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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답사1]영웅적서사시 - 장정

편집/기자: [ 길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6-14 11:24:15 ] 클릭: [ ]

백절불굴의 사나이

―4갈래 홍군장정의 코스를 답사한 리완빈의 이야기

○ 김인덕

에필로그:

올해는 장정 승리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75년전인 1934년부터 1936년까지 2년간 진행된 홍군의 장정은 인류전쟁사상의 기적으로서 가장 완미한 신화이며 인간한계를 극복하고 온갖 시련을 이겨내여 목적을 이룩한 용감한 도전이며 세계력사상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대장거로서 시대와 국계를 뛰여넘어 널리 류전되고있다.

홍군장정이 승리한 75년래, 전기적색채의 희생과 견인불발한 혁명적영웅주의정신은 시종 중국혁명과 건설에서 성공할수 있는 기초로 되였으며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으로 하여금 누구도 예측할수 없는 미래로 전진하도록 고무하였다.

력사는 진리를 밝혀주는 장명등이다. 진리는 바로 탐구하는자들의 몫이라는 진리를 믿는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장정의 영웅적인서사시를 직접 체험하고 홍군의 정신세계를 본받기 위하여 당년에 홍군이 걸었던 장정코스를 답사하고있다.

그들중에는 리완빈일가가 있다. 리완빈, 남, 조선족, 1959년, 왕청현 왕청진 출생, 연변대학 국제대외무역학부 졸업, 세계태권도련맹 공인 6단, 연변조선족자치주태권도 학회 부회장, 홍군 제1방면군, 제2방면군, 제4방면군, 제25군의 장정로선 모두 답사. 신향자(리완빈의 부인), 녀, 조선족, 1962년 5월, 왕청현 출생, 원 왕청현병원 간호원, 홍군 제25군과 제4방면군의 장정로선 답사, 2차례 장정에 참가. 리휘(리완빈의 아들), 남, 조선족, 1986년 10월, 왕청현 출생, 현 중국인민해방군 군인, 홍군 제1방면군 장정로선 답사, 1차례 장정에 참가.

리완빈은 2004년 10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장장 5년간 4개 장정로선을 모두 답사한 첫 사람이다. 그는 13개성, 8개 소수민족자치주, 100여개의 현, 시, 320여개의 향진을 도보로 경유했다.

리완빈일가의 대장정은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홍군의 불굴의 정신을 본받아 불가능에 도전한 인간한계의 극복과정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리완빈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그중 장정을 연구하는 미국학자 교봉은 《리완빈을 알게 되여 기쁘다. 리완빈은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의 꿈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라고 리완빈을 높이 평가하였다. 리완빈의 사적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비롯한 많은 매체에서 대량 보도하여 세간의 화제로 되고있다.

제1부 제1차 장정

영웅적서사시―장정

1930년대 중국의 4억 5천만의 인구중 80%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그들 대부분은 소유지가 없고 땅주인의 전답을 부쳐 연명하였다. 20세기 30년대이래 중국에서는 련속 몇해동안 천재, 인재가 들이닥쳤다.

1931년, 장정류역에서는 대홍수가 폭발하고 1932년, 감숙성 창마보(昌马堡)지역에서, 1933년에는 사천성 모현(茂县)에서 강렬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더욱 엄중한것은 1933년에 황하에 큰물이 져 근 3백만에 달하는 리재민이 발생하였다.

해마다 들이닥친 자연재해와 함께 중국근대사에서 규모가 제일 큰 군벌혼전이 발발하여 국토는 갈가리 찟겨진채 사분오렬되여 지방군벌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되였다. 한켠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이고 다른 한켠은 염석산, 풍옥산이 이끄는 군벌이였다. 군벌혼전은 몇년동안 계속되였고 전선은 몇천킬로메터나 되였으며 10개도 넘는 성(省)이 혼전에 말려들었다. 이로 하여 몇천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였으며 군벌혼전이 시작된 첫 5개월에 사망한 군인만도 30만명이 넘었다.

군벌들은 방대한 군비지출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서 갖은 가렴잡세를 거두어들였는데 1936년에 내야 할 세금까지 미리 받아들였다. 이렇듯 나날이 쇠락하고있는 국토에 사람들이 동경하는 아름다운 곳이 몇 곳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곳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중국공농홍군이 창립한 쏘베트구역이였다. 쏘베트구역에서는 보편적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이는 중국력사상 류례가 없는 일이였다.

전반 쏘베트구역중 제일 큰 쏘베트구역은 모택동과 주덕이 창립한 강서성 남부, 복건성 서부, 서금을 중심으로 한 중앙쏘베트구역이였다. 중앙쏘베트구역에서는 농업이 온당하게 발전하였을뿐만아니라 여러가지 생산이 날따라 발전하여 인민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있었다. 이는 날로 피페해지고있는 국민당과 군벌들이 통치하고있는 구역과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당시 쏘베트구역에는 의약공장, 사탕공장, 담배공장 등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대회무역도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동시에 쏘베트구역에서는 정치상에서 민주제도를 실시하였다. 당시의 중국공산당의 리상은 쏘베트구역을 공고히 하고 홍군을 확대하며 장개석의 반동통치를 뒤엎어버리고 인민이 주인된 공화국을 창립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생활과 홍군의 승리는 쏘베트구역을 지켜내지 못했다. 대지주, 대자산계급의 리익을 대표하는 장개석정권은 쏘베트구역의 존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1930년말부터 장개석은 대군을 인솔하여 쏘베트구역에 대해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당시 여러 쏘베트구역의 모든 홍군을 합해도 20만명을 초과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 쏘베트구역은 국민당통치구역에 의해 여러 곳으로 나뉘여있어 서로 작전지원을 고사하고 련락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였다. 하지만 국민당군대와 중국공산당을 반대하는 군벌들까지 합하면 군인수가 200만명도 넘었다. 그들은 땅크, 비행기, 대표 등 선진적인 무기들로 무장한 정규군이였다. 적이 강하고 홍군이 약한 상황에서 홍군은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후퇴하고 적이 둥지를 틀면 우리는 발편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때리고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반격한다. 큰 폭도의 운동전을 벌려 적을 깊숙이 유인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각개 격파한다.》는 유격전술을 썼다. 홍군은 이런 정확한 운동전술을 운용하여 국민당의 제1차, 제2차, 제3차 《포위토벌》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933년 9월 하순, 장개석은 100만 군대와 200여대의 비행기를 투입하여 홍군의 각 근거지에 대하여 제5차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왕명의 《좌》경교조주의의 착오적인 령도로 말미암아 중앙홍군은 국민당군대의 제5차 《포위토벌》을 타파하지 못했다. 하여 중앙홍군은 핍박에 못 이겨 2만 5천리 장정을 개시하였다. 1934년 10월 10일 저녁 6시 12분, 중공중앙, 중앙군위는 홍군주력 5개 군단 및 중앙, 군위기관과 직속부대 총 8.6만명을 이끌고 각기 서금(瑞金), 악도(鄂都)지구에서 출발하여 전략적 대전이를 실행하였다. 홍군의 최초의 계획은 남부로선을 따라 광동군벌의 봉쇄를 돌파하고 호남성 서부로 이동하여 홍군 제2, 제6군단과 회합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당시 림시중앙의 지도자들은 퇴각중의 도망주의착오를 범하여 홍군이 비록 영용하게 작전하여 련속 적의 4갈래 봉쇄선을 돌파하였지만 홍군의 손실도 매우 심중하였다. 적의 네번째 봉쇄선을 돌파하고 상강(湘江)을 건널 때 홍군부대는 8만명으로부터 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1934년 1월 7일, 홍군은 귀주성 북부의 준의를 점령하였다. 준의회의는 모택동동지의 정확한 령도를 확립하였다. 이때로부터 홍군은 새로운 생명을 다시 찾고 정신을 분발하여 중앙군위의 지휘하여 기동령활한 운동전을 전개하였다.

홍군은 2년간 2만 5천리의 강행군을 진행하면서 평균 매일 한차례의 조우전을 치렀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지났는데 그중 5개의 산맥은 사계절 눈이 녹지 않는 설산이였다. 또 24갈래의 강을 건너고 12개의 성(省)을 경과하였으며 62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매일 평균 71리의 길을 걸었다.

홍군은 장정과정에 비록 남방 원유의 근거지와 매우 많은 홍군을 잃었지만 중공공산단과 홍군의 골간을 보존하고 단련시켰으며 연도에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

모택동은 장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장정은 선언서이며 장정은 선전대이며 장정은 파종기이다.》, 《장정은 우리가 승리하고 적이 실패하는 결과로 결속되였다.》

장정은 중국혁명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예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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