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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새 터전 새 삶 찾아》순방일지9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12-26 10:29:58 ] 클릭: [ ]

 (광주ㅡ북경ㅡ장춘ㅡ연길)

불산시 벽계원 일각

11월 5일부터 6일까지 기자는 화룡시 팔가자태생인 한철씨의 안내로 광주시에서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집거하고 있는 삼원리와 휘교신성부근을 돌면서 조선족들의 생활정황을 료해하였다.

1841년 아편전쟁시기 삼원리항영투쟁으로 소문난 삼원리는 광주시 북쪽 시교에 자리잡고 있는데 1987년에 촌으로부터 가두로 승격 현재 상주인구는 8.5만여명이며 그중 외래인이 2만여명이다. 시교지만 광주역과 백운공항과 거리가 가깝고 집값이 눅어 광주에 온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되였단다. 하지만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원경로부근의 집값은 해년마다 껑충껑충 뛰여올라 처음보다 두배 세배가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새로 자리를 옮겨 집거하기 시작한곳이 원경로에서 5분거리에 위치한 휘교신성이다. 

30대의 한철씨는 광주에 온지 2년 되는데 친구와 함께 물류회사를 꾸리고 있었다. 그의 소개를 들으면서 몇몇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광주에 온지 10여년 되는 분들도 있었지만 가게를 경영한지는 2~3년 되는 분들이 많았다.

강남일번지 박채순 사장

 《이전보다 장사가 잘 안된다고 봐야죠~》 삼원리 원경로에서 강남일번지(한국료리전문)를 경영하고 있는 박채순 사장은 2~3년전에 비해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 지식청년시절 일을 잘해서 한문판 길림일보에 사적이 등재된적이 있는데 이렇게 광주땅에서 길림신문의 기자를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거듭 치하한다. 광주에 온지 12년이 되는 박사장은 한국회사에서도 일하고 식당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는 분이였다. 타지역보다 로임이 높은 광주에서 식당일을 거들어주어도 3천원씩 받을수 있어 많이 편했는데 일하면서 자기절로 가게를 차려야겠다는 욕심이 들더란다.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린것은 2006년도. 현재 가게를 두배로 확장하고 직원도 더 많이 쓰지만 수입은 이전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광주와 심수에 있는 기업가들을 만나보려고 전화를 련락해보니 모두 회의차로 북경에 갔다고 한다. 7일과 8일 이틀간 북경에서 《2009년(제1차)중국조선족정재계고위층경제포럼》에 참가한다는것이다. 그래서 본사에 련락해보니 유경봉기자를 파견한 상태다.

북해와 곤명, 장가계 등지도 원래는 이번 순방취재 범위에 들었으나 빠듯한 취재경비 때문에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북경에 동료기자들이 와있다니 마음은 어느새 북경에 가있었다. 아마 혼자서 뛰는 생활에 질려서인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고 천천히 떠나라는 친구를 뿌리치고 서둘러 오후 3시 9분에 발차하는 T14 렬차에 몸을 실었다.

9월 23일에 연길을 출발하여 11월 6일 광주를 떠나기까지 40여일간 줄곧 따스한 가을과 여름을 보낸 기자는 다시 북쪽을 향해 겨울을 가게 되였다. 2308km를 22시간 달려서 이튿날 오후 한시쯤에 도착한다고 한다. 남방의 렬차가 북방의 렬차에 비해 빠르긴 빠르구나하고 생각했다. 연길에서 북경까지 1618km를 23시간 소요하는것에 비하면 가히 짐작할수 있다. 북경에 있는 친구들한테 도착시간을 알리고 침대에 누워 광주역에서 산 《두월생전》을 펼쳐들었다. 책은 펼쳐들었으나 내용은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난 40여일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오가고 앞으로 북경에 가서 어떻게 취재를 할것인가하는 근심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국제방송에 있는 친구와 북경중심호텔의 강하연 사장, 그리고 북경에 있는 박광익 특약기자가 고맙게 북경에서의 취재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걱정할것도 없었지만 첫 북경행이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저녁 6시가 되자 배가 고파온다. 캔맥주를 3개 사서 후다닥 마셔버리고 라면을 주문해서 먹고나니 잠자기 알맞춤했다. 2층 침대에 오르는데 아래층에 있던 한족친구가 말을 걸어온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 사람인가를 물어오기에 그냥 사실대로 대답했더니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조선족은 춤 잘추고 노래 잘하는 깨끗한 민족이라는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서법을 하는데 연변에 세번 다녀갔단다. 연변의 찰떡이나 개장국, 진달래까지 아는것을 보면 조선족생활을 꽤 많이 료해한 사람이다. 그때까지 기자는 짧은 소매에 여름바지차림이였는데 춥지 않는가고 관심조로 묻는다. 동북에 비하면 여름이라고 말해서 웃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깨여나니 날이 밝아온다. 밤새 렬차는 장사, 악양, 무창, 주마점을 지나 정주를 지나고 있었다. 안내방송은 석가장에 도착하는 시각을 알리고 있었고 밖을 내다보니 일망무제한 하북평원은 가을보리로 푸르다. 아침도 라면으로 대강 에때우고 다시 자리에 누워 《두월생전》을 펼쳐들었다. 빈손의 혈혈단신 14세 고아로부터 상해의 청방우두머리로 흑세력의 거두로 발돋움하여 상해의 경제, 금융, 해상운수, 방직, 량식, 언론, 정치를 두루 한손에 장악한 두월생과 빈손으로 연해지구 대도시들에 진출하여 자기의 근면과 지혜로 경제적부와 사회적부를 쌓아온 조선족들의 형상이 엇바뀌면서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강소천사 출신의 두월생은 상해진출 20년만에 청방의 2호인물로 발돋움하고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 조선족들은 관내진출 10여년만에 각 도시들에서 일정한 사회적지위와 경제적지위를 얻었다. 이제 다시 십년이 지나면 그들의 사회적지위와 경제적지위는 어떤 위치에 있을가 이런 생각도 해보면서 게임도 안되는 비교를 한다고 자신을 웃었다.

석가장을 지나니 오후 한시반이 되여 북경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스피카에서 흘러나온다. 아직도 세시간을 가야 한다니 지루한 감도 있고 그래서 한 침대칸의 한족들과 이말저말 주고받는데 전날 저녁 기자와 말을 나누었던 서법가 장경도씨가 조선족에 대해 많이 설명해주었고 또 축구를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이 연변팀을 통해 조선족에 대한 일정한 료해가 있어 그런대로 많은 공동화제가 있었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들의 관내진출과 그들의 생활정황에 대해 본대로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북경에 가서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들의 생활정황을 료해하게 된다고 말하자 그들은 그냥 엄지손가락만 내든다. 대단하다는것이다. 동북3성에 집거하여 농경생활을 하던 조선족들이 연해지역 대도시들에 진출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말하니 언어가 통하는 한족들도 연해도시 진출이 그렇게 어려운데 소수민족으로서 수십만명이 연해도시에 진출한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고 말한다. 13억이나 되는 대국에서 192만명은 창해일속이나 다름없다.

기자가 생각나는대로 조선족명인들의 이름을 주어대니 그들은 눈동자는 점점 커질뿐이다. 리여송, 장보고 등 역사인물로부터 무정, 양림, 정률성 등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시기의 대표적 인물들과 조남기, 리덕수 등 정치계인물들, 최건, 최영원, 남용, 《청장고원》의 작곡자 장천일과 바둑기사 박문요, 송용혜 등 그들이 알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서 이들이 다 조선족이라고 말하니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렬차에서 만난서법가 장경도씨

장경도씨가 연변과 단동에서 보고들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족에 대한 자기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후에 시간이 되면 연변에서 만날것을 약속한다. 석가장을 지나면서 렬차안이 추운감이 들어 준비해간 겨울옷을 갈아입었다.

드디여 한시반이 되고 북경역에 도착하였다. 연변대학조문계를 졸업하고 국제방송국에서 일하는 김호림씨가 마중나와 있었다. 20년만에 다시 만난 친구라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밖에 나오니 박광익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경에 있으면서 우리 신문에 기사를 많이 보내오는 반가운 분이였다.

김호림씨의 련계로 북경애심네트워크에서 펼치는 사랑의 바자회를 다녀오고 북경 조양구 망경 리택서원에 자리잡고있는 북경중심호텔의 강하연 사장을 만나 행장을 맡기고 점심삼아 저녁삼아 부근의 뀀점을 찾았다. 망경부근은 북경에서 조선족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곳인데 1~2만명은 될것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연길시의 어느 거리를 방불케 하는 우리글 간판이 총총했다.

중심호텔에서 바라본 풍경

이튿날 아침에 바라본 풍경, 북경의 겨울을 느낄수 있었다.

8일에 김호림씨의 소개로 IT전문가 김호씨, 북경시마약수사대 대장 박성국, 중화서국 편집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정령퇴직한 정인갑교수를 각각 만났다. 9일에는 유경봉기자와 함께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북경총대대 군악단에서 대장으로 있는 황기연씨를 만나 취재하고 저녁에는 북경중심호텔의 강하연사장의 안내로 연길에서 식당을 경영하다가 북경에 와서 아들과 함께 대원민박을 경영하는 김영애(56)씨를 만난다음 다시 북경시 조양구 망경신촌의 지하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고있는 조선족들을 찾아보았다.

김영애 사장이 기자들에게 대원순대를 맛보라고 상을 차리고 있다.

이튿날에 느직이 일어나 취재일정을 잡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연길로 돌아가는것이 더 편할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북경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생활정황은 그런대로 언론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졌고 또 기자가 북경에 오기전에 이미 많은 기자들이 다녀간 곳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련락이 있던 중앙방송국 조선어방송 전금화기자한테 북경에 왔으니 간단히 만나자고 련락을 했다. 박청죽 아나운서와 리영실기자를 비롯한 방송국일군들을 만나고 그날 저녁 5시 30분에 출발하는 D23호 동차조로 장춘으로 출발했다. 처음으로 타보는 동차조였는데 시속 200km~280km고 호로도북역과 심양북역에 잠간 정차할뿐 쉬임없이 달린다. 장춘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 편집국의 최승호국장이 나와 있었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은 여기서 더 서술하지 않겠다.

지난해 한국에 가서 《방취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현장글을 써왔고 다시 올해 《조선족 새 터전 새 삶》이라는 쩨마로 12개 도시를 돌아 보았다. 192만 3천 4백여명 조선족이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지구촌을 주름잡으며 떳떳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 감탄부호를 가첨하고 싶었는데 진짜로 감탄하고 감개무량할것은 그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 그 자체임을 페부로 느꼈다.

그대가 조선족임을 떠나 지구촌 인간사회의 한개 조성부분으로 될때 또 필자가 여기저기 타향을 떠도는 조선족의 삶이 아닌 질적으로 향상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선족의 삶을 추적할 때, 그때라야만 진정 우리는 자랑찬 조선족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겠는가?

[후기] 9월 23일에 출발하여 11월 11일에 연길에 도착하였으니 50여일이란 시간을 타향에서 보냈다. 이번 순방취재를 통해 그냥 좋은 신문기사를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중국이란 대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중국조선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것이 초심이였다.

외지에서 취재에 딸리고 그날그날 글을 쓰느라 빠뜨린 부분들이 많아서 며칠간 수정을 하였고 또 그사이 밀린 일들때문에 이때까지 순방일지의 마지막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주변의 독자들이 재촉해서야 이렇게 다시 필을 들게 되였음을 알린다. 사실 이런저런 사정외에도 인터넷길림신문과 길림신문지면에 과분할 정도로 필자를 대서특필하기도 하고 전문란을 설치하여 순방취재기사들을 다루고 있어 한 일보다 받은 치하가 큰 느낌에 그냥 송구스러워서 감히 글을 써내려가지 못했음을 밝힌다. 취재를 하였지만 아직 기사가 나가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짬잠이 시간을 내여 완성할것을 약속한다. 

여기서 신문사의 믿음에 감사를 드리는 동시에 이번 순방취재에 큰 지지와 도움을 준 연태옥타지회 신성만 회장과 강만덕 사무국장을 비롯한 여러 옥타인들, 문등삼성회사에 근무하는 변승환경리와 문등시 대외무역국 옥문덕국장, 연변일보사 청도지사 허강일사장, 청도녀성협회, 일조현대위아 리정섭씨, 상해의 강설화 후배를 비롯한 등불회 송명한 회장, 상해녀성기업가협회와 김철, 최광원 등 제자들, 상해영숙민박, 의오에서 만났던 김영호사장과 리경철 선생님, 광주와 심수에서 만났던 량성춘씨, 북경에서 스케줄을 빈틈없이 잡아준 김호림씨와 북경중심호텔의 강하연사장 그리고 박광익 특약기자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못난 글들을 읽어주신 여러 독자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순방취재를 위해 아무런 요구도 없이 사심없는 경제적지원을 해준 친척과 친구들에게 고개숙여 감사를 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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