고있었다. 역소군녀사는 조용히 뒤문으로 빠져나가 집에 밀정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김철남에게 알려 무사할수 있었던것이다.

김철남이 조선혁명가들과의 련락이 빈번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였기때문에 국민당특무들이 그를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김철남은 공산당 혐의를 받았고 밀정들을 눈을 피해 한동안 상해에 잠복해있기도 하였다. 그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사귀였던 국민당의 많은 장교들이 도와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화를 입지 않았고 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교관으로 학교에서 일어를 배워주었다. 황포군관학교 제8기 사생명록을 보면 김철남은 외국문교관으로 나온다.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防空) 부문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소극방공처(消極防空處) 처장으로서 소주(蘇州)에서 일본침략군의 폭격을 막기 위한 공습방어체계를 설립하다가 후에는 호남, 호북 공습방어 사령부에서 대령 군관으로 있었다.

김정평교수는 항일전쟁시기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인재가 많이 필요했기때문에 김철남은 다시 군사위원회 공습방어 총감독부 소극방어처 처장으로 있게 되였다. 그는 적기가 오면 경보를 울리고 정보를 전하는 일을 도맡아하였다. 일본침략군이 상해를 공격할 때 김철남은 소주에 가서 공습방어 초소와 공습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하늘에서는 적의 비행기가 빈번히 날아와 폭탄을 던졌지만 김철남은 태연하게 전화로 방어와 반격작전을 지휘하였다.

송회호전이 끝난후 그는 호남에서 공습방어사령부 사령으로 있었다. 무한회전을 비롯해 호남성 장사는 일제 주력부대의 수차로 되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강의한 중국 군민들은 일치단합하여 장사전역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 가운데서 공습방어부대의 역할도 자못 컸던것이다.

국민당군이 패퇴하여 중경에 수부를 옮기게 되자 그는 선후로 사천성 기강(綦江), 감숙성 란주, 사천성 성도(成都) 강진(江津) 군용비행장의 방공시설 구축사업에 참가하였다. 이때 그의 신분은 국민당 군사위원회 방공총감부(防空總監部) 과장(科長)이였다.

국민당군을 따라 일제와 싸우는 수차의 전투에 참가하는 동시에 김철남은 조선혁명가들의 반일혁명투쟁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김철남은 민족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남경에서 손건(孫建), 리연호(李然浩)와 더불어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개인신분으로 각 단체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련맹 3단체의 조선민족전선통일 촉성회가 출범하게 되였고 그후 수개월의 노력을 거쳐 12월 드디어 조선민족전선련맹이 출범하게 되였다.

1940년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는 김철남이 김병두라는 이름으로 김규광이 이끄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주요 성원으로 기록되여있다.

중경에서 김철남은 계속 국민당의 관직을 보류한 상황에서 한국 림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교통부 차장을 지냈고 1944년에는 림시정부 참모차장으로 있다가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김철남은 중경에서 포츠담회의에 관련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실망을 안고있었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많이 접근했던 김철남은 림시정부를 따라 한국에 가지 않았다.

수십년간 일제통치하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던 조국과 인민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누려야 했던것이다. 그러나 검은 구름은 가셔지지 않았고 드디어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

다년간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고심하고 투쟁해 오던 김철남은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고 병석에 눕게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북경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에서 사업하던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막내딸 김애평(왼쪽)과 독립운동가 장성철의 딸 장동옥(오른쪽)

김정평교수는 아버지에게서 조선말을 배우지 못한것이 유감이였지만 혈액속에 흐르는 민족의 피는 예술면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도록 격려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민족의 정서와 정감은 그의 온 가정이 예술에 몸담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였다.

음악에 관련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예술인 가정일동이 모두 흥미진진해졌다. 말쑤가 적던 김중평선생은 이때 《윤극영이 작곡한 노래 <반달>은 아버지께서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전파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중국에서도 잘 아는 이 노래가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에 의해 전파되였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였다.

정열에 넘쳐있던 김정평교수가 제의하여 모두가 노래 《반달》을 부르기로 하였다. 장동옥씨가 피아노연주를 하고 김정평교수가 지휘를 맡아 모두들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을 기념하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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