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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연변] 그립다, 연변대학 그리고 나의 연변동창들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9-20 09:38:31 ] 클릭: [ ]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오래된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여 추억으로 남는다. 비록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가끔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몇장 안되는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지나간 과거를 얼핏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행복감에 스며들 때가 있다. 해마다 돌아오는 대학입시와 그리고 ‘9.3' 날이면 나의 머리 속에는 연변과 연변대학 그리고 연변의 동창들이 떠오른다. 산재지구의 조선족으로 연변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던 4년, 연길공원에서 그렇게 많은 조선족들이 모여 ‘9.3' 명절을 경축하던 모습을 목격하고 큰 감동을 먹은 게 엇그제 같은데 벌써 30여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참으로 빠른게 세월이다.

“연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저자 장만수선생.

산재지구의 조선족인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씩 들었으며 그후 커가면서 우리 민족의 력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 고장에서도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가 한창 류행되였는데 나는 비록 조선말을 거의 몰랐지만 우리 민족 언어로 부르는 연변가수의 노래가 그렇게 마음 속으로 정겹게 다가왔다.

8월이 막가는 어느날 마을에 오래만에 대학생이 나왔다고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행장을 챙겨가지고 연변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안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렬차로 10여 시간을 달려 연길역에 도착해 난생 처음으로 이곳 땅을 밟게 되였다.

연변에 와서 생각지도 못하게 처음으로 부딪힌 난제는 언어였다. 산재지구에서 생활하고 또 소학교부터 줄곧 한족학교에 다니다보니 조선말을 거의 모르고 자란 나에게는 조선어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연변학생들은 거의다 조선어로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들은 내가 조선어를 힘들어하는 것처럼 한어로 교류하기 어려워하는 모습들이였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어떤 학생들은 대학에 오기전까지 한어를 몇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연변친구들과 교류할 때면 제일 표준적인 한어를 천천히 구사해야 했으며 동북사투리 한어말을 했다가는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번은 연변친구에게서 책을 빌리고 이틀 후에 돌려준다고 약속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사흘 째 되는 날에 책을 찾으러 왔다. 내가 아직 다 읽어보지 못했다고 하자 그는 네가 이틀 빌린다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따지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한어에서 ‘이틀 보겠다(看两天)'는 뜻은 딱 이틀이라는 뜻이 아니라 며칠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화룡 팔가자에서 온 나의 연변친구 홍동학은 이런 울지도 웃지도 못할 거짓말 같은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력사를 배우는 우리는 고대한어는 필수과목이였으며 연변적 학생들에게는 제일 큰 어려움이기도 했다. 어느 한번 시험 때 고대한어로 된 문장을 현대한어로 풀어쓰는 시험문제가 나왔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나는 답안을 종이쪽지에 적어 홍동학에게 슬그머니 넘겨주면서 다 본 후에 훈춘에서 온 서동학에게 넘겨주라는 글을 남겼다. 그런데 아차 글쎄 이 홍동학이 그 말까지 답안인가 해서 시험지에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다 적어넣을 줄이야! 얼마후 고대한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 이 말을 꺼내 우리는 교실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관대한 용서가 힘이 되여서 연변동학들은 더욱 분발해서 고대한어를 학습했다. 가석하게도 나의 연변친구 홍동학은 웃기고 슬픈 이야기만 남겨둔 채 오십 중반에 백혈병으로 갑자기 저세상 사람이 되여 다시 만나서 그때의 옛말을 영원히 나눌 수가 없게 되였다.

연변대학에서 4년 공부하던 시기 대학교 바로 동쪽에 자리잡은 연길공원은 매년 자치주 창립일인 9월 3일이 되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 전통복식인 조선족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들의 모습이 제일 환하고 아름답게 안겨왔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가족, 단위와 가두, 마을 혹은 친구들끼리 오붓하게 둘러앉아 각자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온 음식들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흥이 오를 무렵 북장고에 맞춰 노래와 춤판을 벌였다. 산재지구에서 온 나로 놓고 말하면 이런 민족특색이 다분한 정경을 볼수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였으며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부모님을 모시고 ‘9.3' 명절에 꼭 한번 연변을 찾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은  비록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생활하고 있지만 인터넷이 발달해 연변에 대한 소식을 수시로 알 수 있다. 연변에 다녀간 려행객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지금의 연변은 전국 각지를 잇는 하늘길이 열리고 고속철까지 통해 교통이 더없이 편리해졌다. 외지의 관광객들은 연길에 왔다가 이곳 사람들의 문명의식과 례의, 민족특색이 짙은 깨끗하고 입맛을 당기게 하는 음식, 도처에서 들리는 우리 민족 말과 거리의 조선말 간판들을 보면서 마치 외국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다.

연변대학에서의 4년 생활은 비록 짧은 시간이였지만 산재지구 조선족인 나에게 연변과 연변동창들을 알아갈 기회를 주었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올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니 더욱 연변땅을 한번 밟아보고 싶다. 연변에 가서 모교를 거닐어보고 그리운 연변동창들과 함께 ‘빙천' 맥주에 명태를 안주로 대학시절의 회포를 진하게 나누고 싶다.

/장만수(현재 한국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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