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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연변]연변땅에서 일궈낸 보람찬 삶의 행복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8-25 10:27:58 ] 클릭: [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기념 기획보도

정성다해 리발하고 있는 저보안

안도현 명월진의 중심가에 자리잡은 ‘파미 리발점'(波美理发)에 가면 보기 좋은 키에 준수하게 생긴 한 미발사가 찾아오는 고객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솜씨가 잽싸고 리발을 잘한다는 소문으로 해서 단골손님이 많은 이 미발사가 바로 올해 올해 54세인 저보안(褚保安)이다.

저보안은 원래 호북성 광제현 매천진 횡강향 하조촌 (广济县梅川镇横岗乡下赵村)에서 살았다. 그런데 집이 너무 구차하여 밥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연변이 고향보다는 생활하기가 더 낫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왔다. 1982년 7월 24일, 저보안은 안도에 있는 먼 친척벌되는 할아버지를 바라고 14살, 어린 나이에 혼자 기차를 타고 련며칠동안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산설고 물선 안도에 도착했다. 그는 할아버지 댁에 얹혀 살면서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호북에서 사는 고모가 공부비용을 대주었다. 그런데 그가 온지 불과 한달만에 아버지처럼 믿고 살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그래도 고모가 계속 도와줘서 고중까지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쳤지만 몇점 모자라서 못 가게 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할머니마저 세상떠서 있을 집도 없게 되였다. 그때 안도에서 리발점을 경영하고 있던 오촌 고모가 이렇게 권고했다.

“내 리발관에서 살면서 나한테서 리발기술을 배우거라. 잘만 배우면 밥 벌이는 문제없을거다. 넌 어릴때부터 눈썰미가 좋고 또 끈질긴 성미잖아? 네가 배우면 꼭 잘 해낼거다.”

그때 조보안은 어려운 상황에서 ‘설중송탄'격으로 따뜻한 손길을 펼쳐주는 고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당시 재학을 해서라도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똑같았으나 농촌에서 사는 장애인인 부모가 뒤바라지를 할 형편이 못 되여 결국은 대학꿈을 접을수 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 고향 호북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미 연변땅에 정이 든지라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1987년부터 저보안은 고모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리발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약간만 주의하지 않고 손을 잘못 놀리면 머리가 잘못 깎이워졌다. 그러면 손님이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할리 만무했다.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노력했더니 차차 손에 익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심히 기술을 련마하다가 2년후에 세집을 맡고 독립적으로 리발을 시작했다. 얼굴에 애티가 다분한 스무두살의 나이로 자영업을 꾸리고보니 매일매일 일터로 나서는 것이 설레였고 미래를 향한 꿈도 수풀처럼 자라났다.

고향떠나 타향에서 자립의 터전을 꽁꽁 다지여 간다는것이 어찌보면 꿈이 아닌가 싶었다. 꼭 대학에 가야만 출로가 있는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열중하면 어느땐가는 꼭 성공한다는 리념을 그때 저보안은 마음속 깊이 아로 새겼다.

저보안과 안해 최희하

1992년, 그는 다른 사람의 소개로 타향에서 리발업에 종사하고 있는 최희하를 만났다.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한 처녀인데다가 같은 업종이라 더구나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매일매일 손맞추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손님이 그 어느 시간에 와도 다 받아 주었고 동네사람들이거나 로인들의 리발비는 절반만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달콤한 잠에 빠진 한밤중에 차사고 혹은 싸움으로 머리를 수술받아야 할 환자의 가족이 찾아오면 불평 한마디 없이 머리를 깎아주러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그 차수가 얼마인지 모른다.

손님이 많을때면 진종일 서 있는것으로해서 다리가 뻣뻣해나고 손도 부어났지만 돈이 점점 불어나는 재미와 날로 무르익는 치부꿈으로 해서 일해도 힘든줄 몰랐다. 만족스런 얼굴로 리발관 문을 나서는 손님을 볼때면 온갖 피로가 사라진것 같았고 하는 일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였다.

저보안 부부의 착한 심성 그리고 근면한 정신과 고객에 대한 살뜰한 봉사정신은 뭇사람들의 칭찬을 자아냈다. 누구나 한번 오면 단골손님으로 되였고 또한 휴식일이면 몇십리, 지어는 백리길로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고객들도 있게 되였다. 이같은 단골손님들은 저보안의 높은 미발기술과 고객에 대한 따뜻한 사랑, 살뜰한 봉사태도와 갈라 놓을수 없다.

익숙하고도 고르롭게 들리는 가위질로 해가 가고 달이 가면서 눈덩이 굴리듯이 살림도 펴이여 커다란 아빠트도 마련했고 아들도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지금 저보안의 아들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중경에서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연변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것에 어떤 소감이 있는가고 물었을때 저보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바로 연변사람이 된 것입니다. 금방 연변에 왔을 때는 기후에 좀 습관되지 않아서인지 불편했는데 지금은 더운 고생도 안 하고 또한 공기도 특별히 청신하고 수토도 좋은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갓 왔을 때에는 단층집들뿐이였는데 지금 연변은 가는 곳마다 층집들이 수풀처럼 땅을 차고 일어섰고 아스팔트길이 가로 세로 뻗어져 있는가 하면 고속철도도 부설되여 교통이 아주 편리합니다.  도시환경이 더없이 깨끗해졌고 사람들의 문명정도가 날로 제고되고 있지요. 정말 변화가 큰 연변입니다. 저는 40년동안 연변에서 살면서 인제는 진짜 연변의 산과 물 그리고 인정에 푹 빠져 들었습니다. 연변의 산은 그 어데보다 푸르고 연변의 물도 그 어데보다 맑고 연변사람들의 례의와 자질도 아주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습니다. 리발한후 돌아갈 때 깍듯이 인사하는 사람,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온 조선족부모들이 돌아갈 때면 아이에게 머리숙여 인사시키는데 정말 탄복이 갑니다. 연변사람들은 매우 깨끗하고 문명하고 우수하다고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익숙한 단골손님들에게  리발값을 절반만 받을라치면 ‘이 일이 당신의 ‘밥통'인데 그러면 안되지요’하면서 꼭 제대로 내놓군 합니다. 우리 부부가 바삐 도는 걸 보고는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연변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정신에 많이 감동받고 있습니다. 저는 늘 고향친구들한테 연변자랑을 많이 합니다. 인제 그 누가 날 쫓아내도 저는 절대 연변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봐도 유머감각이 좋은 저보안이 이런저런 연변의 소감을 끝없이 늘어놓을때 안해가 주방에서 나오더니 장국을 끓였다면서 필자와 함께 식사하기를 권했다.

저보안의 행복한 가정

“인젠 조선족음식도 입에 맞는가요?”

묻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저보안이 제꺽 이어댔다.

“아이구, 말도 마세요. 개고기, 랭면, 찰떡...등 조선족음식이라면 죄다 좋아해요. 그리고 조선말도 몇마디 배웠는데요. 제가 만약 그냥 호북에서 살았다면 아마도 영원히 조선족음식맛도 모르고 또 조선말도 할줄 모를겁니다. 특히 연변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지금의 현숙한 안해를 만날수 있었겠어요? 연변이 얼마나 살기 좋으면 제가 오랜전에 이미 부모와 형제들을 몽땅 안도로 모셔왔겠습니까?...”

연변에 대한 감수를 솔직하게 터놓는 저보안의 목소리는 그토록 진지했고 눈빛도 류달리 빛났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곁에 있던 안해가 입을 열었다.

“남편의 창업사를 생각하면 측은한 생각부터 앞섭니다.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머나먼 연변에까지 찾아 왔는데 고생이 참 많았지요. 그 마음 아픈 고생을 안해인 제가 알아주고 보듬어 줘야죠. 그래서 늘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화목하게 살아가지요”

해살처럼 고운 웃음을 띄우고 아무런 꾸밈도 가식도 없는 안해의 말에는 잔잔한 감동의 파문이 일고 있었다.

“리발업을 하면서 혹시 잊지 못할 이야기는 없는지요?”

“어찌 없겠습니까? 많고 많은 사연들중에 오늘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이야기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개무량한 어조로 이야기 주머니끈을 푸는 조보안의 목소리는 저으기 떨렸다.

저보안이 고모곁에서 맨 처음 머리깎는 기술을 배우고 있을때 사람들은 누구나 그한테서 리발하려 하지 않았단다. 햇내기니까 그럴수도 있었다. 그는 어서 빨리 실천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안 생겨서 조바심이 났다. 그때 한 조선족아저씨가 나서면서 자기머리를 리발해 보라고 했단다. 서툴어서 저어했더니 그 아저씨는 웃으면서 용기를 내서 깎으라고 했다는 것이였다. 물론 그날 저보안이 리발한 머리는 매우 엉망이였지만 그 조선족 아저씨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고 달마다 찾아 오겠으니 용기를 내여 잘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저보안의 말마따나 그 조선족 아저씨는 그한테 신심과 용기를 키워준 은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또 하나는 저보안이 금방 세집을 맡고 단독으로 리발할 때의 일이였다. 그때는 1989년도였으니까 세집이라야 불때는 온돌집들이 많을 때였다.

어느 한번, 한 조선족 아주머니가 애를 데리고 리발하러 왔는데 온돌이 불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집안에 연기냄새가 있었다. 그러나 저보안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들어서자마자 문을 열어 놓고 그가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지 않았는지 걱정했다고 한다. 마치 다정한 어머니가 친 자식을 보살피고 관심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였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그 후에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다면서 자주 저보안을 찾아와서 보살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필자도 코마루가 쩡해났다. 산설고 물선 타향에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해가려고 하는 호북청년의 자신감을 세워준 그 아저씨와 늘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준 그 아줌마가 바로 연변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기때문이였다...

“연변사람들은 이처럼 정답고 후더웠습니다. 연변은 어릴때의 날 받아주었고 성장시켜 주었고 저에게 만족된 삶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인제는 호구까지 여기에 옮겨왔으니 전 철두철미한 연변사람입니다. 앞으로 연변에 와서 살아온 인생사를 책으로 써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저보안의 눈가에는 이슬이 반짝거렸다.

리발업을 수십년간 이어온 저보안은 사회의 공익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어디에 재해가 들었거나 혹은 도시건설에 필요한 의연금활동이 있을때면 “저도 연변사람이고 연변에서 살면서 많은 덕을 보았는데 응당 발벗고 나서야지요.”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의연하군 했다.

작은 리발소가 전부의 살림밑천이고 삶의 터전인 저보안의 살림형편은 결코 넉넉하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봐도 작은 소유와 은혜에도 풍요로움과 감사함을 느끼면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만들려고 애쓰는 저보안의 마음가짐에는 탄복이 저절로 나온다.

“잘카닥 ㅡ잘카닥 ㅡ”

오늘도 연변땅에 깊숙히 뿌리내린 저보안은 자신의 두손과 두발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연변땅에서 보람찬 삶의 행복을 계속해서 일구어 나가고 있다.

/박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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