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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리동광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10-20 09:55:44 ] 클릭: [ ]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1. 성급 중공 지도간부

(중공 만주성위원회 위원, 남만성위원회 위원, 북만성위원회 위원, 길동성위원회 위원, 송강성위원회 위원)

리동광(李東光, 1904—1937): 중공남만림시특별위원회 서기, 중공남만성위원회 조직부 부장

원명은 리상준(李相俊)이고 별명은 손세현이며 리동일(李東一, 李東日)이라고도 불렀다. 1904년 1월 23일(음력)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여나 1918년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훈춘현 대황구로 이주했다. 1922년에 룡정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연구회, 독서회 등 사회주의사상단체에 참가하였다. 1925년 여름 생활난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대황구에서 삼일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1926년에 다시 동흥중학교로 돌아가 공부하면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가입하였고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 사건’ 당시 체포되여 룡정감옥에 투옥되였다. 10월말에 탈옥하여 남만의 반석 일대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7년말부터 1928년까지 반석모범소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혁명활동을 하다가 1928년말부터 남만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30년 8월 중공반동(磐東)구위원회 서기로 되였다. 이 때부터 9.18사변전까지 중공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좇아 반동항일근거지를 설립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농민을 지도하여 ‘항조항량’(抗租抗粮)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반동지구에 농민협회, 부녀회, 아동단 등 대중조직을 설립하였다. 1931년 9.18사변 후 리홍광을 도와 로농적위대 즉 주구숙청대를 설립했다. 1932년 4월, 호란진(呼蘭鎭) 집장자(集厂子)에서 반일봉기를 발동하여 반석 일본경찰서 경찰 아리끼(有木)와 한간주구들을 처단했다. 그 해 5월에 반석로농의용군 결성에 참여하고 10월에 양정우를 협조하여 일제가 발동한 4차례의 포위토벌을 분쇄하였으며 버리하투를 중심으로 한 홍석립자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했다.

1933년 5월 7일, 중공반석중심현위 서기가 되였다. 이후 1934년 8월까지 괴자항(拐子抗), 버리하투, 반석, 의통, 서안 등 5개 구당위원회, 강남, 반동의 2개 특별지부, 길해철도(길림—해룡)의 2개 직속 지부를 회복, 건립하고 477개 농민자위대 분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길해철도의 로동운동을 지원, 지도하여 2개 당지부, 1개 단지부, 6개 공회소조를 설립하였다.

1934년 8월 20일에는 반북에서 반일회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남만반일총회를 설립하였다. 1933년 5월 22일, 양정우를 협조하여 우군인 마퇀(馬團), 조퇀(趙團), 천호(天虎) 등 반일부대의 1,000여명과 련합하여 항일군사위원회 즉 군사련합지휘부를 설립하였다. 1933년 9월 18일, 양정우를 도와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재편하였다. 독립사가 설립된 후에는 양정우를 협조하여 부대내에서 정치위원제도를 실시하고 사와 퇀부에 정치부를 두고 련에는 지도원을 두어 부대로 하여금 당의 절대적인 령도 밑에 있게 하였다. 1934년초, 적위대의 골간과 현당위원회, 구당위원회의 우수한 당원간부들로 무장사업대를 편성하였으며 원덕승(袁德胜)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반석, 의통, 화전, 휘남 등 강북의 광활한 지구에 진출하여 놈들의 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유격전을 진행하였다. 11월 5일, 중공남만림시특별위원회 서기로 되였다. 1935년 8월 27일, 림강, 금천, 류하 3개 현의 접경지구에서 남만민중대표대회를 열고 남만특구정부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남만인민혁명정부를 창립하여 당의 통일전선 정책을 가일층 관철하였다. 이리하여 1935년 10월까지 남만 56개 지방에 인민정부가 세워졌다.

1936년 봄, 동북인민혁명군과 각 항일무장부대가 동북항일련군으로 재편성되자 위증민, 양정우와 함께 6월에 중공동남만특별위원회 대표와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의 련석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항일련군 제1군과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편성하였으며 동만과 남만의 당조직을 통합하여 중공동남만성위원회(후에 중공남만성위원회로 고쳤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중공남만성위원회 조직부 부장이 되였다. 이후 1936년 여름부터 1937년 6월까지의 1년 기간에 동북항일련군 제1군 군부와 함께 행동하면서 제1로군의 지도일군들과 함께 항일련군이 료서, 열하 지구에 진출하여 관내의 홍군과 직접 련계를 맺는 원정 계획을 제정하였으며 양정우를 협조하여 제1로군의 각종 군사행동을 계획하였다. 이 와중에 1936년 여름부터 그 해 가을까지 양정우와 함께 통화 대황구에서 일본수비대 200여명을 섬멸하는 매복전, 집안현 룡강산 서쪽 삼도위자에서 봉천기병 교도퇀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투 등 여러 차례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특히 양정우를 협조하여 1936년 6월부터 4개월간에 무려 560여차의 전투를 치러 만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한 적들의 이른바 ‘추기동기만군독립토벌’을 분쇄하였다.

1937년 6월, 항일련군 제1군 당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제1군 당위원회를 협조하여 1년간의 당사업, 통일전선 사업, 군사사업 등을 전면적으로 총화함과 동시에 금후 투쟁의 방침과 전략전술을 연구 제정하였고 〈항일련군 제1군 당부 확대회의 결의안〉, 〈정치결의안〉, 〈항일사업결의안〉과 〈지시서한〉 등 중요한 문건들을 토의,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 6월 16일, 제1군 군부가 심해철도를 통과하는 일본 군용 렬차를 습격하는 신빈현 황토강(黃土江) 전투를 벌렸는데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동북항일련군사》, 《중국공산당길림성조직사자료》)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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