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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발자취(14)—혁명부부 양림과 리추악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발표시간: [ 2011-08-15 10:54:06 ] 클릭: [ ]

진리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중국에 모여온 조선혁명자들은 방황하였고 또 언쟁과 암투를 계속하고있었다. 독립과 자유를 찾는다는 공동의 리상을 안고있었지만 서로 다른 리념으로 엇갈려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양림은 드팀없이 근대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길을 선택하였던것이다.

1920년 10월 하순, 일제의 간담을 써늘케 한 청산리대첩을 이룩한후 독립군주력은 우세한 적의 예봉을 피해 흑룡강쪽으로 철수하였다. 독립군을 엄호하는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부분적인 청년들과 함께 상해에 갔다. 당시 상해에는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모여있었고 한국림시정부도 있었다.

양림은 이시기 《북로 아군 실전기(北路我军实战记)》를 저술함으로써 청산리, 봉오동 전투경과를 총화하고 글을 《독립신문》에 련재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애써 덮어감추려 했던 청산리전투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였고 청산리대첩은 조선인민과 피압박인민의 항일투쟁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1921년 4월,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천여리 길을 걸어 운남성 곤명에 도착했다. 운남강무당(云南讲武堂)은 중국의 저명한 혁명가 채악(蔡锷) 장군이 설립한 신식륙군군관학교였다. 1909년에 설립되여 1928년까지 도합 19기를 거쳐 4,000여명 우수한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다.

비록 조선인이였지만 입학성적이 너무나도 뛰여났기때문에 학교측에서는 그를 화교신분으로 입학시켜주고 조선인 신분을 밝히지 말것을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학교에는 일본인교관이 있었고 그때만 하여도 중국은 공개적으로 일본과 맞서지 못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양주평(杨州平)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제1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기능을 습득하였다.

  운남의 강무학당 유적지

곤명시 취호공원(翠湖公园) 부근에 위치한 운남강무학당 유적지는 지금도 주건물이 남아있다. 성 농전관(农展馆)과 성 도서관부근에 강무학당 유적지로 중국 전통적인 주마전각루식(走马转角楼式) 정방형의 2층 건물이 남아있다. 동서남북 네개 부분으로 나뉘여진 건물의 길이는 120메터이고 너비가 10메터였다. 남루와 북루는 학생기숙사로 사용하였다. 남부가운데 두드러진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학생들을 검열하는 열조루(阅操楼)였다. 그리고 동루는 사무를 보는 곳이고 서루는 교실로 사용되였다.

운남강무학당의 사생들은 신해혁명과 호국(护国)운동을 비롯해 손중산의 혁명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일부 우수한 졸업생들은 중국혁명에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학교 3기 병(丙)반에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된 주덕이 있었고 15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인 엽검영(叶剑英)이 있었으며 17기에는 동북항일련군 지도자 주보중(周保中)이 있었다.

17기인 주보중이 회억한데 의하면 양림은 학당의 가장 우수한 학원이였다. 양림은 매일 아침 무거운 벽돌을 지고 10여리 길을 달리면서 체력과 의력을 단련했던것이다. 양림과 함께 공부한 양병령(杨炳岭)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하루는 일본인교관이 학원들에게 총검술시범을 보여주었다. 기본강의를 마친 교관은 누구든지 자기와 겨루어볼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심지어 5분이라도 견지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다.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있던 양림은 거들먹거리는 일본인교관을 보고 더는 참을수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응전해섰다. 학원과 교관의 치렬한 겨룸이였다. 기타 학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양림을 걱정하였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지만 겨룸은 계속되였고 정신을 가다듬은 양림은 공격을 시작하였다. 힘차게 찔러오는 창 끝에 일본인교관은 더럭 겁이 났다. 학원들앞에서 양림에게 패한다면 교관으로서의 얼굴이 없게 된다. 일본인 교관은 급히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겨룸을 끝냈다.

《참, 장하오, 대단하구만.》

양림이 오만한 일본인교관의 기염을 꺾어놓자 학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운남강무학당옛터 비석

 

운남강무당 소개문

운남강무당 학생군 군기

1924년 양림은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고 학교의 교관으로 남아달라는 학교측의 청구를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이시기 손중산의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자기의 군사지식을 혁명에 이바지할 결의를 안고 당시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주로 갔다.

광주에서 그는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중국공산당을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였다. 이시기 양림은 사랑하는 련인 리추악(李秋岳)과 만나게 되였다. 혁명과 사랑에 불타있던 리추악은 애인인 양림을 찾아 천리, 만리 중국의 광주까지 찾아왔던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녀혁명가 리추악(李秋岳 1901--1936)의 원명은 김금주(金锦珠)이다. 1901년 그는 조선 평안남도(平安南道) 중락군(中乐郡)의 한 상인가정에서 태여났다. 상인이였지만 애국사상을 지닌 그의 아버지는 일본침략자들을 한없이 미워하면서 애국지사들의 독립행동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금주는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선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고 맑스, 레닌주의 서적을 탐구하였다. 3.1운동시기 그는 평양 군중집회에 참가했고 시위대오의 선두에서 선동공작을 하였다. 독립활동을 전개하면서 그는 당시 평양 학생운동의 기수(旗手)였던 양림을 알게 되였고 점차 서로 사랑을 맺게 되였다.  

3.1운동후 일제의 피비린 탄압을 피해 양림은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김금주는 계속 평양에 남아서 비밀리에 4년간 반일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감지한 경찰측은 김금주에 대한 체포령을 냈다. 그리하여 1924년 가을, 김금주는 동지들의 엄호를 받으며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서 그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오게 되였고 오래동안 헤여졌던 양림과 만나게 되였다.

당시 양림은 주은래의 추천을 받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사랑하는 두 련인은 드디어 행복한 혁명가정을 이루었다. 양림은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결부시켜 중국혁명의 승리로 조선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혁명대오속에서 장기간 분투할 준비를 하였다. 리추악은 이에 적극 동조하여 부지런히 한어를 배웠고 새로운 중국 이름 리추악을 가지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였고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권립교수)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집훈처 교관으로 되였습니다. 그때 손문주의학회와 청년련합회와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그는 청년렵합회의 립장에 섰습니다.》

1925년 1월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대 제4대 대장으로 임명되였고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그해 2월 그는 학생대(学生队)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동정에 참가하였고 6월에는 다시 광주에 돌아와 양희민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시기 배우고 련마한 군사지식을 실전에서 충분히 발휘하였고 지혜롭고 용감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시기 그는 황포군관학교 기술교관으로 승진하였으며 중국공산당과 함께 교내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1925년 6월 양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고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리추악도 혁명군 선전대로 1차 동정에 참가하였고 이해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추악은 중국공산당에 가장 일찍 가입한 조선녀성이였다. 당의 배려하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고 학습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 때 그는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사업하였다. 이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杨宁)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제3영은 3개 련에 500여명 전사들로 무어졌는데 그중 한개련 150여명이 모두 조선청년들이였다.

국공합작이 이룩된후 혁명정세가 날로 고조되고있을 때 국민당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은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장개석은 이른바 《중산함사건(中山舰事件)》과 《정리당무안(整理党务案)》을 조작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명령을 받고 중산함을 몰고 광주에 들어온 공산당원이며 중산함 함장인 리지룡(李之龙)을 체포하고 공산당이 반란을 준비한다고 떠벌렸다.

이 사건을 통해 장개석은 해군을 장악하고 공산당의 권력을 박탈하려 했던것이다. 그뒤 《정리당무안》을 작성하여 다른 당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수 없다는 등 조건을 내세워 공산당의 권력을 가일층 박탈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당수였던 진독수(陈独秀)가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거듭 타협하고 양도하였기때문에 장개석의 음모는 하나하나 성사되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당의 요직에 있던 공산당원들은 사직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국민당의 선전부장으로 있던 모택동, 중앙비서처 서기로 있던 류백승, 조직부장으로 있던 담평산, 농민부장으로 있던 림백거가 모두 사직하였다.

이때 양림은 당의 배치에 따라 계속 황포군관학교에서 주임교관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어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로씨야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고 리추악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3년간 정치리론을 학습하였다. 두 혁명부부는 로씨야에서 정치, 군사가 모두 뛰여난 우수한 혁명인재로 되기 위해 부지런히 학습하였다.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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