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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85] 북경대학 김경일교수님을 기리며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11-09 14:46:44 ] 클릭: [ ]

〇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2021년 11월 8일, 항상 존경하는 북경대학 외국어학원 조선언어문화학과의 김경일교수님의 서거 1주기가 된다. 지난해 5월 28일에 마지막으로 위챗으로 련락드린 후 반년도 되지 못해 교수님은 불치의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2017년에 교수님은 저의 모교인 북경대학을 은퇴하셨지만 중국, 한국 및 일본 등 동북아지역에서 한창 정력적으로 활약하시다가 참으로 아까운 생을 너무나도 급작스레 마감하시였다. 전혀 예상없이 들이닥친 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잘 믿겨지지도 않고, 믿기도 어려운 심정이다.

촬영애호를 가지고 있는 고 김경일교수님

비록 교수님 밑에서 직접 공부를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교수님의 제자라는 생각을 가져왔다. 돌이켜보니 교수님과의 인연도 이제 거의 30여년이 가까온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마도 1992년 8월이 첫 만남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였다. 친구의 소개로 당시 아시안게임촌(亚运村)내에 있는 오주호텔(五洲大酒店)에서 개최되는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학생 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이 학술 대회는 국제고력학회(본부: 일본 오사카)가 주최한 조선학 국제학술대회로서 중국, 조선, 일본, 로씨야, 인도, 오스트랄리아, 독일 등 나라 외에도 당시 아직 중국과 수교하지 않은 한국 학자들도 대거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김경일교수님은 대회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담임하셨다.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나로서는 당시에는 제대로 리해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참가한 학술대회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에서 북경대학 최응구교수님이 국제고려학회 회장으로 당선되였으며 대회 페막식은 인민대회당 연회청에서 개최되였다. 인민대회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상이 가장 깊은 것으로 우리 선배 학자들의 활약에 다시금 탄복하게 된다. 인민대회당에서 조선반도 관련 학술대회 페회식을 개최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것으로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 김경일교수, 김훈교수, 중앙당학교의 조호길교수, 대외경제무역대학의 서영빈교수 등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족 중견학자들의 활약으로 인해 대회는 성공리에 개최되였다.

그후 조선, 한국 도서를 빌려보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도서실에 갔을 때 교수님을 자연스럽게 여러차례 만나 뵙게 되였다. 만날 때마다 교수님은 항상 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제가 석사공부를 할 때 우연하게도 교수님이 대학 교실에 와서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여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였다. 후에 알고 보니 교수님은 박사 공부를 하기 위해 40대인데도 젊은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학업에 열중하셨던 것이였다. 2001년에 제가 일본에 박사 공부 하러 류학간 뒤 얼마 되지 않아 교수님은 48세에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시였다. 후에 박사학위 론문은 학술저서 《중국의 조선전쟁 참전기원》(론형, 2005년 출판)이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였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졌다. 제가 석사 공부를 마칠 적에 일본 류학에 대해서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때마침 교수님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일년 동안 방문학자로 다녀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쪽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교수님의 소개를 통해서 저는 일본 게이오대학의 유명한 조선반도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님 휘하로 박사 공부하러 떠나게 되였다. 오코노기교수님은 저의 류학 신청을 받고 김경일교수님께 저의 사정을 문의하셨으며 이에 교수님께서 지지와 협조의 말씀을 해주셨기에 제가 순조롭게 일본에 류학 가게 되였다. 일본에 류학갈 때 김경일교수님은 오코노기교수님은 참으로 유명한 분이시니 게이오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일본에서 류학 공부 할 때 학술회의 차로 일본에 오시는 교수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만날 적마다 깊은 가르치심을 받았으며 저도 항상 교수님과의 만남을 소중한 기회로 간주해 왔다. 제가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가서 대학 강의를 할 때에도 조선반도 관련 세미나에서 수차 만나 뵈였으며 교수님과의 인연은 같은 연구자로서 계속 이어지게 되였다.

2013년에 북경에 돌아온 후에 교수님은 자신이 주최하시는 북경대학 조선반도포럼에 흔쾌히 초청해주셨다. 이 포럼은 교수님이 2010년부터 3개월에 1회씩 개최하는 조선반도 관련 세미나로서 여기에는 북경대 교수들 뿐만 아니라, 중앙당학교, 중국사회과학원, 인민일보, 신화통신사 등의 유명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하였다. 때로는 조선, 한국 및 일본의 학자, 전문가들과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까지 70여차의 포럼을 운영해 오시였다.

2014년 10월부터는 교수님이 맡으신 한국 《내일신문》 중국 시평에 집필진 일원으로 저를 받아들여 주시였다. 이 중국 시평은 교수님이 2010년 10월부터 북경대학, 중앙당학교, 연변대학 등 조선반도 연구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한주일에 한편씩 관련 칼럼을 발표하는 중요한 플래트홈이였다. 7, 8명의 교수님들이 륜번으로 10여년 넘게 발표해왔으며 교수님은 병환에 계시면서도 지난해 4월에 마지막으로 한편을 남기시였다. 그동안 교수님은 150여편이 넘는 칼럼을 발표하시였다. 저도 이 시평 집필에 참여하면서 조선반도 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보다 폭넓은 리해를 가지게 되였다.

2015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된 중, 한, 일 국제심포지엄에 김경일교수님(앞줄 우2)과 함께 참석한 필자(두번째줄 좌1)

지난해 5월 말, 교수님으로부터 갑자기 이제부터 칼럼을 쓰지 못하니 자신을 대신해서 운영을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련락을 받았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워 그 리유를 문의해보았지만 설명이 없이 부탁만을 남기셨다. 당시 교수님의 병환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교수님이 믿고 맡기시는 것이기때문에 그 부탁을 수락하게 되였다. 얼마 후에 교수님의 불치병 소식도 듣게 되여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여 만나뵙고 싶었지만 사모님과의 통화를 통해서 치료에 전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찾아뵙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반년도 되지 않아서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코로나 사정으로 인해 교수님의 추도식은 열리지 못하고 유체 고별의식만을 팔보산(八宝山)장의관에서 거행했지만 전국 각지와 한국, 일본 그리고 주한중국대사관, 주조중국대사관 등 해내외 많은 곳에서 보내온 화환으로 교수님과의 고별의식을 장식하였다. 교수님의 생애에 대한 존경과 평가를 충분히 보아낼 수가 있었다. 당일 사모님을 만나뵈였지만 병환에 계신 교수님을 한번도 뵙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워 위로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김경일교수님의 한생은 중국에서 태여나서 걸어온 우리 조선족들의 삶의 한단면을 충분히 보여주셨다. 교수님은 1953년 1월에 길림성 돈화시의 어느 한 시골에서 삼형제 중의 둘째로 태여났다. 열여덟의 나이에 군에 입대했으며 제대된 후에는 기계공장에서 근무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후에 교수님은 25세의 나이에 연변대학 중문계에 입학하였다. 25세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할 나이지만 교수님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 고심한 자학을 통해 연변대학에 끝내 입학하였던 것이였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중앙민족어문번역국에 배치되였으며 번역국의 부편심, 《민족역단》 편집으로 근무하였다.

1992년에 북경대학 조선어학과에 전근되여 2017년에 은퇴하실 때까지 조선어학과 주임, 조선문화연구소 소장, 중한우호협회 리사, 일본게이오대학 객좌교수, 연변대학 겸직교수, 한국 동국대학 특약편집 등 해내외 여러 학술직을 담임하시였다. 김경일교수님은 조선반도 문제, 나아가 동북아지역 연구의 저명한 국제관계 전문가였다. 교수님의 저서 《중국의 조선전쟁 참전기원》은 국내외 학계의 인정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교수님이 떠나신 후,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조선반도 연구에서 남겨놓은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말씀을 저에게 들려주시군 한다. 일본 게이오대학 오코노기교수님은 김경일교수님과의 학술교류를 통하여 조선반도 문제에 연구에 있어 균형 있는 시야의 중요성을 알게 되였다고 지적해주시였다. 특히 조선반도 문제 연구에 있어서 지정학적 영향을 완화시키고 지경학적 접근을 강조하시는 교수님의 주장은 지금도 참으로 의미가 깊다. 교수님의 문장은 항상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진보, 보수 진영에 관계없이 교수님의 객관적이고 예리한 분석과 론리적인 관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김경일교수님은 조선반도 문제 뿐만 아니라 조선족 연구에 있어서도 걸출한 학술성과를 남기시였다. 1990년에 북경에 있는 젊은 학자와 대학생들을 조직하여 《중국조선족이민실록》(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출판)을 집필, 편집하였다. 1989년 음력설 기간을 리용하여 길림, 료녕, 흑룡강 동북3성의 도시와 농촌 이민 1세대 60여가구를 직접 취재하고 기록을 남겼다. 기록에 나오는 이민 1세대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이 기록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 부주임의 격려사와 전임 연변대학 부교장이셨던 정판룡교수님의 머리말도 참으로 의미 깊은 글들이였다. 이 때에 이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이렇게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사료로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후학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된다. 교수님은 1995년에 《중국조선족문화론》(료녕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으며 이 글에서 월경민족, 변두리민족, 이주민족, 천입민족, 과경민족으로 불리우는 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학문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아마도 조선족문화론을 가장 먼저 학술적으로 제기한 연구라고 사료된다.

교수님은 학자인 동시에 교수로서 훌륭한 교육자셨다. 수백명의 학부생을 제외하더라도 배출시킨 석, 박사생은 30명이 넘는다. 특히 교수님이 배양한 제자들은 북경대학, 상해외국어대학, 상해정법대학, 천진사범대학, 로동(鲁东)대학 등 대학 뿐만 아니라 당중앙 대외련락부, 중국 외교부, 중국사회과학원, 신화통신사, 중앙민족언어번역국, 중국국제문제연구원,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상해국제문제연구원 등 여러 기관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중에는 여러 명의 조선족출신 제자들도 있다. 또한 여러 명의 한국 류학생들도 배양해냈으며 원광대학 교수, 국회의원 비서 및 전문 기자들도 있다. 교수님이 배양한 후학들은 현재 중국의 조선반도 문제 연구에 있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금후에는 주도적 역할을 발휘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2018년부터는 한국 연세대학의 문정인교수, 일본의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와 손잡고 중, 한, 일 3국의 조선반도 연구 차세대 연구자 교류를 위해서도 많은 정력과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저도 교수님의 덕분으로 이 교류 네트워크에 참가하여 많은 젊은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였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교수님이 마련해 준 교류가 당분간 지속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안정되면 이 모임이 다시 활성화되리라 기대한다.

현재 교수님의 뒤를 이어 교수님의 제자와 후학들과 함께 《내일신문》 중국 시평을 계속 집필하고 있다. 또한 교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교수님의 학술성과를 집대성하는 문집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날로 복잡해지는 정세 앞에서 교수님의 학문적 계시가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 학문적 연구에 몸을 담은 이상 연구의 길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배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양해나가야 할 사명감으로 인해 어깨가 무거워진다. 찾아보니 지금까지 교수님과 단둘이서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몇년전에 출장 기회를 리용하여 연변에 있는 고향집으로 모셔서 어머니가 직접 만든 시골 두부를 한끼 대접해드린 것이 그나마 조그마한 위안이 된다. 비록 교수님은 떠나셨지만 저 높은 곳에서 항상 지지하고 앞길을 밝혀주시리라 생각하게 되니 한결 더 그리워진다.

북경에서 리성일 씀

2021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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