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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답사17]왕모궁원에서 흘린 사나이의 눈물

편집/기자: [ 김파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9-15 09:56:26 ] 클릭: [ ]

백절불굴의 사나이

―4갈래 홍군장정의 코스를 답사한 리완빈의 이야기

○ 김인덕

2007년 7월말, 리완빈부부가 말을 끌고 량당현성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리완빈부부를 희한한듯 지켜보았다. 그중 많은 인파속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쑥 나와 자신을 리완빈부부에게 소개했다.

《전 량당중학교의 교원입니다. 제가 당신들을 려관에 모시겠습니다.》

성이 김씨인 그 교원은 리완빈부부를 려관에 배치하고 짐까지 날라주었다.

《장정길을 답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당신네처럼 부부가 장정길을 답사하는것은 처음 봅니다. 제가 유관부문과 련계하여 당신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할가 합니다.》

리완빈은 김선생의 제의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문련과 작가협회는 공동으로 리완빈부부에게 저녁을 초대하였다. 이튿날, 문련과 작가협회는 리완빈부부를 초청하여 당지의 유관인사들과 함께 좌담모임을 개최하였다. 좌담모임에 참가한 문련의 한 지도자는 량당현에 대해 소개했다.

《량당은 유구한 혁명전통을 지니고있는 고장입니다. 일찍 제2차국내혁명전생시기인 1932년 4월, 습중훈 등은 량당현에서 병변을 발동하였습니다. ‘량당병변’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서북지구에서 발생한 유일한 한차례의 무장병변입니다.》

리완빈은 련환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장정길을 답사한 경과를 이야기하였고 당지의 서법가들은 리완빈에게 서예작품을 증송하였다. 이튿날, 리완빈이 량당현성을 떠나던 날, 좌담모임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보슬비를 무릅쓰고 리완빈부부전송하였다. 그들은 몇킬로메터의 로정을 리완빈부부와 함께 걸었다.

8월 2일, 리완빈은 천수(天水)시교에서 장족청년 숴난쟈춰(索南加措)를 회합하였다. 숴난쟈춰는 리완빈의 안해 신향자가 앓는 몸으로 힘들게 장정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리완빈부부를 찾아온것이다. 이때로부터 숴난쟈춰는 한달반가량 리완빈부부와 함께 제3차장정에 참가하였다.

8월 21일 오후 5시, 리완빈부부는 숴난쟈춰와 함께 백수진(白水镇)을 지나 경하(경泾河)에 도착하였다. 경하는 감숙성의 큰 강이라지만 강물은 평시에 매우 얕아 걸어서 건널수 있는 강이였다. 리완빈일행은 이튿날 아침 일찍 경하를 건너려 작심하고 경하가 남안의 왕모궁원(王母宮塬)에서 하루밤을 묵기로 했다. 리완빈은 경하 강뚝에 풀이 많은것을 발견하고 말을 강뚝에 매놓았다. 저녁 10시쯤 되여 숴난쟈춰가 리완빈에게 물었다.

《밤도 깊었는데 말을 들여올가요?》

《괜찮아. 강뚝에 풀도 많고 강물도 깊지 않아 위험하지 않아. 말이 밤새도록 실컷 풀을 뜯게 그냥 나둬.》

이튿날 아침 5시쯤, 리완빈은 잠결에 누군가 덴트밖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리완빈이 덴트의 쪼르래기를 열고 밖을 내다보니 숴난쟈춰가 울상이 되여 덴트밖에 서있었다.

《말이 사라졌습니다. 강물에 홍수가 져 말을 밀어갔습니다.》

《비도 안 왔는데 강물이 왜 불어난단 말이요?》

《어제밤, 상류에 큰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난거랍니다.》

리완빈은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강뚝으로 달려갔다. 잔잔히 흐르던 강물은 요동치며 흐르고 있었고 강물은 이미 강뚝을 넘어서고있었다. 리완빈은 사품 치며 흐르는 강물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말인가. 맥을 놓고만 있을수가 없다고 생각한 리완빈은 말을 찾아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리완빈과 숴난쟈춰는 강물을 따라 정처없이 걸었다. 걷다가 마을을 만나면 마을사람들에게 물에 떠내려온 말을 보지 못했는가 물었다. 강물을 따라 5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마을어귀에서 마을사람들이 리완빈의 말을 둘러싸고 중구난방 떠드는것이 보였다. 리완빈은 말을 찾았다는 기쁨에 날듯이 기뻤다. 리완빈이 말한테 다가가자 말도 리완빈을 알아보는듯 눈을 슴벅거렸다. 리완빈은 당지의 사법소를 찾아 자신의 말임을 증명하고 말을 되찾아오게 되였다. 리완빈은 말을 돌려준 마을사람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70여년전의 1935년 8월 21일 새벽, 홍군은 경하를 건너려고 왕모궁원(王母宮塬)에 도착하였다. 홍군 25군 지휘부는 정위 오환선이 부대를 거느리고 먼저 강을 건너고 부군장 부군장 서해동이 추격하는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환선은 친히 경하가에 서서 강을 건너는 홍군을 지휘하였다. 전군의 담가대원, 의료약품, 군장비를 실은 말, 병원을 따라 이동하는 부상병 등 홍군인마가 경하 이남 좁은 지역에 몰려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이때 왕모궁원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국민당군 천여명이 기병의 배합하에 홍군을 기습한것이다. 홍군지도자들이 제일 근심하던 일이 제일 긴급한 상황에서 발생한것이다.

서해동이 엄호부대를 이끌고 적들의 진공을 저지하였다. 강변에서 도하작전을 선두지휘하던 오환선도 150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와 서해동을 증원하였다. 홍군이 앞뒤로 진격하자 국민당군은 불을 만난 개미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적들의 눈 먼 총알이 홍군 제25군 정치위원 오환선에게 명중되였다. 오환선의 진붉은 피는 풀숲을 붉게 물들였다. 오환선이 희생될 때의 나이는 고작 28세였다.

홍군 제25군에서 《군혼(軍魂)이라 불린 오헌선은 홍군 25군내에서 절대적인 위망을 갖고있었다. 1928년 가을, 오헌선은 농민자위군을 거느리고 적들의 포위를 뚫을 때, 옹근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구마밭을 지나면서도 백성들의 고구마 한알도 다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에야 오헌선은 기진맥진한 전사들의 원기를 보충해주려고 전사들더러 농민들의 고구마밭에 들어가 고구마를 캐서 먹도록 비준하였다. 전사들이 허기를 달래고 고구마밭에서 물러난뒤, 오헌선은 적삼을 벗어 은화를 감싸 고구마밭에 묻어두었다. 이 이야기는 당지에서 널리 류전되였으며 후에 교과서에 실리고 군중기률을 준수하는 전범으로 되였다.

"영웅은 피를 흘릴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서해동은 오환선의 희생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서해동은 선후로 9차례 부상하고 가족 몇십명이 국민당군에게 살해되였어도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비통을 힘으로 바꾸어 혁명의 의지를 더욱 굳혔었다. 오환선정위는 서해동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위의 아버지, 형님, 형수, 동생 등은 모두 국민당군에게 학살당하고 안해는 굶어죽고 어머니는 류랑걸식하고있었다. 하지만 오환선은 한번도 혁명의 결심을 동요하지 않았었다. 그날 저녁 몇몇 전사들은 오환선을 정가구(郑家沟)의 산밑에 조용히 묻었다.

리완빈, 신향자, 숴난쟈춰는 오환선렬사의 묘를 찾아 각자의 이름으로 된 화환을 진정하고 오환선렬사를 추모하였다.

2007년 9월 10일, 리완빈은 섬서성 안새(安塞)에 도착하였다. 제1차장정을 함께했던 조충건이 안새(安塞)에까지 찾아왔다. 그는 리완빈부부와 함께 5일간 행군하였다.

2007년 9월 15일, 리완빈일행은 영평진에 도착하여 제3차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1935년의 이날, 바로 홍군 제25군은 국민당군의 층층의 봉쇄를 뚫고 무수한 곤난을 전승하고 섬서성 연천(延川)현 경내에 있는 영평(永坪)진에 도달하여 섬북홍군과 회합함으로써 장정을 승리적으로 결속지었다.

(련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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