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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10-29 11:30:57 ] 클릭: [ ]

▧ 김동수

6. 석굴벽화의 보호신

많은 석굴들은 아직 대외 개방을 엄금하고 있었다. 해설원의 말에 의하면 문을 한번 열 때마다 자연 풍화현상으로 벽화가 손상 입는데 석굴 자체가 비좁아 자칫 부주의로 사람들의 옷에 한번 스치기만 해도 100년의 력사가 없어지거나 소실된다고 하였다.

69호 석굴 안내문

세심한 참관자들은 이곳에서 70여년전 한락연이 새겼다고 해서 부르는 ‘한씨 번호’와 현대에 들어서서 키질연구원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발굴, 연구를 거친 후 나무로 만든 둥굴문에 검은 먹으로 쓴 새로운 번호를 발견할 수 있다.

‘한씨 번호’ 가운데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거의 완전한 상태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43호’ 였다. 무정한 세월, 차디찬 진눈까비의 침습과 고비사막의 모진 모래바람의 세례를 용케도 이겨낸 ‘43호 한씨번호’는 한 동굴 입구의 오른쪽 석벽에 음각되여있었다. 모두들 감탄하며 앞 다투어 기념사진을 남겼다. 필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애국주의교양을 목적으로 이미 유람객들에게 개방한 현대 번호로 제10호 석굴은 나에게는 특별한 정감과 의의가 있는 석굴이였다.

10호 석굴은 약 기원 5세기에 판 것으로서 지면에서 약 10여메터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10호 석굴은 당시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생활하던 공간이였기에 석굴 속에는 벽화가 없었다. 10호 석굴은 측면으로 드나드는 통로와 승려들이 거주하던 거실로 이루어졌다. 현재 마찰에 의한 방바닥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 바닥이 설치되여있었다.

거실은 정방형에 가까운데 추위를 막기 위해 설치한 벽난로와 같은 생활시설이 그대로 잘 보존되여있었다. 창문 설계는 밖으로부터 모래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작게, 안쪽은 최대한 해빛을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넓게 제형 모양으로 설계하였다고 해설원이 설명하였다.

거실 북쪽 벽에는 1946년 중국 조선족 화가 한락연이 키질 벽화를 고찰한 후 석굴벽화를 보호하자는 내용으로 동굴벽에 음각하고 거기에 석회를 칠한 내리 글발이 선명하고 똑똑하게 남아있었다. 바로 옆에는 한락연의 자화상 사진과 렬사증, 그리고 유작 몇점이 전시되여있었다.

한락연의 제사가 음각되여 있는 키질 10호 석굴 안내문

해설원이 쟁쟁한 목소리로 내리읽었다.

독일 사람 르콕(Von-Lecog)이 쓴 《신강 문화 보물고》와 영국 사람 스타인﹙Sir-AurelStein﹚이 쓴 《서역 발굴기》라는 저작을 읽고 신강에는 고대 예술품들이 풍부하게 매장되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따라서 신강에 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하여 1946년 6월 5일 혼자 이곳에 찾아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벽화들을 보니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 있는 동굴들이 이에 비할 바가 못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벽화는 외국 발굴단들이 긁어가버렸다. 이는 문화상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4일 거주하면서 유화 수폭을 모사하고 더욱 충분한 준비를 하고 다시 오려고 돌아갔다. 다음해 4월 19일 조보기(赵宝琦), 진천(陈天), 번국강(樊国强),손필동(孙必栋) 등을 거느리고 두번째로 이곳에 왔다. 먼저 번호를 달았는데 정부호로 75개 동굴이였다. 그 다음 모사, 연구, 기록촬영, 발굴 등 작업을 하였는데 6월 19일에 잠시 한단락을 끝마치였다. 우리의 귀중한 고대문화를 발양하고 더욱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께서는 특별히 아끼고 보존하기를 부탁드린다.

한락연 6. 10

마지막에 13호 동굴 아래에서 하나의 완정한 동굴을 발견하고 6일 60공을 드려 발굴하였다.벽화가 새롭고 특이하였는데 ‘특 1호’라고 명명한다.

6. 16

현재의 10호 석굴

랑독이 끝났지만 동굴 안은 물 뿌린 듯이 조용하고 사람들은 발이 묶인듯 움직일 줄 몰랐다.

아버지의 얼과 혼이 력력히 서려있는 글발을 응시하는 한건립녀사의 눈가에도 모든 사람들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창문으로 따뜻한 정오의 해살이 그 날의 그 때를 투영해주듯이 방안에 부채살같이 쏟아져내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이는 키질석굴 문화유산에 대한 한 예술가의 절절한 사랑과 그것을 자신의 눈동자처럼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와 심령의 고백이고 웨침이다. 또한 한락연의 위대한 공적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이고 평가이다.

아쉬운 것은 동굴 안에서 일체 촬영이 금지되여있었다. 나는 묵묵히 세번 허리 굽혀 절하고 맨 나중에 동굴을 나섰다.

독일 사람 르콕(勒库克)과 영국사람 스타인(斯坦因)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엇 때문에 제사가 6월 10일과 6월 16일 이틀에 나누어 새겨졌을가?

무한대학 교수이며 박사생 지도교수였던 진국찬(陈国灿)이 집필한 《투루판학을 론함》(论土鲁番学)이라는 저서에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르콕(1860―1930)은 독일 베를린 민속학박물관 사업일군으로서 1904부터 1914년 사이에 우리 나라 투루판, 쿠처(库车), 언치(焉耆) 등지의 불교석굴과 유적지에서 대량의 문물 발굴을 하였고 많은 벽화를 절단하여 불법적으로 베를린까지 운반하여 갔다. 1926년 그는 《신강 고대 미이라 유적지 고찰기―독일 제2, 제3차 투루판 고찰보고》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속에는 키질, 쿠무투라 석굴의 벽화를 긁어간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책을 1934년 남경몽장위원회(南京蒙藏委员会)에서 《신강문화보물고》(新疆之文化宝库)란 제목으로 정보선(郑宝善)의 중역본(中译本)을 출판하였다.

스타인(1862―1943)은 웽그리아 후예인 영국 고고학자로서 1900년부터 1915년 사이에 투루판, 쿠처 키질, 쿠무투라, 돈황막고굴, 내몽골 흑성자(黑城子) 등지에서 대량의 문물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는 대량의 문물과 문서들을 불법적으로 런던까지 운반하여갔고 일부를 인도의 뉴델리국가박물관에 남겨놓았다. 1936년 상해중화서화국(上海中华书画局)에서 《스타인의 서역발굴기》(斯坦因西域考古记)란 제목으로 향원(向远)의 중역본을 출판하였다.

한락연의 제사가 음각되여 있는 키질 10호 석굴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한락연이 읽었다는 저작이 바로 상술한 두 책이였다.

고찰대가 떠나려고 준비하던 날이였다. 한 동굴 아래에서 휴식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지면의 흙이 아래로 흘러내린 곳에 작은 구멍이 생겨난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손으로 흙을 파내자 그 속에서 여직껏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동굴이 발견되였다. 한락연은 떠나려던 날자를 뒤로 미루고 새로운 동굴을 정리하고 발굴하였다. 한락연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발굴은 수확이 적지 않았다. 벽화가 새롭고 신기하였는데 다른 동굴에서는 보지 못하였다. 일부가 지진으로 파괴된외에 기본적으로 완정하였다. 새로 발견한 동굴 벽화를 완전히 모사하려고 일주일간 연장할 수 밖에 없었다. 새로 발견한 동굴의 인위적인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문열쇠를 안장하고 당지 로백성에게 맡겨 관리를 위탁하였다. 배성현정부에서도 통령(通令)을 내렸기에 이후에는 진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사는 16일에 결속되였다. 한락연은 이 동굴을 ‘특1호’라고 명명하고 진천을 시켜 동굴 벽에 보충하여 새기게 하였다. 이렇게 한락연의 제사는 두번에 나누어 문장이 완성되였던 것이다.

‘10호 석굴’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한락연이 ‘특1호’라고 표기한 현재 번호로 ‘69호’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 옆 안내판에는 “69호 동굴은 약 기원 7세기에 판 것인데 1947년 중국 조선족 화가 한락연이 발굴 정리하였다”고 적혀있었다. 구도가 특이하고 예술풍격이 다양한 69호 석굴은 왕실에서 공양하던 석굴로서 벽화에는 쿠처국왕과 왕후가 그려져있다고 해설원이 설명하였다.

키질석굴 69호 앞에서의 필자

신강예술학원 교수이고 다년간 키질석굴 연구에 종사해온 사효명(史晓明)은 “69호 석굴에 대한 위대한 발견은 한락연선생이 키질석굴 예술과 고고학 연구의 개척자로 되기에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키질석굴을 떠나는 아쉬운 시간이다. 차창 밖으로 사품치며 흐르는 미간하며 구마라심상이며 석굴들이며 다정다감했던 키질연구원 사람들의 모습이 차츰차츰 멀어지며 작아졌다. 그러나 오늘도 래일도 키질벽화의 영원한 수호신으로 남아있을 한락연의 거대한 형상은 마치도 실크로드의 모래사막을 걷고 걷는 락타처럼 눈앞에서 커만 같다. 마음속으로 자작시 한수를 묵묵히 읊조리였다.

석굴은 의구한데

사람은 간 곳 없고

소슬한 가을바람에

가랑잎 날리네

위인의 장한 뜻

키질석굴에 새겨있고

이루지 못한 꿈은

사막의 무지개로 피네

미간하 맑은 물 루루천년 흐르고

불멸의 그 이름―한락연

실크로드 하늘에

영원히 메아리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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