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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장복림, 진덕삼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21-12-10 12:55:21 ] 클릭: [ ]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1. 성급 중공 지도간부

장복림(張福林, ?—1937):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 집행위원, 중공합동(哈東)특별위원회 서기

본성은 양씨이고 로양(老楊), 송내진(宋乃鎭)이라고도 불리웠고 양파자(楊耙子)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1932년에 중공만주성위원회의 파견을 받아 탕원에 가서 유격대 중대장이 되였다. 1933년 1월,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 소속으로 반일유격대 재건에 참여하여 대장이 되였다. 1936년 9월 18일, 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 중공탕원중심현위원회와 항일련군 제3군, 제6군 당위원회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련석회의에 참석하였고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 집행위원이 되였다. 1937년 1월(1936년 12월이라는 설도 있다), 중공합동특별위원회 서기가 되여 할빈 동부 지역에서 지하당원을 발전시키고 지하당조직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위만군과 위만경찰 대오 속에서 반란을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등 반일 사업을 활기차게 진행했다. 1937년 4월 15일, 내부에 반역자가 생겨 많은 중공당원들과 함께 체포되였다. 1937년 6월 9일, 핵심 인물 13명 속에 포함되여 할빈위만주국군 륙군사격장에서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 《중국공산당흑룡강성조직사자료》 등)

진덕삼(陳德森, 1888—1950): 중공만주성위원회 후보위원, 중공북만특별위원회 위원

원명은 홍남표(洪南杓)이고 리극화(李克和), 강삼(姜三), 강우(姜宇), 강방(姜方) 등 많은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문 사료에는 진덕삼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조선 경기도 양평에서 태여나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09년 4월, 항일단체인 청년동지회 결성에 참여했고 1919년 1월 자유단 결성에 참여하여 《자유보》를 발행했다. 3.1운동에 참여했고 6월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했다. 8월에 한족신보사(韓族新報社)를 설립하고 《새배달》이라는 신문의 책임주필이 되였으며 10월에 재만독립운동자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였다. 1920년 6월, 비밀리에 조선으로 들어가던중 안동현에서 검거되였다. 1926년 9월 상해로 망명하고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중공상해한인지부를 결성하고 서기가 되였다.

1929년 6월, 파괴된 중공상해한인지부를 재조직했으며 10월에 중공중앙의 지시로 동북에 파견되였다. 1930년에 중공북만특별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에서 활동했다. 4월에 아성에서 농민들의 소작쟁의 투쟁을 지도했고 5월에 화요파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할빈 소재 일본령사관을 파괴했으며 6월에 중공아성위원회를 결성하고 서기가 되였다. 1930년 11월 중공만주성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였고 1931년 1월 중공북만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였으며 같은 달 중공만주성위원회 파견으로 중공할빈시위원회 대리 서기 겸 조직위원이 되였다. 2월에 성당위원회의 파견으로 봉천에 가 중공봉천시특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서기가 되였다. 4월에 성당위원회의 파견으로 료서(遼西)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 서기가 되였으며 5월에 길림성 반석에 가 반석현 제1차 당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공반석현위원회의 설립을 지도하였다. 8월에 료녕성 청원현에 가 중공청원현위원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9월에 중국혁명호제회 상해한인분회에 가입했고 12월에 중공상해한인지부 책임자가 되였다. 1932년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에 몰두하였다. 12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여 1933년 12월에 조선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주: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일제 패망 후 선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통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등을 력임했으며 1950년 6월 3일 사망했다. (자료 출처: 《중국공산당흑룡강성조직사자료》, 《중국공산당료녕성조직사자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등)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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