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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목사에서 온 조선족부부를 만나다

편집/기자: [ 김태국 전광훈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9-26 11:26:58 ] 클릭: [ ]

연태인동화재생자원유한회사 강만덕 총경리.

흑룡강성 가목사시 농촌마을인 금성촌에서 태여난 강만덕은 어린 시절 신분이 지주로 획분되였던 할아버지때문에 남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닥 유쾌하지 못한 동년시절을 보내였다.

청년시절도 계급투쟁의 상대로 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도 총명하고 공부를 잘 했던 덕에 촌에서 단지부서기를 맡아하면서 당지 신문지상에 통신도 부지런히 썼다. 그러다 1977년 대학입시가 회복되자 강만덕은 대학입시에 단연 참가하였다. 그 시절 구지욕에 불탔던 젊은이에게 있어서 성분여하를 불문하고 대학입시에 참가할수 있다는것은 그야말로 가물에 단비였다. 강만덕은 신문글을 쓰던 재간과 취미를 바탕으로 문과에 지망하고 싶었으나 문과보다는 기계학을 전공해 한뉘 살아갈수 있는 재간을 익혀두라는 형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기계학교에 진학,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하였다.

사업에 참가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던 강만덕에게 연태에 올 기회가 차례졌다. 1993년도 막 가는 때에 그는 조직의 수요로 연태 교통위원회(교통국)에 전근해왔다. 그가 왔을 때 조선족은 별반 없었다. 정부계통에는 한사람도 없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자체로 들어온 사람이 얼마간 있었을뿐이였다. 그런데 동북에서 연태에 온 사람(한족, 조선족 포함)들이 크고 작은 일을 자주 저질러서 연태시 정부와 시민들은 동북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민족이 다른 조선족을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는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것이였다.

이런 외계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강만덕은 한국 부산의 한 회사와 중국 모 회사사이 해상통상운수계약 수석번역을 맡아하였다. 외국 상공인을 연태에 불러들여 연태경제에 도움을 주려는것이 그 당시 강만덕의 량심이였다. 그러나 곁사람들은 조선족과 한국인이 합작해 한족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억측을 하며 뒤공론에 열을 올리였다. 원래 성격이 강직한 강만덕은 1년을 사업하고 교통위원회 《철밥통》을 부수어버리고 좀 더 자유롭고 편하게 살려고 하해를 단행하였다. 하해를 한 강만덕은 검지회사(합작회사) 회사장 조리로 있으면서 다른 사업도 더러 해보았다.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거리도 가깝고 언어소통도 무난하기에 강만덕은 눈길을 한국에 두었다. 물론 자습으로 어렵사리 얻은 일본어자격시험통과 경력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일본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선후로 한국, 일본에 나가 고찰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환경보호의식을 보아낸 강만덕은 환경보호시설에 투자해보기로 하고 한국진출을 탐색해나갔다. 그는 친구들 넷과 함께 의기투합을 하였다.

그때 일을 두고 강만덕은 이렇게 말머리를 연다.

《실패는 많이 했지만 해놓은 일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얘긴데, 2005년 우리 다섯이 힘을 합쳐가지고 오신(5신)재생자원회사 설립하고 다섯 사람이 각각 20% 주식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한국 가서 한국재활용회사와 합자해 회사를 한국에 두고 쓰레기처리공장을 꾸리기로 한거지요. 한국돈으로 4억정도 투입했습니다. 우리 측은 3억투자에서 4억으로 추가 투자했지만, 한국에서는 원 투자는 12억인데 1억도 투자해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회사가 시작도 못한채 망해버리게 된거지요.》

그번의 실패를 두고 강만덕은 실패의 원인을 단순하게 한국에만 몰아붙이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모국에 갔지만 내 나라는 아니라는것이 강만덕이 그번의 실패에서 얻어낸 가장 큰 교훈이였다. 그리고 손쉽게 돈을 벌려 했던것이 아주 큰 착각이였다고 강만덕은 말한다. 톤당 정부에서 13만원을 준다데에 혹해 욕심만 부리고 기술적으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단진출을 한것이 무모한 도전이였다고 도리머리를 젓는 강만덕, 그는 한국인에 대한 의뢰심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우리 조선족들의 근성을 꼬집는다. 우리 힘으로 해야지 누구한테 의뢰하려는것은 착오중의 착오라고 강만덕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물론, 한국인들이 앞뒤처리를 잘 배려해주지 못한것도 문제다. 그러나 그것보다 문제되는것은 우리의 과욕과 자만이였다고 강만덕은 그번의 실패를 총화한다. 300여만원의 학비를 내고 소중한 교훈을 산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지만 실패한 사람은 고통이 심해요. 그러나 그것도 어찌보면 성과일수가 있죠. 우리는 3백만원가량의 돈을 처넣었지만, 한국인에게 당한것이 아니라 너무 기대가 컸고, 기대가 클수록 심하게 떨어졌을뿐이죠.》

한국에서의 사업을 끝으로 강만덕은 눈길을 다시 중국에 돌렸다. 중국이라는 이 대국에 재활용할수 있는 쓰레기도 더 많은데 왜 한국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만족을 모르는 강만덕은 새로운 출발을 꿈꾸었다. 그는 마음도 정리할 겸, 새 정보도 얻을 겸 상해, 북경 등 대도시들을 두루 답사하였다. 그때까지만도 우리 나라는 재활용품에 그닥 중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시장인가?

강만덕은 다시 다섯 사람이 공동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한차례 참담한 실패를 했지만 거기에 물앉아버릴 그가 아니였고 그의 친구들이 아니였다. 우리말로 교육을 할수 있는 학교가 있는 따뜻한 동네를 꾸리려고 한국에 진출했던 다섯은 기대했던 조선족을 위한 사업이 하루 아침에 이슬로 사라졌다고 해서 누구도 서로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뿐이였다. 친구끼리 동업하는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힘을 합쳐야만 이겨나갈수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조선족 사업을 위해 여러 기업체를 모아 련합체도 꾸려놓고 있는 그들은 새 기업의 시작은 다섯이서 하고 성공한 뒤에 나머지 기업인들을 불러들여 공동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이것은 강만덕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3~5년새에 일어나 알뜰한 조선족 동네를 만들고 자녀교육도 제대로 할수 있게 하자는것이 그들 다섯사람과 연태 량심을 가진 조선족 기업인들의 꿈이다.

《조선족은 단결해야 하고 함께 하는 세상이 되여야 한다. 흩어져 사는것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망치고 나아가서 민족에게 치욕을 안겨줄수 있다. 이제 더 나이가 들고 돈을 벌면 조선족이 집중된 연길에 가서 살고 싶다. 연변의 조선족이 적어질수록 우리 민족의 위상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 어떤 민족이든 마음속에 기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강만덕(54세)은 지금 연태인동화재생자원유한회사(烟台仁同和再生资源有限公司) 총경리, 연태옥타(해외한인무역협회) 사무국장, 연태중정공정기계설비유한회사(烟台中鼎工程机械设备有限公司) 총경리직을 맡고 있다. 그가 노리는 중국시장개척의 첫 스타트는 쓰레기처리에 적격인 고효능의 집게차(中鼎车载抓吊)로 시작할 예정이다.

남편과 함께 연태에 전근해온 안해 박월영(52세)녀사는 지금 남편이 하는 사업을 각별히 두둔하고 도와주고 있다. 남편의 사업에 뒤심이 되여주고 한팔이 되여주는것이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여서 괜찮다고 한다. 현재 개발구에 위치한 연태그랜드호텔의 총경리직을 맡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녀는 가끔씩 이전의 친구들이 진급을 한것을 보면 남편을 따라 하해한것이 후회되기도 하지만 그대신 사회를 알고 세상을 알게 되여 기쁘다고 맑게 웃는다.

《딸은 어려서부터 한족학교에 다녔지만 우리말의 일반적인 생활용어는 그런대로 하는데 사회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상태예요. 그러나 다행스러운것은 스스로 한국 련속드라마를 보거나 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는것이죠.》

이것이 바로 연태에 진출한 한 가목사 조선족부부의 진실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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