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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한락연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12-17 09:42:48 ] 클릭: [ ]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2. 동북지구 조기 지하당조직 활동가

한락연(韩乐然, 1898—1947): 국민당할빈특별시당부 집행위원, 중공지하당 공작원

원명은 한광우(韩光宇)이고 1898년 12월 8일 길림성 연길현 룡정촌에서 태여났다. 룡정 관립학교를 졸업한 뒤 룡정전화국과 룡정해관에서 사무원을 지냈으며 1919년 가을 로씨야 연해주로 류학을 떠났다가 1920년 가을 상해로 건너와 상해미술전과학교를 다녔다.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 1월,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하고 중공중앙의 파견으로 심양에 와 혁명 계몽 사업을 진행하여 봉천당조직의 건립을 위해 기초를 닦아놓았다. 이 때 이름을 한락연이라 고치고 봉천성립제1사범학교에서 예술 교사로, 후에는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사립미술전문학교를 꾸려 신분을 엄호하면서 비밀 당사업을 진행했다. 그 해 여름,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에 대한 중공중앙의 지시 정신에 근거하여 국민당의 외곽 조직인  ‘계명학사’(启明学社)에 참가하여 혁명활동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봉천기독교청년회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소자원(苏子元)을 동원하여 이 계명학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또 소자원을 통해 상해로부터 공산당, 공청단 간행물과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부쳐와 진보적 청년들이 열독하게 하였다. 같은 해 가을, 소자원을 지도하여  ‘문학연구회’를 꾸리고 진보적 청년들을 혁명투쟁에로 이끌었다.

1924년 6월, 심양에 온 리진영(李震瀛)을 만난 후 리진영과 함께 봉천 지구에 당조직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6월 10일, 상해 5.30운동을 응원하여 임국정(任国桢), 소자원 등과 함께 사회 각계 인사가 참가한 반제애국운동을 주도하였다. 당해 11월,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할빈으로 떠나간 후 그가 발전시킨 공청단원, 골간열성자들을 주요 성원으로 하여 중공봉천지부가 설립되였다. 1925년 7월, 할빈에 온 후 할빈제1중학교, 보육학교(1926년 할빈제3중학교로 개명), 할빈중동철도미술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 당사업을 진행했다. 그의 영향하에 후날 저명한 항일영웅이 된 부천비(傅天飞)가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25년 11월, 국민당할빈특별시당부 성원으로 중공의 지지를 받아 설립한 동북국민자치군 사령부에 가담하여 재정과 교통 및 쏘련과의 련락 등 사업을 책임졌다.

1926년 4월, 새로 설립된 국민당할빈특별시당부 집행위원이 되였다. 같은 달 오려석(吴丽石) 등과 함께 중공할빈시특별지부를 중공북만지방위원회로 개편하고 성원이 되였으며 동시에 공청단북만지구위원회도 설립하였다. 6월에 오려석 등과 함께 국민당 명의로 《할빈일보》를 창간하여 혁명 여론 기구로 활용하였다. 1927년 5월, 국제정보원이 된 소자원을 지도하여 정보 수집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게 하였다. 1927년 10월, 오려석 등과 함께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 설립 및 대표대회 준비 사업에 참가하였다. 1928년에 초도남(楚图南)과 함께  ‘찬성(灿星)문예사’를 설립하고 《찬성》 문예월간을 발간하였으며 편집 사업에도 참여했다. 1928년 6월, 중공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좇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 당대표 40명을 쏘련 모스크바로 호송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1928년 11월, 중공만주성위원회의 파견하에 공청단할빈현위원회의 사업을 맡아 할빈현당위원회 서기 임국정과 함께 봉계 군벌이 각계 애국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비밀리에 〈만몽신5로협약〉(满蒙新五路協约)을 체결한 것을 반대하는 할빈 11.9운동을 조직하여 승리에로 이끌었다. 1928년말, 봉천경찰서에서 봉천과 할빈에서의 그의 혁명활동 상황을 눈치 채자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치치할로 옮겨 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에 당조직이 파괴를 받고 신분이 폭로되자 조직의 동의를 거쳐 프랑스로 류학을 떠났으며 1931년에 빠리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1937년에 로구교 사건이 발생한 후 빠리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양호성 장군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와 무한과 중경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석하였다. 1939년 4월, 전지당정위원회(战地党政委员会)에 의해 소장 지도원이 되여 산서, 섬서 두 성을 오가면서 통일전선 사업을 하였다. 1940년 봄에는 서안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여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1947년에는 란주와 서안에서 20차례의 미술전시회를 가졌다. 1946년 4월부터는 신강에서 고대 고창국(高昌国) 유적지와 키질 천불동 발굴 사업을 처음으로 진행하였다. 1947년 7월 30일에 비행기를 타고 적화에서 란주로 가다가 조난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자료 출처: 《흑룡강성당사인물》 등)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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