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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60년]물길을 빼고 논을 만들던 나날에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9-12 14:52:46 ] 클릭: [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특별기획 《기억속의 60년》

내가 살던 화룡현 용화향 상화대대는 대채식대대로 지목받으면서 사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밭에서 일을 하게 되였다. 철따라 농사를 짓는 한편 비탈밭을 제전으로 만들고 강물을 막아 물길을 빼여 논을 풀었다. 사람마다 새벽닭이였고 꼬리 없는 황소였으며 철인(铁人)이였다.

두만강 굽이굽이 몇굽이를 돌고돌아 지금의 남평진 소재지로부터 약 30킬로메터 정도 내려오면 도문강이 굽이를 돌면서 그 하류에 70헥타르 남짓한 판전이 앉아있다. 그 판전에 논을 풀기 위하여 두만강으로부터 7킬로메터 정도 물길을 빼게 되였다.

1970년 초봄이라고 기억된다. 내가 금방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물길을 빼는 공사가 시작되였다. 채석장에서는 돌을 깨는 남포소리가 이따금씩 울리군 하였다. 돌을 깨는 사람, 돌을 목도로 나르는 사람, 돌을 쌓는 사람, 콩크리트로 틈새를 막는 사람, 흙을 파는 사람, 흙을 나르는 사람으로 공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무릇 전 대대의 움직일수 있는 로력은 몽땅 동원되여 수문건설과 물길을 빼는 공사에 참가하였다. 수문과 채석장의 거리가 너무 가까이 있다보니 지휘원이 남포를 알리는 호각을 울리면 일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산을 등진 곳으로 피난을 하군 하였다.

모주석의 《광활한 농촌에는 할 일이 많다》는 지시를 받들고 많은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던 시절이다. 우리가 살던 고장에도 장춘지식청년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모두 수문건설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치벽한 산골마을에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조선족들이 모여살던 고장이라 한족이란 없었다. 혹여 한족하방간부(下放干部)가 있긴 했어도 마을사람들과 별로 휩쓸리지 않고 얼마간 농촌에 있다가 도로 제고장으로 돌아가다보니 조선족들은 한어말 대화라는것을 해본 사람이 없었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을 건설하려는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내려왔지만 서로 언어를 몰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다보니 무슨 일을 시키려 해도 곤난이 막심했다. 다행히 공부를 했던 지식청년들이 눈치 하나만은 빨라서 그런대로 사원들을 따라 일을 하는 정도에 머물게 되였다. 그런데 사달은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데서 발생하고야 말았다.

어느 날, 채석장의 남포를 끝마치고 사람들이 휴식을 하느라 바람맞이를 피해 거도의 움푹진 곳에서 휴식하고있을 때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는 일이 끝내 발생하고야 말았다.

휴식하던 녀지식청년 둘이서 금방 남포를 한 채석장 산밑으로 발길을 옯기였다. 이때 누군가 그녀들을 보고 위험한 곳이니깐 그리로 가지 말라고 높은 소리로 웨쳤다. 하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그녀들은 당금 무너져내리는 산비탈쪽으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채로 발길을 옯겨놓는다. 사태의 위험성을 느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높은 소리로 웨치고 행동이 빠른 남성들이 그녀들을 위험에서 구하려고 그녀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지만 때는 이미 늦어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높이 웨치는 소리에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사람들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순간 사나운 돌사태가 마구 내리꼰지면서 나어린 두 생명을 삼켜버리고말았다…

전 대대 남녀로소 움직일수 있는 사람은 모두 그녀들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그때 금방 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그녀들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학교 뒤산에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는데 그곳에 그녀들을 모시게 되였다. 검붉은 칠을 했던 그녀들의 《집》이 이제 땅속깊이 파묻히면서 나젊은 생명 둘이나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고 생각하자 공포가 온몸을 싸고돌았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나라의 지시대로 농촌건설에 나섰던 그들이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 너무나 무정한 현실때문에 농촌의 생활이란 어떤것인지조차 감수하기도 전에 하루 아침의 이슬마냥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말았다. 내 자식같은 젊은이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던 사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가? 나라의 정책대로 나어린 자식을 머나먼 낯선 고장으로 그것도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민족 변강지구로 보내야 했던 도시의 부모들의 심정 또한 어떠했을가? 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에 요절한 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가?…

물길을 빼는 공사는 계속 진척되였다.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상화대대사람들의 이밥을 먹어보겠다는 념원과는 달리 수문건설공사는 사람들의 뜻대로 되여주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채석장에서 또다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남포를 터치우던 로공산당원이 남포돌에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게 되였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큰 일이 생기다보니 사람들의 정서가 저락되고 수문건설공사는 이러구러 간신히 마무리를 보았다. 물길을 빼고 판전에 논을 풀었는데 사람들의 부푼 의지와는 반대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모래땅에 논을 푼것도 문제이지만 조선 무산광산에서 배출하는 광산찌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도문강물을 그대로 밭에 에워넣다보니 철깡치가 밭에 깔리면서 오히려 토질을 망가놓고말았다. 거기에다가 수로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아이가 생명을 잃는 일까지 생기다보니 몇년간 애써 건설한 수로는 결국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끝없는 한만 남기고 페허되고말았다.

1976년 겨울, 대대에서는 전 대대 청년들을 동원하여 그 옛날 사람의 힘으로 힘들게 파놓았던 수로를 다시 사람의 힘으로 메우는 공사를 벌이게 되였다. 물을 끌어들이던 수문(进水闸)과 물이 흐르던 수로는 청년들이 삽과 곡괭이로 산을 파헤쳐 두 어깨로 목도를 하여 흙을 나르면서 몽땅 메워버렸다. 나의 넷째오빠가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공사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저녁에 녹초가 되여 돌아와서는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잠에 곯아 떨어지군 하였다.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측은해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상화제방에는 그때 사용하던 배수수문(排水闸)이 그대로 남아있다.

흘러간 력사를 말해주는듯 아직도 남아있는 상화제방 배수수문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지만 지금도 내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것은 내 가족이 그 수문건설공사장에서 너무나 많은 땀을 흘렸기때문이고 또 금방 학교에 입학한 내가 학교를 오고가면서 수문건설공사장에서 간이도로를 만들기전까지 그 무시무시한 수문꼭대기를 네발걸음으로 벌벌 기면서 건느느라 너무도 큰 공포를 느꼈기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은 꿈에 그 수문을 보군 한다. 수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물갈기가 당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삼켜버릴것 같아 꿈에서마저 공포를 느끼군 한다.

입에만 넣으면 목구멍까지 긁어내리는 껄껄한 조밥이나 옥수수밥 또는 돌아앉으면 배가 고프다는 보리밥 대신 입에 넣으면 살살 녹아나는 이밥을 먹는것이 산골사람들의 가식없는 념원이였다. 그 념원을 실현하려고 당의 지시를 심장으로 받들고 일심전력으로 피와 땀과 생명을 대가로 건설했던 수리공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념원과는 달리 이밥을 먹기는 고사하고 무고한 생명들만 잃고말았다.충분한 계획과 현실에 대한 조사연구가 결핍한데다가 막무가내한 령도들의 결책이 결국에는 비극을 만들어낸것이다. 산골사람들도 그렇게 힘들게 건설하고 또 그렇게 많은 아픈 상처를 남긴 수리공사의 덕분으로 이밥을 먹을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그러면 구천에 간 희생자들도 웃었을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지금은 논이 없는 산골에서도 무난하게 이밥을 먹을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다. 하지만 흘러간 력사, 사람들에게 아픈 상처만 남겼던 그 시대의 력사가 우리 후대들에게는 어떤 교훈을 줄수 있을가?

/화룡시수리국 최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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