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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8)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10-21 17:20:40 ] 클릭: [ ]

▧김동수

3. 진천의 일기

운 좋게도 바로 나의 옆방에 진운강선생이 투숙하고 있었다. 나는 절호의 기회를 타서 진운강선생을 단독으로 만났고 그의 아버지 진천과 한락연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하였다.

1947년 여름, 키질석굴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진천(진운강 제공)

진운강선생은 “아버지 진천은 당년에 한락연의 조수로 키질천불동에서 사업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매일 일기를 적었는데 아쉽게도 동란의 년대에 대부분 분실되고 일부가 남아있는 것을 제가 정리하였습니다.”고 말하면서 진천의 일기 한편과 색 바랜 사진 2장을 필자에게 제공하여주었다.

이 소중한 일기를 통하여 한락연과 진천과의 친밀한 관계를 알아볼 수 있고 그들 일행이 키질천불동까지 진출하던 정경과 천불동에서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료해할 수 있었다. 진실성과 리해의 편리를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1946년 무더운 여름철의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거리에서 우연히 한락연선생의 개인 그림전이 열린다는 광고 전단지를 보았는데 날자가 이미 제일 마지막 날자로 다가와있었다.

나는 급급히 전단지의 주소 대로 전람이 열리고 있다는 적화 서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소학교로 달려갔다. 열렬한 미술 애호가였던 나는 주변에서 열리는 소유의 미술전을 한번도 빼놓지 않고 죄다 참관하군 하였다.

한달음에 전람실에 들어서니 정말로 아름답고 눈이 부셨는데 너무나도 사람을 감동시키고 흥분시켰다.

나는 미술에 대하여 흥취는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몰랐고 더우기 한락연선생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서는 더욱 몰랐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매우 호감이 가고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찬탄하게 되였다. 전시한 작품들은 모두 신강지구 소수민족들의 생활풍경들을 담은 수채, 유화, 사생 작품들이였는데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반복하여 자세히 둘러보고 또 보았다.

솔직히 나는 한낮 평범한 미술 애호가로서 미술이라는 대문에 들어서기를 오매불망 갈망하는 학동(学童)이였다. 종일 어디에 가면 마음에 드는 훌륭한 미술 선생을 모실 수 있을가 하고 골몰하고 궁리하던중이였다. 무슨 조건이든지 개의치 않고 잡일을 시키는 한편 미술을 가르쳐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었는데 이 넓고넓은 세상에서 어디에 가서 그런 선생을 찾는단 말인가고 스스로 고민하였다.

갑자기 이 분을 미술 선생으로 모실 수 없을가 하는 기발한 생각이 번개 같이 나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는 얼른 전람실에서 나와 종이 한장과 필을 얻어가지고 창턱에 엎드려 짤막한 편지를 썼다.

나는 그 무슨 수식어나 아름다운 언어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을 평생을 통해 추구하는 리상과 사업으로 간주하고 도처에서 미술 선생을 찾고 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고 오늘 우연히 기회를 만나서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생각과 솔직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달갑게 학도로 되여 선생님을 방조하여 맡은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덧붙이였다.

내가 편지를 쓰는 사이에 전시가 끝나고 그들은 한창 뒤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주저나 부끄러운 생각을 할 새 없이 한 일군에게 편지를 넘겨주며 한락연선생에게 꼭 전해줄 것을 재삼 부탁하였다.

말은 그랬으나 가능성이 있으리라고는 근본 생각지도 않았다. 함께 전시를 보았던 사람들도 꿈같은 허황한 생각은 버리라고 충고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미 편지를 보냈으니 안되면 말고 될 대로 되라고 나는 별 희망을 걸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와서 수화기를 들고 보니 바로 그림 전시를 열었던 한락연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는 편지를 이미 받아보았는데 한번 만나서 내가 제기한 청을 이야기하자면서 그가 머물고 있는 주소지를 알려주었다.

순간 나의 마음은 더없이 격동되고 설레이였다. 원래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쪽빛같은 희망이 생겼으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1942년, 항일전쟁 시기 나는 당시 일제의 강제 점령 구역이였던 고향 소북(苏北) 지구를 뛰쳐나와 국민당 구역에 있는 한 전시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초중을 채 졸업하지 못하였을 때 일제는 이미 절반에 가까운 중국 령토를 점령하였다. 많은 열혈청년들은 항일에 대한 불 붙듯한 욕망을 안고 분분히 일떠나 모두 항일의 대오를 찾아 가입하였다. 나는 먼저 란주에 갔다가 후에 신강으로 왔다.

한락연선생의 전화는 나에게 열정과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나는 부리나케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1947년 한락연이 그려준 진천의 화상

중년인 그는 몸이 튼튼하고 건장하고 혈색이 좋았으며 정력으로 충만되여있었다. 그는 발음이 똑똑하고 말소리에 힘이 있었다. 그는 아래우에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머뭇거림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너의 편지를 이미 받아보았다. 보건대 너는 진보를 간절히 바라는 지향 있는 청년같은데 너의 요청 대로 나의 학생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고 말머리를 떼였다. 그리고는 앞으로의 타산과 계획들을 말하였는데 신강에서 3년에 거쳐 미술 고고학(美术考古) 공작을 진행하려고 지금 한창 준비중이라고 하였다.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쿠처 키질천불동에 대한 고찰과 벽화 모사인데 이것은 3년 가운데서 중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하고 있는 일과 의의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주었는데 키질천불동은 그 규모로 보면 돈황 다음으로 전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두번째로 큰 석굴이다. 그 력사와 예술적 가치로 보면 키질천불동은 불교 예술이 동으로 중국에 전파될 때의 제일 첫 기지로서 중국 문화가 불교예술을 흡수하던 과도 시기의 중국 불교예술을 연구하는 중요한 리정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일 아쉬운 것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예술 유산이 국내 사람들의 주의와 중시를 불러일으키 못하는 것이다. 그는 향달(向达)이 중문으로 번역한 스타인(斯坦因)의 《서역 발굴기》(西域考古记)를 내보이며 이것은 영국의 문화 강도들이 우리 나라 신강에서 미술품을 략탈해간 자기공술서(自我供状)나 다름 없다. 프랑스, 독일, 일본, 스웨리예 등 나라들도 같은 수작을 벌이였다. 하여튼 그들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갔다. 많은 벽화들도 절단하여 가져갔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나는 현재 석굴을 고찰하고 벽화를 모사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책으로 묶어 출판하여 국내외에 조국의 우수한 문화예술을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또한 전시했던 작품들과 물건들을 집중하여 란주에서 서북고대미술박물관을 세우려고 하며 미술학교도 꾸리려고 한다. 우리의 사업은 웅위롭고도 위대한 사업이다. 이 위대한 사업은 오직 위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담당할 수 있고 완성할 수 있다. 학생은 이런 사업에 흥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만약 정말 바라고 원한다면 우리는 함께 갈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말은 내가 전에는 듣지도, 생각지도 못하였던 너무나 새롭고 신선한 것들이였다.

나는 비록 문화유산이나 고고학 등에 대하여 금시초문이였지만 민족 문화의 존엄을 수호하고 외국의 략탈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박물관을 세워야 한다는 도리만은 알 것 같았다. 더우기 미술학교를 세워 미술에 지향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학습할 장소를 마련해준다고 하니 나는 내심으로 매우 감격해하며 더욱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당장에서 나를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이 거창한 사업에 참가시키겠다고까지 하니 아직 세상에 입문도 하지 않은 무식한 청년학생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하늘에서 호박이 넝쿨 채로 떨어진 격이였다.

나는 입으로 연신 “제가 원해요, 원합니다. 선생님께서 짐과 그림 상자를 메라면 메고 천산 남북을 돌아다니라면 다닐 것이며 파미르고원(帕米尔高原)에 오르라면 오를 것이고 고비사막에 들어가라면 들어가겠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나의 결심을 표시하였다.

그는 이번 사업의 성질은 완전히 개인이 경영하는 문화사업으로서 관방과는 아무런 조직적인 관계가 없다. 때문에 어디에 련루될 것도 없다. 간혹 사회 명류들이나 신사, 혹은 활동가들이 우리를 지원할 수 있는데 우리는 환영한다. 그러나 이런 사업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흥취가 없어한다. 나의 사업 경비도 역시 자체로 마련한 것으로서 그 어떤 외국인이나 혹은 관방의 원조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팔아 낡은 차 두대를 사서 운수업을 경영하여 벌어드린 돈으로 우리의 지출을 담당하고 있다. 너까지 오면 우리는 모두 세사람인데 조보기(赵宝琦)가 사진촬영을 맡고 있다고 하면서 옆에 앉아있는 나보다 조금 커보이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 청년은 당지 사람으로서 원래 신강일보사 기자였는데 이 사업을 열애하여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한선생은 계속하여 너는 나를 도와 모사 기록을 하면 되는데 원칙상에서 반나절은 공작하고 반나절은 학습한다. 너희들의 생활비용은 내가 전부 책임진다. 이번 전람 후에 나는 란주에 가서 회화 재료와 공구, 서적, 의약 등 필수품들을 구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더러 그 사이에 간단한 위생상식을 학습하여 절반 의사를 담당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우선 우리 자체의 수요이면서도 다른 한면으로는 당지의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신강에서 반드시 그들의 방조를 받아야 함으로 우리도 그들에게 뭔가 도움을 줘야 한다. 대개 명년3, 4월경에 신강에 와서 키질천불동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그에게 편지를 쓰고 이상과 같은 그의 담화를 듣기까지의 달랑 3시간내에 나의 운명은 180도로 완전 바뀌였다.

그의 이야기는 강한 고동력과 감화력이 있었는데 나와 그의 감정과 의지를 완전히 하나로 융합시키였다. 그는 태도가 온화하고 붙임성이 좋았고 틀거지가 없었다. 그는 남강에서 사생하던 때의 재미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아이스크림도 사주었다.

갈라질 때 그는 앞으로 적화에 이틀간 더 머물 예정인데 래일 다시 오면 나에게 소묘의 기본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약속 대로 그가 거처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는 책상 우에 자기가 신고 다니던 허리까지 오는 긴 가죽신을 올려놓고 나에게 어떻게 화면으로 옮겨오며 어떻게 구도를 잡고 륜곽을 나타내는지를 가르쳐주고 나더러 그리게 하였다.

내가 한참 그림을 그리는데 성이 구(瞿)씨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륜곽이 기본상 나타나자 우리에게 명암과 체적을 그리는 법을 가르쳤고 마무리에서는 그림이 잘된 점과 아쉬운 점을 지적해주었다.

그는 내가 그린 그림은 비교적 리지적이고 조금 굳어있고 리성적인 면이 많은 반면 성이 구씨인 청년이 그린 그림은 연하고 부드럽고 감성적인 면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나의 생활경력과 관계되며 구씨라는 청년의 그림은 그의 가정환경, 교양과 관계되는데 예술상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표현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예술은 곧 개인의 특점을 요구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나는 처음으로 미술가의 지도를 받았는데 나의 미술인생에서 첫번째로 되는 미술 계몽교육이였다.

그가 란주로 돌아간 후 나는 그의 말 대로 기초적인 의료상식과 경상적으로 쉽게 발생하는 병들에 대한 처방과 치료방법들을 학습하였다. 그리고 한쪽으로 정물 사생을 련마하면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란주로부터 적화에 왔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한선생을 대신하여 차를 관리한다는 리향항(李向恒)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일찍 일본에 류학하여 정법을 전공하였으나 귀국 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모두들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눈치였다.

그가 두 자동차를 경영하는 경리였다. 그는 매우 붙임성이 좋았는데 아무런 스스럼 없이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한선생은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전부 준비해가지고 왔으며 산단배려직업학교의 두 학생까지 거느리고 왔는데 한 학생은 성이 반(攀)씨이고 다른 학생은 성이 손(孙)씨였다. 그 두 학생은 주단짜기를 배우는 학생들이였는데 우리를 따라 키질에 가서 벽화 도안을 모사하여 주단을 설계하는 데 참고로 삼는다고 하였다. 나는 나와 년령이 비슷한 두 학생과 쉽게 사귀고 서로 어울렸다.

 1947년 여름, 키질석굴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진천

얼마 후, 우리는 함께 키질천불동으로 향해 출발하였다.

언치(焉耆)에 도착하여 며칠 묵었다. 이곳은 적화에서 남강으로 가는 도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지방이였다.

도시는 가없이 망망하게 넓은 평원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꽤나 넓은 개도하(开都河)가 이곳에서 보스텅호수(博斯腾湖)로 흘러든다. 보스텅호는 수면이 거울면같았고 산은 옥같이 푸르렀다. 언치 이북은 몽골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화청(和靖), 화석(和硕)현으로서 고금중외에 이름이 높은 화석마(和硕马)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였다. 영양가 높은 야생버섯도 매우 향기로왔지만 그보다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과 오염되지 않고 빼여난 자연경관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흡인하였다. 때 맞추어 한 몽골족 왕족이 집회를 벌리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학습하고 안계를 넓히였다.

우리는 언치에서 쿠처에 도착하여 통역을 찾았다. 이 지역에서 통역이 없이는 촌보난행이였다. 남강지역에는 한족이 적었다. 시장에 들어서면 마치도 이국 타향에 온 듯한 느낌이였다. 우리는 끝내 한어를 할 수 있는 30여세의 위글족 청년을 우리들의 통역으로 찾았는데 그는 매우 총명하였다.

쿠처는 한창 살구꽃이 만발하는 시기였는데 말 그대로 살구꽃 향기가 십리 밖까지 퍼졌다.

쿠처로부터 키질로 가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창 가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곳에는 국민당의 한개 영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토치악 장군과 관계를 통하여 인사를 나눈 영부의 곽영장은 총을 멘 한 전사를 파견하여 키질까지 우리의 안전을 보호해주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영부의 찌프차로 우리들을 키질천불동까지 실어다 주었다.

천불동 앞에는 대여섯가구의 농민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한집은 동굴과 매우 가까왔는데 전반 석굴의 중심부에 위치해있었다.

석굴 앞으로 당지 사람들이 무짜티하(木扎提河)라 부르는 그닥 크지 않은 강이 좔좔 소리내며 흘렀는데 강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흘러 타림하에 흘러든다고 하였다. 그 강의 남쪽은 그닥 높지 않은 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물은 협곡 사이로 물곬을 내였는데 강 북쪽의 모래사막의 침식으로 이루어진 충적지대는 비록 넓지 않았으나 매우 비옥하였다. 한창 여러가지 농작물이 매우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소소리 높이 자란 백양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석굴은 바로 강 북쪽의 절벽에 위치해있었다. 오랜 세월의 침습과 력대로 되는 전란으로 조각은 많이 파괴되였고 벽화들만 남아있었다.

우리는 석굴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집에 우리들의 거처를 잡았다. 마침 집 앞에 두칸짜리 빈집이 있어 우리가 빌려 사용하기로 하였다. 우리 다섯사람이 큰 방을 사용하고 한선생이 작은 방을 차지하였다. 침대가 없어서 우리는 땅에 풀을 펴고 그 우에 침구를 깔고 잠을 잤다.

우리가 알아보니 집주인은 당년에 외국 발굴대의 길잡이를 했는데 이 집에서는 그의 큰아들이 살고 있고 그와 둘째아들은 웃마을에 가서 산다고 하였다. 그 로인은 중국 사람들의 발굴대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즉시에 달려와서 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환영을 표시하였다. 로인은 이미 고희가 넘었지만 신체가 매우 건장하였는데 의연히 둘째와 같이 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이곳으로 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그는 우리에게 당년에 외국 발굴대가 많은 문물을 도굴해가던 정황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일체 편리를 제공하고 우리를 도와 먹는 문제와 통역도 담당해주겠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계획 대로 일을 시작하였는데 첫번째 일은 번호를 매기는 것이였다. 번호를 달려면 먼저 그림이 그려져있는 동굴을 전부 찾아내야 하였다. 동굴은 여러 층으로 나뉘여 위치해있었는데 어떤 동굴은 20여메터 높이에 있었고 통로도 단절된 상태였다. 높은 사닥다리가 아니면 근본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에 가서 사닥다리를 구한단 말인가? 부득불 자체로 사닥다리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서 높게 자란 백양나무 한가지를 사서 껍질을 죄다 하얗게 벗기고 외가닥 사닥다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휘청거리는 이 높다란 사닥다리를 타고 동굴 속에 들어가 벽화의 상태를 고찰하였고 동굴 문 옆벽에 번호를 음각하고는 흰 석회를 채워넣어 선명하고 똑똑하게 보이게 하였다. 이미 30~40년의 세월이 흘러 몇개의 동굴에 벽화가 있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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