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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항일투사] 배치운(裴治云)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6-21 10:34:48 ] 클릭: [ ]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3. 시, 지구급 중공 지도간부

배치운(裴治云, 1893—1933):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 서기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죽산동에서 태여나 1920년에 료녕으로 이주했다가 1927년에 다시 북만 오동하(梧桐河)로 이주했다.

1928년에 최용건, 리인근, 리춘만 등 혁명가들이 꾸린 야학에서 공부했으며 농민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였다.

1929년 초가을, 당조직의 지시를 받고 250여세대의 농민들을 묶어세워 소작쟁의 투쟁을 벌렸다. 1930년 상반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탕원현농민협회 주석이 되였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자 조선족 열성자 40여명을 선발하여 ‘항일화장선전대’(抗日化裝宣传队)를 조직하여 량자하(亮子河), 격금하(格金河), 흑금하(黑金河) 등 금광과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항일 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당시 이 선전대는 1932년 봄 일제 침략자들이 가목사를 점령할 때까지 줄곧 순회선전을 견지하여 수많은 조선족, 한족 대중들을 항일에로 이끌었다.

1932년에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 서기가 되여 기층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우수한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을 농촌과 광산에 파견하여 대중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들의 노력하에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 산하의 반일회 회원은 1932년 여름의 1,400여명에서 1933년 초가을에는 1만여명으로 발전하였고 공산당원도 100여명으로 늘어났다.

1932년 가을, 7호툰 일대에서 항조항세(抗租抗稅) 투쟁을 지도했다. 1933년 8월, 탕원 서북구에서 농민위원회를 설립하여 홍색유격근거지를 건립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1932년 10월 10일, 탕구 북반절하(北半截河)에서 30여명의 조선족 청년과 7명의 한족으로 구성된 중국로농홍군 제32군 탕원 유격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경험 부족, 변절자의 밀고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1, 2차 유격대 창설 사업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

두차례의 실패 원인과 교훈을 총화한 후 세번째로 80여명의 조선족, 한족 청년들로 무어진 탕원 유격대 건립을 주도하였다. 이 유격대는 후에 각지의 지주무장, 위만경찰과 위자위단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면서 부단히 대오를 확충하였으며 나중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확대되였다.

1933년 10월, 합립강에서 현당위원회 간부회의 도중 변절자의 밀고로 현위서기 등 12명 공산당원, 공청단원과 함께 위만군 헌병대에 체포되여 혹형을 당하다가 14일에 비밀리에 생매장당했다.

(자료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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