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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70성상]수형개조로 연변사과배의 품질을 제고시키다

편집/기자: [ 김태국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8-12 09:16:47 ] 클릭: [ ]

85세 고령이지만 신문잡지는 매일 읽는다는 김태욱옹.

원래 1903년 3월 5일과 1938년 10월 1일은 아무런 련관이 없는 날자였다. 그러나 그앞에 연변사과배라는 특수한 매개물을 가져다놓으면 두 날자는 연변사과배를 배육한 최일선이라는 유명한 원예대가와 사과배나무 수형개조로 연변사과배의 품질을 제고시킨 김태욱이라는 원예사의 만남으로 된다. 두 사람은 모두 화룡시 서성진 태생으로 스승과 제자사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70년전인 195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4살 나는 소학생이 최일선선생이 가꾸는 과수원으로 자치주 성립 경축 견학을 왔다가 과수원예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게 되면서다.

시골에서 시큼털털한 돌배만 보아오던 노루목골(장항촌의 다른 이름)의 소년 김태욱은 어른들의 주먹보다 더 큰 배에 감탄하고 누른색과 자주색 나는 배와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각종 과일에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로부터 김태욱은 그 동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70년 인생을 과수재배와 연구에 바쳐왔으며 사과배나무 수형개조로 연변은 물론 국내외까지 널리 알려진 과수원예사로 성장하였다.

1956년에 초중을 졸업한 김태욱은 서성공사 <원예대학>에서 7개월간 과수기술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문예창작에 남다른 기질을 보인 그는 공사 문예선전대에 창작원 겸 배우로 뽑혔는데 낮에는 공사다종경영 과수묘포장에서 묘목을 키우고 밤에는 문예창작과 배우로 활약하였다. 그 시기 그는 최일선 선생의 직접적인 가르침하에 가접과 아접, 묘목재배, 정형전지와 같은 과수 기초지식을 배웠다.

1980년대 현장에서 사과배 재배 리론을 강의하고 있는 김태욱옹.

“그 시기 전지가위를 허리에 척 차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청년시절을 회억할 때면 김태욱옹의 얼굴은 항상 밝은 웃음이 넘친다.

1958년 봄에 과로로 몸이 쇠약해진 김태욱은 고향마을에 돌아와서 병을 치료해야 했다. 그때 그의 병명은 ‘관심병’과 ‘페결핵 6형’이였는데 그 병을 치료하자면 페니실린과 마이싱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대기근 시기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어데 가서 이런 귀중한 약을 얻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서 나의 꿈을 꽃피워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고향마을인 장항대대는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였다. 그는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산에서 곰취와 더덕을 캤으며 가을이면 머루와 오미자와 돌배를 뜯었다. 신기하게도 2년이 지나니 피골이 상접하던 사람이 가파른 산에 올라도 숨이 차지 않고 백여근 되는 산나물을 지고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토록 짜증이 나던 병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1961년 봄, 마을에서 10년간의 시간을 들여 8헥타르의 과수원을 건설하고 관리하던 외가 칠촌숙인 박연헌이 그의 집에 찾아와서 원예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과수원일을 도와달라고 청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과수원예사의 꿈을 마음껏 피워갈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였다. 23살의 피 끓는 나이에 그는 과수재배기술을 배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수재배 관련 서적을 읽었고 도시락을 싸들고 최일선선생과 과수기술원들을 찾아다녔다. 독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전경험이 많은 기술원들한테서 요령을 배워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였다. 4년간의 노력을 거쳐 그는 1965년부터 독자적으로 과수원을 관리할 수 있는 과수기술원으로 되였다.

1980년대 과농대표들에게 수형개조의 필요성과 합리성을 강의하고 있는 김태웅옹.

1960년대에 최일선선생의 과수원은 공사내 각 과수원 기술일군들의 모임장소였다. 어느 한번 최일선선생은 5, 6년생 되는 한 사과배나무앞에서 전지가위를 김태욱의 손에 쥐여주면서 “참가자중에서 자네가 제일 젊고 나한테서 배운 것도 많으니 대담하게 이 나무를 전지해보게!”라고 말했다. 선배들 앞에서 하는 전지 표현이였지만 그가 능란한 솜씨로 복잡한 가지들을 추려가며 나무의 모양새를 다듬자 최일선선생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 젊은이의 전지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만. 복잡하던 수형을 곱게 다듬었으니 앞으로 좋은 나무로 크겠구만.”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특수년대는 연변과수재배 력사에서 준엄한 시련을 겪은 시기였다. 20년 내지 30년생 사과배나무의 키는 전선대처럼 높게 자라 사닥다리가 없으면 배를 따기 어려웠고 큰 가지가 빼곡하여 꽃이 펴도 결과가 적고 품질이 떨어졌다. 산비탈에 위치한 시골과수원의 고충은 더 컸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배를 따다가 떨어져서 상하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어 뜯으면 사과배가 깨지면서 집체재산을 파괴했다는 죄명을 들쓰기가 일쑤였다. 바로 그 시기에 이름없는 시골과수원의 초보 기술원인 김태욱은 최일선선생의 지지하에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사과배나무의 수형개조에 달려든다.

1980년대 전지시범을 하고 있는 김태욱옹.

김태욱은 “1968년에 번개에 맞아 수간이 부러진 사과배나무를 베여버리기 아까워 정성스레 전지를 하였더니 이듬해 가을에 희한하게도 더 크고 맛있는 배가 더 많이 열리더라.”면서 그것이 자기가 수형개조를 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과수재배에서 기술개혁은 낡은 체계를 새로운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김태욱이 하려는 개혁의 중점은 나무의 키를 낮추고 큰 가지를 적게 남기고 새로운 결과지를 키우는 것이였다.

1970년 3월 중순 김태욱은 자기의 구상대로 과수원에서 전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과배나무 허리를 뭉텅뭉텅 자른다는 소문을 듣고 현 농업국의 과수기술원 윤동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엄숙한 어조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밭에 재배하고 있는 개암이 여물어가고 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전지는 사과배나무의 생장발육을 억제하는 행위요. 이 나무는 조만간에 죽을 것이고 당신은 집체재산을 파괴한 파괴분자로 처벌받을 것이요!” 쩍하면 모자를 들씌우던 시대라 그는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날 그들은 밤늦게까지 얼굴을 붉혔고 그후 2년간 그는 주와 현의 과수회의 때마다 지명비판을 받아야 했다.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 방식대로 전지한 20여그루의 나무들에서 두배나 더 되는 사과배를 생산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근거로 모모한 학자와 기술원들과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섰다.

“사과배는 대규모 재배를 시작한 지 불과 50년인 신생사물이기에 아직도 절대적인 리론체계가 수립되지 않았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는 것이 좋겠네. 실천속에서 더욱 많은 경험을 루적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그 길이 좀 힘들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좋은 열매를 거둘거네…” 최일선선생은 그의 과수원을 여러번 찾아 지도하고 그가 전지한 나무들을 지켜보면서 드팀없이 그를 지지하였다.

4년후인 1974년 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소집한 사과배 전지시범 표현대회에서 그의 기술개혁 타당성이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머리를 지지리 눌렀던 <과수파괴분자> 루명도 유명무실해졌다.

1973년 9월초에 최일선선생을 위수로 하는 11명의 연변과수고찰단이 흑룡강성 목단강지구에 고찰갔을 때 최일선 선생이 7년생 배나무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기에 함께 간 기술원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선생님, 이 품종이 선생님이 육종한 ‘명암 18호’가 아닙니까?” 김태욱이 말하자 최일선선생은 “옳거니, 자넨 확실히 눈총기 밝네.”하고 밝게 웃으면서 “난, 자네가 내 옆에서 일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최일선선생은 항상 김태욱을 높이 평가해주고 아껴주었다.

그러던 1984년도에 김태욱은 서성진과수원의 기술원으로 초빙되였는데 그 과수원과 최일선선생의 과수원은 모두 서성진 기업에서 관할하는 과수원으로 비록 5리 가량 떨어져있지만 한개 단위였기에 결국 선생의 신변에 오게 된 것이다. 최일선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이제야 제 자리에 오게 되였구나!” 하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고 한다.

 

뒤울안의 시험전에는 다래가 영글어가고 있다.

1985년에 최일선선생의 과수원에서 봄철전지 강습반을 개최하였는데 최일선선생은 김태욱더러 갱신전지를 시범하라고 하였다. 김태욱이 몇십년 자란 배나무에 갱신전지를 하고 지팽이를 짚고 힘겹게 곁에서 지켜보는 최일선선생에게 “선생님, 선생님이 아끼시며 애지중지 키운 이 큰 가지를 제가 베여냈습니다.”하고 송구해하자 최일선선생은 “갱신전지도 나무에 한해서는 역시 혁명인거야, 난 자네가 한 것이 옳다고 보네!” 하고 그의 갱신전지를 긍정하여주었다. 그런데 이번의 대화가 과수기술문제에서 나눈 두분의 마지막 대화일 줄이야! 1985년 11월 28일 과수원예대가 최일선선생이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추도식이 거행되던 날 김태욱은 최일선선생의 묘앞에 꿇어앉아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연변사과배의 수형개조를 계속 견지하여 사과배의 품질을 한층 제고시킬 것을 약속하고 또 약속하였다.

김태욱이 맡은 서성진과수원은 35년의 수령을 가진 채벌직전의 과수원이였는데 3년간의 수형개조를 거쳐 늙은 나무들은 푸르싱싱 청춘을 회복하고 연변에서 으뜸가는 과수원으로 변했다. 연변주내 여러 매체들에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그와 그의 과수원을 소개했고 현, 주, 성 유관 부문에서는 10여차나 각종 증서와 묵직한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과수원예면에서 전지가위와 톱으로 독특한 업적을 쌓은 동시에 영원히 녹쓸지 않은 붓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적도 올렸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과배나무의 전지는 이렇게>, <한부사과나무의 시험재배> 등 과수론문이 《동북과학기술신문》에 련재되였고 길림성에서 출판한 《과수소채》 장원대왕 소개에도 그의 문장이 실렸다.

1991년 2월 중순, 연변주원예학회 년회가 룡정의 주농업과학연구소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의 주요 의제는 늙은 사과배나무의 수형전지였는데 21년간의 꾸준한 연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쓴 그의 론문은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과농대표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지시범을 보여주면서 연구성과를 현지에 보급하였다. 그번 회의 총화문에는 “연변주내 사과배나무 정형전지는 반드시 화룡현 서성진과수원의 김태욱의 전지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행정명령식 문구까지 들어갔다. 

 

사과재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태욱옹.

우리가 지금 연변의 허다한 과수원들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치고 줄지어선 사과배나무들은 바로 김태욱옹의 연구성과인 쌍층개심형과 단층개심형 수형이다. 항간에서는 김태욱전지법 혹은 서성전지법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런 수형개조 전지법에 대해 김태욱옹은 “나는 최일선선생이 키워낸 수많은 제자들중의 한사람이다. 최일선선생을 비롯한 선배 원예사들의 가르침과 지지가 없었더라면 나의 성과는 해볕을 보지 못하게 되였을 것이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가 연구한 《쌍층개심형》 와 한층 더 나아간 단층개심형 수형전지는 그때로부터 연변 각지에 전파됨과 동시에 나래를 펼친 듯 전국 각지에로 신속히 전파되여갔고 일본, 조선, 한국, 대만 등 외국에도 전해졌으며 사과, 복숭아, 오얏 등 다른 과수품종에까지 옮아갔다.

연변사과배의 발전과 더불어 70년, 85세의 고령에도 경운기를 몰고 밭갈이를 하고 집마당에 수십종의 100여그루 과일나무를 가꾸고 있는 김태욱옹은 “최일선선생처럼 술 대신 과일즙을 복용하고 매일 밭일을 하며 터전에 가꾸는 남새를 먹는 것이 나의 장수비결이다.”고 다시한번 최일선선생을 떠올린다.

김태욱:

1938년 10월1일 화룡시 서성진 장항촌 출생.

1956년 서성중학교 졸업, 원예대학 졸업.

1961년 화룡시 서성진 장항촌과수원 기술원.

1984년~1998년 화룡시 서성진과수원 기술원.

수필《과수원예대가 최일선선생님을 기리며》, 《그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 재담 《다시 만납시다》, 《록색은행》, 노래 《도거리농사 좋구 좋다》 등 각종 쟝르의 문학작품 수십편 발표. 화룡시농업국 특산과 과수기술고문, 연변농민과수협회 리사장 력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길림신문 김태국, 김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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