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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35)—홍군대학과 홍군특과학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8-30 13:26:31 ] 클릭: [ ]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은 홍군부대의 확대와 더불어 더 많은 군사지휘인재가 필요하였고 또한 정치적 각오가 높은 간부대오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의 정치와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홍군대학을 창설하였고 풍부한 경험을 가진 홍군고위지도자들이 학교의 주요직무를 맡게 되였다.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조선혁명자들도 홍군대학의 창설에 참가하였으며 학교요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1931년, 모택동과 주덕은 홍군 제8군 군장인 하장공(何长工)과 홍군 제5군 군장 등평(邓萍)에게 홍군대학창설임무를 맡겼다. 모택동은 인민의 군대인 홍군이 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타격하려면 학교를 창설하고 군부대를 다스리며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자체의 군사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해 11월에 중앙의 결정에 따라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军师政治学校)가 서금에 창설되였다. 홍군 각 부대 교도대와 각지 강습반에서 모여온 1,200여명 간부들이 군사정치학교에서 학습하게 되였다.

1932년 학교명칭을 중국공농홍군학교(中国工农红军学校)로 개칭하고 1933년 가을까지 6기로 만여명 홍군간부들을 양성해냈다.

1933년 10월,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홍군학교를 세분하고 확대할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농홍군학교는 홍군대학, 홍군 제1보병학교, 홍군 제2보병학교, 특과학교(特科学校)로 나뉘였다. 이듬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던 유명한 군사전문가인 조선혁명가 양림이 홍군대학의 총교관을 맡았다.

홍군대학의 옛터인 대포촌에서 강서의 시골풍경을 한껏 감상한후 답사팀은 차를 무양향(武阳乡)의 홍군특과학교 유적지를 찾아떠났다.

홍군대학건물(자료사진).

홍군대학 특과학교 옛터 주소가 밝혀진 자료.

감강의 원류 면강하(绵江河)를 따라 작은 산들을 지나니 무연한 평지가 펼쳐졌다. 무연한 밭사이에 가담가담 마을이 있었다.

강서성 서금시 무양진 무양향(武阳鎭武阳乡)에 들어서니 낡은 옛 가옥들이 눈에 띄였고 흑물이 고인 촌길이 나타났다. 그런대로 차는 마을을 지나 한동안 달렸다. 멀리로 커다란 사당이 보였다. 사당 앞에 도착해보니 추씨종사(邹氏宗祠)였다.

홍군특과학교는 이곳 지주집 사당자리에 설치했다는 기재가 있었기때문에 추씨종사가 그 유적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내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추씨종사도 후에 복원한 건물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사당 서북쪽 밭 한가운데를 가르키면서 원 유적지는 그쪽이라고 알려주었다. 거기에는 무너진 건물의 기초 돌과 파손된 담벽이 있었다. 남은 건물유적만 보아도 매우 큰 건물임이 틀림없었다.

홍군특과학교 옛터.

옛터에 남은 유적들.

건물기초와 허물어지다만 담벽이 얼마간 남은 페허주변에는 모두 밭이였고 밭에는 남방의 유명한 유채가 한창 노란 꽃을 피우고있었다.

1933년 10월, 중앙홍군대학에서 분리되여 설립한 학교가 홍군특과학교이다. 이때 중앙홍군대학은 홍군대학, 제1보병학교, 제2보병학교, 특과학교, 유격대간부학교를 비롯해 5개 학교로 나뉘여진다. 홍군 군사위원회 직속인 홍군특과학교는 기관총련, 포병련, 공병련을 합병하여 포병기술을 주로 련마하는 학교였다. 조선혁명가 무정(武亭)이 당시 특과학교 제3임 교장으로 있었다.

상해에서 활동할 때의 조선혁명가 김무정.

조선의 전설적인 영웅 무정(1905--1952)의 원명은 김무정(金武亭)이다. 1905년 조선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에서 태여 난 그는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때문에 무정은 어려서부터 자체로 돈을 벌어 공부하였다. 14살 때 3.1운동을 목격한 그는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을 접하게 되였다. 그후 기독교 중학교를 다닐 때 서울의 고려공산당(高丽共产党) 조직의 지도자 려운형(吕运亨 1885-1947)을 알게 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무정은 1923년 학교를 중퇴하고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섰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2년 무정의 친필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나는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참가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세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서 갖은 혹형을 받다가 도망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온후 대혁명에 참가하였고 사업의 실패로 두차례나 옥살이를 하다가 만기 석방되였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홍군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투쟁을 진행해왔다.》

20년대초에 중국에 온 무정은 하북성 보정(保定)에 있는 보정군관학교(保定军官学校)를 졸업하고 군벌부대에 근무하였다. 남구(南口) 전역과 천진공격전에서 천재적인 군사재능을 발휘한 그는 포병중좌까지 지냈다. 1925년 무정은 장가구(张家口)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무정이 다닌 하북성 보정군관학교.

군벌혼전에서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한 무정은 그후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지만 1927년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진압할 때 무창(武昌)에서 체포되여 사형에 언도되였다. 당시 장개석의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는데 만여명 학생들이 시위를 단행하면서 정치범을 석방할것을 요구하였다. 법정에도 혁명을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에 무정은 무사히 풀려나 상해로 가게 되였다.

1929년 무정은 상해 로동자폭동에 참가하여 무장조직지휘자로 활약하다가 영국인에게 체포되였다. 영국법정은 상징적으로 그를 2개월간 감금한후 곧 석방하였다. 무정은 계속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였다.

(권립 교수) 《무정은 1924년에 열아홉살이였는데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고 스무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무정은 북벌전쟁이 실패하자 상해로 와서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지부위원으로 당선되였습니다. 중앙쏘베트구역에서 무정은 홍군특과학교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은 당중앙소재지인 상해에서 쏘베트지역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에는 홍군 제5군 정치위원인 등대원(滕代远)이 참가하였다. 등대원과 무정은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그후 무정은 섬북에서 등대원의 녀동생인 등기(腾绮)와 결혼하기도 하였다.

회의가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등대원과 함께 호북 양신(阳新)에 있는 팽덕회(彭德怀) 군장의 5군에 참가하였다. 이해 7월 팽덕회의 5군은 동정호기슭의 악주(岳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홍군은 동정호(洞庭湖)에 정박해있던 미국, 영국, 일본 제국주의의 함대의 포격을 받게 되였다. 당시 패장으로 있던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반격할것을 제기하였다.

홍군이 악주를 점령할 때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로획한것이 있었다. 무정은 대포를 걸어놓고 전사들에게 사격요령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직접 조준하여 포사격을 가했다. 20여발의 포탄가운데서 10여발이 적함을 명중하자 적함은 물러나고말았다. 이번 제국주의 포함포격으로 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알려졌다.

훗날 공화국 원수로 된 팽덕회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악주를 점령한후 영국, 미국, 일본의 군함이 성안에 포격을 가했다. 우리는 음페적으로 포를 걸어놓았다. 당시 나와 조선동지인 무정만이 포를 사용할줄 알았다. 적함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격을 가했는데 약 10여발이 적함을 명중하였다. 이때로부터 적들은 감히 포사격을 하지 못했다....악주에서 홍군전사들은 우리가 쏜 포탄이 적함을 명중하자 모두 환성을 올렸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불렀다.》

천재적인 군사재능과 뛰여난 통솔력을 갖춘 무정은 수차의 전공을 세웠고 선후로 패장,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팽덕회는 무정의 재능을 아껴 그를 요직에 배치하고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계속 함께 싸웠다. 이때로부터 무정은 홍군의 포술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1930년 7월, 홍군은 호남 평강(平江)에서 첫 산포련(山炮连)을 조직하였는데 그해말 무정은 산포련의 제3임 련장을 맡았다. 1931년 5월에는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포병단이 강서 피두(陂头)에서 창건되였다. 1임 단장이 실직행위가 있었기때문에 한달후 무정이 홍군보병단의 제2임단장을 맡게 되였다.

그후 무정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홍군 특과학교 포병과 주임, 특과학교 제2임교장으로 사업하였다.홍군 특과학교에서는 실전수요에 따라 《적게 강의하고 많이 조작하며 과당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少讲多做, 少课堂, 多野外)》는 교수원칙을 제정하였다.

1937년 7월의 통계를 보면 전교에 1876명 학원이 있었다. 1934년 9월 장정을 앞두고 부분적 학원과 사업일군들이 간부단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교도사를 편성하였다. 홍군 특과학교의 설립은 홍군대학이 단일학과로부터 다학과로 발전하는 첫 시도였다. 이 학교의 교장이 조선혁명가 무정이였다는것은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한적한 농촌이라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밭머리에서 페허만 남은 홍군 특과학교 유적지를 보노라니 당시 홍군들의 씩씩한 모습이 떠올랐고 적의 포화를 헤치며 두려움 없이 장정길에 올랐던 영웅들의 비장한 모습이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한지라 특과학교 답사를 마치자 이미 점심이 퍼그나 지난 뒤였다. 점심은 무양진 정부에서 배치하였다. 무양진 진장은 반갑게 우리를 맞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였다. 30대 사나이인 진장은 언변이 좋았다. 우리는 이곳 마을 사람들이 유적지를 잘 모르고 유적지의 기초돌을 가져다 논두렁을 쌓는다고 알려주면서 안타까와하였다. 그러자 진장은 유적지보호와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조치를 취해 잘 보호할 것을 약속하였다.

진정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금으로 돌아왔다.

1930년대초 중앙쏘베트지역에 창설하였던 홍군대학과 홍군특과학교는 비록 학교시설이 락후하고 정규화되지 못했지만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홍군이 강철의 대오로 성장하고 갖은 곤난을 물리치고 승리에서 승리에로 전진할수 있은것은 모두 이 시기 양성해낸 정치, 군사 간부들의 유력한 활동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자랑 높은 홍군대학과 홍군특과학교에 조선인 혁명가 양림과 무정이 지도간부로 있었다는것은 우리 민족의 더없는 자랑이 아닐수 없다.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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