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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 나의 집14] ‘혁명의 어머니’—성이숙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1-17 16:12:49 ] 클릭: [ ]

— 성이숙은 당을 따라 30여년을 헌신해온 녀강자이며 우수한 공산당원이다

음력설에 즈음하여 기자는 민족출판사 전임 사장 우빈희와의 통화에서 그의 어머니 성이숙(成以淑)을 떠올리게 되였다.

1912년에 료녕에서 태여난 성이숙은 1983년에 이미 작고한 분이다. 성이숙은 자각적으로 혁명에 투신하여 당을 따라 30여년을 헌신해온 녀강자이며 우수한 공산당원이다. 성이숙은 자기 집을 려관으로 삼고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펴드렸으며 남편 우광한(원 료녕성 청원현 현장)을 50여년이나 드팀없이 내조하여 가정을 굳건히 지켰으며 아들 넷을 대학에 보내 나라의 역군으로 키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혁명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료녕 청원현에서의 성이숙 

소박한 가정부녀로부터 새 나라의 주인으로

1928년 봄, 조용하고 참하고 어질며 총명한 성이숙은 우광한과 결혼했다. 성이숙은 일본이 투항한 후 국내전쟁 기간인 1947년에 료녕성 신빈현에서 혁명단체인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에 참가했다. 남편이 혁명에 참가하여 산에서 유격전을 벌리기에 온 가족이 련루될 위험이 있었지만 성이숙은 선뜻이 남편의 ‘전우’로 되였다. 국내전쟁 시기 성이숙은 중국의 미래는 중국공산당에 있으며 조선족의 희망도 중국공산당에 달렸다고 확신하면서 결연히 남편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따르기로 했다. 당을 따르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전선지원사업에 힘 다한 보람으로 성이숙은 1949년 2월 25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지방 인민대표로 되여 새 중국의 창립을 맞이하였다. 이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나 학교라고는 전혀 가보지도 못하고 일찍 결혼하여 시부모를 모시고 한 가정의 기둥이 되여 혁명에 투신한 남편을 내조하던 농촌부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복이였다.

1953년초 신빈현 일대에서 농업합작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때 가정조건이 좋고 로동력이 많으며 부림짐승이 있는 집들은 자원적으로 자기들 끼리 생산호조조를 세웠지만 가정조건이 어렵고 로동력이 부족하며 부림짐승이 적거나 없는 집들은 호조조를 세울 엄두도 못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당지부 서기 성이숙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선뜻이 나서서 조건이 나쁜 집들을 찾아 한데 묶어 생산호조조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조장을 맡았다. 그는 생산호조조의 성원들을 이끌고 이른새벽부터 논밭에 나가 일했으며 늘 자기 집일을 제일 마지막에 했다.

우광한 성이숙(앞줄 오른쪽) 부부와 네 아들(뒤줄 왼쪽으로부터 우빈희, 우철희, 우병희, 우승희)

자기 집을 ‘려인숙’으로 여기다

성이숙이네가 신빈으로 이사를 온 후 시골에서 사는 멀고 가까운 친척은 물론 이전의 이웃들 할 것 없이 성이숙네 집을 자주 찾았다.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찾아온 사람도 있었으며 병 보이러 현성에 온 사람,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온 사람, 직장일로 출장 나온 사람… 실로 많은 사람들이 현성에 오면 성이숙네 집을 찾았다. 그리하여 집식구들만 지내는 날이 아주 드물었으며 그만큼 식객도 많았다. 성이숙네 집은 그야말로 ‘려인숙’이였다.

성이숙이 조선족 고아 송혜숙과 한영을 도와준 사연이 비교적 감동적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빈현방송소에서 사업하게 된 송혜숙은 기숙사에 있었는데 몸이 허약했으므로 성이숙은 늘 그를 집에 불러 식사하게 했으며 몸조리도 하게 했다. 1960년 겨울, 송혜숙은 남편을 따라 할빈의과대학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기차역으로 가기전 성이숙은 이른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지은 다음 부뚜막에 벽돌을 데워 수건으로 돌돌 말아 송혜숙한테 주었다. 더운 벽돌을 안으면 추위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작별할 때 송혜숙은 석별의 정에 못이겨 성이숙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한영은 신빈현부녀련합회에서 사업할 때 줄곧 성이숙의 보살핌을 받았다. 성이숙은 한영을 양딸로 삼았으며 둘 사이는 친모녀와도 같았다. 한영은 성이숙네 집에서 약혼하고 결혼했다. 남편을 따라 심양으로 전근하기 전날 밤에 한영은 아들 김성을 데리고 ‘친정집’에 와서 마지막 밤을 자고 이튿날 청원을 떠났다. 김성은 후날 자신이 진행하는 텔레비죤프로에서 자기 어머니에 대해 언급할 때 어머니는 고아였으며 청원현 현장의 집에서 자랐다고 감명 깊이 토로하였다.

 
성이숙(앞줄 왼쪽 두번째) 청원현당대표대회 대표의 영예를 안고

아들 넷을 대학생으로 키우다

성이숙은 우광한과 결혼하여 아들 넷을 낳았다. 후날 아들들은 성이숙의 손길 아래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다.

맏아들 우철희는 1953년에 동북인민대학(지금의 길림대학)에 입학하고 둘째아들 우병희는 1957년에 동북인민대학에 입학하고 셋째아들 우승희는 1960년에 길림대학에 입학하고 막내아들 우빈희는 지난 세기 80년대초에 심양사범학원에 입학하였다.

아들들의 대학 입학은 성이숙의 제일 큰 자랑거리였다.

성이숙이 세상 뜬 후 우광한은 아들들 앞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너희들이 학교에 다닌 것은 어머니의 공로다. 나는 그 때 사업만 사업이라고 약간의 월급만 집에 들여놓았을 뿐 집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너희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철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 길림성고급인민법원에 배치받고 법관으로 사업하다가 료녕성민족사무위원회 등 기관에서 일했고 퇴직 후 료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여열을 빛냈다.

우병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과학원 장춘광학정밀기계연구소’(1999년 ‘중국과학원 장춘광학정밀기계 및 물리연구소’로 개칭)에서 과학연구에 종사하여 새 중국의 제1대 중견과학자로 성장했다. 그가 책임지고 연구개발한 ‘921—2’응용시스템 태양상수감측기는 2003년에 ‘신주3호’ 우주비행선에 사용되였다.

우승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심양의 과학기술분야에서 근무하였는데 그가 연구제작한 〈스위치와 시간지연제어회로〉는 국가급 과학기술성과상을 수여받았다.

우빈희는 무순일보사 사장을 거쳐 2005년 1월에 민족출판사 당위 서기, 사장 겸 총편으로 발탁한 후 11년 동안 민족출판사에 몸을 담그고 열심히 일해 민족출판사업의 안정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네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성이숙은 겨울에 솜바지도 못 입고 모든 것을 바쳤다.

우승희는 성이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어머니는 엄하고도 자애로운 스승이였다. 어머니는 사상이 진보한 새 시대 녀성으로서 사회의 모든 활동 특히는 봉사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대공무사하였기에 재판석에 나가 인민법원의 배심원까지 했을 만큼 일을 공정하게 처리했다…”

우빈희의 마음속에 있는 성이숙은 영원히 선량하고 지혜로운 현모량처였다.

성이숙은 종래로 자식들을 큰소리로 욕하거나 때리지 않았다. 그는 온유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자식들은 어머니 성이숙에 대해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해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언제나 구사회의 어려웠던 나날을 회억하고 오늘의 행복에 대해 입버릇처럼 되뇌이군 하던 성이숙이였다.

흑백이 전도되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그는 견결히 중국공산당을 따르고 억울한 루명을 쓰고 타도된 남편을 지지하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는 머지 않아 타도된 로간부들이 일터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확실히 력사는 성이숙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성이숙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분투를 거쳐 새로운 삶을 이루어낸 중국 조선족 백년 생활의 축소판이다.

/길림신문 리영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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