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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70성상]연변의 하늘길을 열고저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8-23 09:25:18 ] 클릭: [ ]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70돐 기념 기획보도

-오빠 박유생을 그리며

 박유생
  올해도 삼복철이 되니 북경의 불볕더위를 피해 연길로 피서왔다. 오후 1시반에 북경에서 고속철을 탔는데 저녁 9시에는 이미 연길에 도착해있었다. 그야말로 고속이다. 연변의 비약적인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80년대에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연길에서 북경에 가자면 기차를 여러번 갈아타야 했고 비행기는 아예 종적도 없었다.

올해로 성립 70주년을 맞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전국 각지로 통하는 고속렬차가 씽씽 달리는가 하면 대중형 려객기들이 리착륙할수 있고 국내외 주요 도시들에 하늘길이 거침없이 열려져 있다.

게다가 각종 편의시설들이 마련되여 있고 산좋고 물좋은 생태환경을 조성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문명도시로 거듭나고있다. 해마다 몰라보게 발전하는 연변을 지켜보면서 37년전 연길의 하늘 길을 여는 천지개벽의 프로젝트를 일선에서 추진한 연길민항건설주비위원회 부주임이며 중국민항연길역 제1임 당지부서기였던 연변발전의 숨은 공신 중의 한사람-나의 친애하는 박유생오빠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당의 11기 3차전원회의 개최와 더불어 중국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1983년 연변을 찾은 등소평동지는 장백산에 오르셨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보다 훌륭하게 보다 빨리 건설해야 한다”는 중요한 제사를 남기셨다.

80년대 초기 연변 역시 10년 동란을 거쳐 피페해지고 각 분야 발전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서기 겸 자치주인민정부 주장을 맡고 있던 리덕수동지는 연변을 발전시키고저 외자유치를 하려고 해도 외지의 수많은 성공한 기업가들이 연변으로 오는 교통이 불편하여 투자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연변의 개혁개방을 다그치려면 반드시 비행장이 있어야 하고 연변에서 떠나는 기차가 북경까지 통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

리덕수동지는 미국고찰길 견문을 통하여 연변이 국내,세계와의 교류가 급물살을 탈수 있다는 장원한 안목과 현실적 절박성을 안고 주지도부 성원들과 불철주야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대안을 찾았다. 리덕수동지는 미국방문고찰을 마치고 귀국하여 먼저 연변으로 돌아온것이 아니라 20여일이나 북경에 머무르면서 각 관련 부문을 찾아 연변에 공항을 앉힐 가능성을 타진하였다.(김숙련 등 저 <리덕수의 고향사랑>에서)

주 지도부의 정확한 결책은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구체 사업을 떠날수 없다.

“연길공항 주비사업을 다그치려는 절박감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민항건설주비처를 설립하고 주민족사무위원회에서 박유생(朴榆生)동지를 차출하여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연길공항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열어가는 전기작업을 맡게 된 박유생동지는 밤낮이 따로 없이 지칠줄 모르고 관련부문을 찾아 소통,교섭하면서 실북처럼 쉴새없이 동분서주의 나날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박유생동지는 과로끝에 간경화진단을 받게 되였는데 병상황을 확인하고나서 한달 만에 별세하게 되였다.”

이 글은 연길 조양천국제공항에서 개혁개방 40년,연변공항 개통 33성상을 맞아 작성한 <산과 물을 이은 하늘길의 정>에 있는 한구절이다.”

나이가 들수록 당시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싶어 박유생의 딸 박길한이 지난해 모처럼 연변에 오신 리덕수동지를 찾아뵈였는데 놀랍게도 리덕수동지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처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을줄 몰랐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참말로 자기를 잊고 사업에 빠져 있었던 분이였습니다. 북경에서 박유생동지와 함께 뛰는 다른 한분을 만날 때는 5월이였는데 그때까지도 동삼신(겨울신발)을 신고 있었고 양복도 없이 허름한 보통 옷 차림이였습니다. 신도 볼품 없었구요. 그래도 아무런 원망도 없었습니다.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분들은 이 부문 저 부문으로 뛰어다니면서 교섭하고 소통하느라 경황이 없었지요. 그때 미국고찰을 마치고 귀국한 뒤 저도 사정이 급한지라 연변에 돌아오지 않고 북경에 남아 20일 가량 각 부문과 소통하면서 그분들과 같이 뛰였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주 관련 부문에 련락하여 양복과 구두를 마련해드리게 했다만 로고에 비하면야…’

‘박유생동지가 병마로 림종을 다툰다는 급전을 어느 현에 하향갔다가 받게 되였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에 찾아가보았다만 이미 …참 아쉬운 분이였지요. 우리 연변의 발전은 이 같은 훌륭한 동지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게 되였습니다.’

당시 주지도부 책임자들이 개혁개방일선에서 열심히 뛰는 보통간부들한테 돌린 지극하면서도 섬세한 배려를 짐작할수 있는 세부이다.한편 아버지가 당시 주당위서기의 마음속에서 차지한 비중을 가늠할수 있다.”

이는 박유생의 딸 박길한이 지난해 《로년세계 잡지에 발표한 글 <아버지는 하늘에서 웃고 계신다>중의 한단락이다.

그에 따르면 애오라지 사업,사업뿐인 아버지는 딸들을 극진히 사랑하면서도 언제 따스하게 보듬어줄 여유라곤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깨여나면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벌써 밖으로 나가고 저녁에도 딸들이 잠든 뒤 늦게 들어와 아버지와 한밥상에서 식사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관련지도자들을 찾아 사업진척상황을 회보하고 지시를 받느라고 밤낮이 따로 없었으며 나의 올케이며 박유생의 부인인 오애순 녀사의 얘기에 따르면 과자같은 마른 간식으로 장거리렬차에서 식사를 에때울 때가 허다했다고 한다.

또한 한 신문사 기자의 회억에 따르면 80년대 같은 청사에 유난히 일찍 출근하는 년장자 한분이 있었는데 후에 알고보니 연변민항주비처 책임자 박유생이였는데 항상 보아도 무척 바쁘게 보내는 분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였다고 한다.

연변 각급 지도부와 민항주비처의 끈질긴 노력하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1985년 4월 12일 마침내 국무원,중앙군위는 부대의 연길비행장을 민용으로도 사용하는데 동의하였다.

당창건64돐기념일인 1985년 7월 1일 연길비행장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민용항공통항식이 성대히 거행,마침내 연길 상공에 첫 려객기가 떠 연길에 려객기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 심양에서 날아온 안-24형 소형려객기는 비행장에 온 연길시 각 분야의 대표들을 싣고 선후로 세번 오르내리며 연길 상공을 돌았다.

나의 오빠도 민항주비처 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중국민항연길역이 건립된후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게 되였다.

오빠는 연변 천지개벽의 대사변으로 일컫는 항공로가 개통된 바로 이듬해 벽두에 51세의 젊은 나이에 병마로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1980년6월 16일 오빠의 일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조국의 네가지 현대화건설을 위해 한번 크게 해보려한다. 20여년간 억눌렸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방출하여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나의 능력을 발휘해보려한다. 이것은 조국의 수요이고 부모들이 바라던 바이며 내가 30여년 다져온 결심이기도 하다.” 그의 끓어넘치는 열정이 어디에서 왔는 지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1985년 9월 3일 일기에는 또 이렇게 적혀있었다

“ 일년남짓한 동안 동분서주하여 마침내 천진까지 통하는 기차가 통했고 연길에서 심양에 이르는 민용항공선로도 개통했다. 연변에 온지 20여년만에 늦게나마 무엇인가 이루어내여 마음이 뿌듯하다.” 오빠의 연변사랑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오빠가 쓴 1985년 9월 3일의 일기

이밖에 오빠의 유품중 아주 소중한 자료가 하나 있다. 즉 원고지에 만년필로 정히 쓴 3,300자의 제안서 <연변경제건설을 다그칠데 관한 소견-륙해공계통공정을 건립할데 관한 건의>이다. 1985년10월1일자로 씌여진 걸로 미루어 보아 1985년 8월 29일 연길-심양 민용항선이 개통된 후 연변발전의 더욱 아름다운 청사진을 전망하며 사업중 오래동안 무르익혀온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프로젝트 기획안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조국의 수도 북경은 물론 전국 각지로 고속렬차가 씽씽 달리고 해내외로 날으는 비행기가 련이어 리착륙하니 별로 희한해 보이지 않겠지만 37년전 개혁개방의 빗장이 풀린지 몇해 되지 않는 1985년에 벌써 한 보통 간부였던 오빠가 이같이 멀리 내다보고 시대를 앞서가는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갖춘 견해를 제기할수 있었다는데 대해 경이롭다고 관련 학자들이 극찬하고 있다.

제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박유생오빠는 상술한 계통공정 실시는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에 관한 중공중앙의 제7차 5개년계획 정신에 부합되는 것만큼 ‘7.5’기간 혹은 좀 더 긴 시간내에 상술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연변의 경제상황이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것이며 연변의 두가지 문명건설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천박한 구상이나마 용기 내어 제출하는바이니 지도자들께서 결책시 참조하길 바란다는 작은 소망을 밝혔다.

우리 주변을 얼핏 둘러보아도 오빠의 구상속의 아름다운 화폭이 거의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어렵잖게 보아낼수 있다. 물론 그것이 꼭 오빠의 청사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개혁개방의 물고가 갓 터졌다고 할수 있는 37년전 변강오지의 한 보통간부가 이런 혜안과 비전을 가질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는 그의 다양한 인생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박유생오빠는 1935년 7월 23일 길림성 서란현 고령박씨 가문의 여섯 남매중 셋째로 태여났다.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형님을 학교에 보내고 자기는 14살 어린 나이에 학교 선생님의 밥을 지어주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그는 평생 마음껏 공부 못한 유감을 품고 있었다.

1952년도 할빈 기건학교(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할빈시에 있는 동북인민정부 중공업부 설계회사에 베치받아 견습기술원으로 일하면서 정식 사업에 참가했다. 1953년에는 심양 중앙 중공업부 설계회사 기술원,조장(1등모범),1954년에는 북경 중앙 야금부 흑색설계원 탐사총회사 검사원,공정책임자,분대장(모범분대장),1957년에는 북경 중앙야금부 간부학교,중등전문학교진수학원(대학전문학교)정치반 학원, 1958년 1월에는 하남성 정주시 방채성향 하향,같은 해 10월에는 장춘 길림야금설계원 종합과 책임자로,196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공급판매합작사 판공실 과원으로,1968년부터 5년간 연변조선족자치주 5.7간부학교,공업교통분야 투쟁,비판,개조판공실에서,1973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공업국에서,1979년3월부터 주민족사무위원회 직원(간부)으로 일하면서 전국 각지를 많이 돌아보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력을 쌓았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실력을 탄탄히 쌓고 넓은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식견을 넓힐수 있었기에 사고방식이 활발하고 안목이 미래지향적일수 있었다고 동료,친척,친구들이 말한다.

이같은 능력을 인정받아 1984년에 당시 주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과 함께 도문-심양행 렬차를 도문-천진행 렬차로 늘굴데 대한 사업을 맡아 구체적 작업을 치밀하게 밀고 나가 성사시켰다. 여기에서 인격과 능력을 인정받아 1985년에는 보다 벅차면서도 아름찬 사명인 연변민항주비처 책임자(연변민항주비처 부주임1985년 3월26일)로 발탁되였고 중국민항연길역이 건립된 후에는 연길민항역 제1임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게 되였던것이다.

오빠는 이렇게 의욕적으로 사업을 밀고 나가면서도 다년간 말못할 설음을 안고 있었다. 억울한 루명을 쓴 아버지문제에 련루되여 그토록 갈망하는 입당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개방의 봄을 맞이해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게 되여서야 1981년 입당신청서를 제출한지 27년만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으로서 다년간 갈망하여오던 념원을 마침내 실현하였다.

오빠는 또한 가정에서 보기 드문 효자였고 형제간의 우애가 유달랐다.

50년대 이미 조국의 수도 북경에서 사업하면서 개인적으로 잘 나갈수 있었지만 부모를 돌보고 집을 돌보기 위해 집과 가까운 장춘에 왔다가 결국 부모가 있는 연길에까지 왔던 것이다. 50년대 북경에서 사업할 때 집에 올 때면 오빠가 늘 북경특산 과자며 사탕들을 사왔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자기의 로임을 다 털어 우리 형제자매들을 공부시키고 돌봐 주면서 맏이와 다름없이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나갔다. 막내인 나도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며 오빠와 올케의 손에서 결혼식을 치렀다.오죽하면 아버지가 마지막 림종 시 출장갔다 돌아온 오빠를 기다려 보고나서야 시름놓고 눈을 감았을까. 어머니가 경각을 다툴때도 우리는 출장 간 오빠가 돌아올때까지만 생명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병원에 간청했다.

이와같이 오빠는 가문의 기둥이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오빠의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큰조카는 할아버지 생일날에,둘째 조카는 할머니 생일날에 태여났으며 오빠는 마지막 가는 날마저 엄마가 세상 뜬 1월 24일 같은 날에 떠나 갔다..

오빠가 마지막 출장을 떠날 때 이미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고 몸이 몹시 아파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지만 이번 출장을 다녀 온 다음에는 꼭 가보겠노라고 한것이 결국 마지막 출장이 되고 처음으로 찾은 병원출입에 불치의 병 진단을 받게 될줄 누가 알았으랴.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병원을 찾은 기록이 없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개혁개방의 새봄을 맞아 수년간 억눌렸던 마음이 갓 해방되어 마음껏 재능을 떨치며 나래펴려 하는 한창 나이 51세에 우리 곁을 떠나 너무나 아쉽다

당년 오빠의 추도사에 있었던 글 일부를 여기에 옮겨 적는다.

“당 11기 3중전회이래 박유생동지는 정치면에서 당중앙과의 일치성을 확보하였으며 당의 각항 방침,정책을 참답게 시달하고 집행하였다. 그는 사업에 적극적이였으며 정치상의 진보에 더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박유생동지는 사업에서 성적이 돌출하였으며 두차례나 주직속기관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으며 공로기입표창을 한번 받았다.

1984년도 박유생동지는 도문-심양행 렬차를 도문-천진행 렬차로 늘굴데 대한 사업을 맡아하게 되였다. 그는 당에서 맡겨준 과업을 원만히 완수하기 위하여,연변의 경제를 진흥시키기 위하여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였으며 몸에 병이 있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사업을 견지하였다.그리하여 사업에서 훌륭한 성과를 따냈으며 맡겨진 과업을 원만히 완수하였다. 그후 박유생동지는 민항건설주비처에 잠시 뽑혀 가서 부주임직무를 맡아 보았다.이 기간에 그는 민항주비임무를 제때에 완수하기 위하여 고생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정신을 발양하였으며 병마와 완강히 투쟁하여왔다. 그는 침식을 잃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자아희생적으로 사업하여왔으며 연변의 사업을 위하여 큰 기여를 하였다.

중국민항연길역이 건립된 후 박유생동지는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아보게 되였다.분망한 사업가운데서도 그는 고생을 락으로 삼고 자신의 일체를 모두 민항사업에 바쳐왔다.입원치료기간에도 그는 여전히 민항역과 민항주비처의 사업을 관심하였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업에 대해 잊지 않았다. 극악한 병마는 피끓는 열정으로 당을 위하여 모든것을 기여하려는 한 공산당원 -박유생동지의 보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박유생동지는 이렇게 51세를 일기로 우리와 영별하였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당과 조국을 위하여,인민을 위하여 쌓은 업적은 영원히 우리들을 격려할것이며 그의 혁명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이것이 오빠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이고 긍정이라고 생각된다.

오빠가 살아계셔서 오늘날 연길민항이 국제공항으로 발전하고 사면팔방으로 뻗은 항선을 볼수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하늘나라에서 지상의 이 희소식을 알게 되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으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리라.연변의 발전에,연길 하늘길을 여는 천지개벽의 프로젝트에서 큰 몫을 담당한 오빠로 하여 나도 자랑을 느낀다.

오빠의 좌우명, “1프로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쟁취하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는 것 같다.

/글 박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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