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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6)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9-14 14:51:43 ] 클릭: [ ]

▧ 김동수

제8장 키질석굴벽화의 보호신

1. 향기로운 조밥(抓饭)

끝없이 광활한 령토에 10여억의 방대한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한 중국을 사람에 비한다면 튼실하고 헌걸찬 장부중의 장부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국토 면적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신강은 터프하고 거칠은 나그네마냥 천산산맥을 가로타고 서북지역에 웅크리고 있다.

그 곳에는 오염되지 않은 결백한 천산 천지가 있고 실크로드의 청아하고 은은한 락타 방울소리와 기화요초 우거지고 과일 향기 그윽한 오아시스가 있으며 신비하고 기이한 풍속습관을 가진 위글족 인민들이 살고 있다.

신강키질석굴에서 박건일교수와 함께

자고로 신강은 ‘가무의 고향’, ‘과일의 고향’, ‘옥석의 고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비단의 길’ 연선에서 가장 중요한 ‘황금 통로’로 고금에 명성을 떨치였다. 요즘에는 국가의 서부 대개발과 ‘일대일로’의 전략에 힘 입어 새로운 도약과 재기를 꿈꾸고 있는 조금은 낯설고 어딘가는 질박하면서도 생기와 활력이 차넘치는 곳이다.

자치구 소재지인 우룸치시는 이전에는 적화(迪化)라고도 불리웠는데 고대 준갈 몽골어로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강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천산산맥을 가운데 놓고 그 남쪽 지역은 남강(南疆), 북쪽 지역은 북강(北疆)이라고 부른다. 북강은 남강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연환경이 량호하고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문화가 발전하였다. 남강지역은 대부분 고비사막지대로서 기후와 생태 조건이 악렬하고 발전이 더디였다.

베일에 가려진듯 신비한 곳, 지리 위치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 생소한 신강 땅을 한번 말 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라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우리 민족의 저명한 화가인 한락연의 동상 기증식이 신강키질석굴연구원에서 진행되니 참가해달라는 주최측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뜻밖에 차례진 행운으로 나의 마음은 더없이 설레이고 격동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락연이 신강 땅에 남겨놓은 발자취와 숨결을 직접 만나고 느껴보고 그의 창조적 정신을 되새기고 불굴의 령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하여 더욱 흥분되였다. 북경에서 우룸치를 경유하여 쿠처(库车)까지 5시간 반의 비행을 하는 내내 나의 머리 속에는 황량하고 거칠은 서북 땅에서 지칠줄 모르고 목적지를 행해 앞으로 전진하는 락타와도 같았던 한락연의 형상이 떠날줄 몰랐다.

비행기가 부르르 떨며 착륙을 시도하자 나는 눈을 떴다. 기창 밖으로 아아하게 치솟은 천산산맥의 눈부신 설산들이 손을 뻗으면 금시 잡힐 것 같았다. 파란 하늘 아래 두둥실 떠돌던 구름송이들이 유유히 흘러왔다가는 순식간에 아득히 멀리로 사라졌다. 비행기는 좌우로 부르르 몸체를 떨면서 안전하게 쿠처비행장에 착륙하였다.

한어와 위글어로 쿠처라고 쓴 간판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돋구어주었다.

키질석굴진렬관 외경

타림분지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쿠처는 ‘비단의 길’ 북로와 중로를 련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충지라고 한다. 쿠처는 원래 귀자(龟慈)라고 불리웠는데 동방 예술의 보물고인 귀자문화의 발상지이며 옛 ‘비단의 길’ 가운데서 가장 찬란하고 눈부신 명주로서 ‘서역락도’(西域乐都), ‘중국 백살구의 고향’(中国白杏故乡)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신강키질석굴연구원의 미술부 주임 리불(李佛)이 열정적으로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몸집이 왜소하고 강렬한 자외선에 얼굴이 검게 탄 그는 옷차림새가 소박했다.

모두들 세상에 ‘불’(佛)이라는 이름도 있냐며,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불을 만났으니 이런 좋은 인연과 행운이 또 어디에 있냐며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안휘성 태생인 리불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키질석굴연구원에서 5년차 사업하고 있었다.

일행은 키질연구원 전용차 표식을 단 봉고차에 올라 키질석굴로 향했다. 키질석굴은 행정적으로는 배성현(拜城县)의 소속이지만 지리 위치적으로 쿠처와 가까운 쪽에 치우쳐있는 데다가 쿠처가 교통이 발달하고 경제, 문화, 상업 등 제반 여건이 우월하여 모든 인적, 물적 교류가 쿠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리불이 설명하였다.

태도가 친절하고 겸손한 리불이 우리들의 식사를 념려하여 위글족들의 주식이며 쿠처의 제일 특산인 쿠처낭(馕)두개를 내놓으며 인상 좋게 웃었다. 계란과 향료를 넣고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밀가루떡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먹음직스러웠다. 크기는 조선족 솥뚜껑 만큼 컸는데 어림짐작 해도 그 직경이 50센치메터는 돼보였다. 그런데 하나에 고작 4원이란다.

사실 떠나올 때 인터넷을 통해 당지 세태와 특산을 대강 검색해보았지만 정작 현지에서 실물을 보니 호기심과 식욕이 당겼다. 저마다 감탄에 환호를 지르며 모여들어 잠간 사이에 쿠처낭 하나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하긴 두시간 시차로 이미 오후 5시가 지난 시간이니 연변같으면 가로등이 켜지고 저녁상이 한창이겠지만 이곳에서는 오후 일이 한창인 시각이였다. 이곳 퇴근 시간은 7시 반이라고 리불이 덧붙였다.

차창 밖으로 나무 한대 자라지 않는 우중충하게 솟은 련봉들과 마른풀만 엉성한 메마르고 건조한 고원지대의 이색적이고 메마른 풍경들이 언뜰언뜰 스쳐지나갔다. 난생처음 만난 불모의 땅을 공짜로 실컷 눈추렴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경찰복을 입고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손에 총을 든 경찰들이 안전검사를 하고 있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위글어를 하고 눈이 우묵하고 코날이 서고 얼굴이 까마잡잡한 위글족 경찰들이 우리들의 신분증을 까근하게 확인했다. 다행히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키질연구원 전용차 표식을 달고 있은 덕에 그나마 쉽게 통과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외지 사람들은 까다롭고 끈질긴 질문으로 땀동이를 쏟아야 한다고 리불이 해석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우룸치공항에서 안전검사를 할 때 여느 곳과는 다르게 신을 벗고 허리띠까지 풀어 검사하는 리유를 알 것 같았다.

솥두껑 만한 쿠처낭

차가 마치도 바위를 칼로 자르듯이 수직으로 깎아낸 구불구불한 좁다란 산길을 빠져나가자 눈앞이 확 트이며 고원지대의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키질연구원에 도착한 것이다.

호텔에 배낭을 던지고 호기심을 못이겨 밖으로 나오니 쏟아지는 연분홍저녁노을 속에 물든 키질석굴과 그 주위의 풍경은 동화 속의 그림처럼 신기하고 아름다왔다. 이슬람 풍격을 자랑하는 건축물과 모든 가지들이 한결같이 우로만 향해 미끈하게 자란 백양나무들, 그리고 골짜기를 울리며 흘러가는 맑디맑은 위간하가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였다. 병풍같이 둘러선 높은 벼랑에 줄줄이 자리잡고 있는 키질석굴의 모습은 더욱 신비하고 가관이였다.

키질연구원 식당에서 마련한 저녁 식사는 풍성하고 위글족 특색이 짙고 농후하였다. 돼지고기 료리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전부 양고기와 소고기 료리였다.

기름이 자르르 돌고 양고기로 고명을 한 고슬고슬한 조밥도 올랐다. 위글족 음식문화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특색 음식을 말하라면 첫손가락에 뽑는 것이 조밥이라고 한다.

조밥은 자체의 풍부하고 다양한 영양과 향기로 하여 위글족 밥상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고 있다. 조밥은 북송 년간에는 위글어로 포로(泡劳)라고 불렀고 당나라 력사 서적들에서는 베라(孛锣)라고 기재하였다고 한다. 청조 때 이름 높았던 시인 소웅(萧雄)은 《서강잡술시》(西疆杂述诗)에서 조밥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였다. “찹쌀을 쪄 익힌 후 양고기와 계란과 함께 볶고 거기에 소금, 파, 고추를 넣고 간을 한 다음 쟁반에 담아 손으로 집어먹는다. 명절이나 희사 때 손님들께 대접하여 례를 갖추었다.”

많은 위글족들은 조밥을 ‘체면밥’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위글족들이 자기의 체신과 체면을 나타내고 지어는 신분과 자존심을 높이는 일종 방식과 수단으로 되고 있다고 한다. 위글족의 전통 풍습에 의하면 모든 의식과 의례, 그리고 여러가지 명절이나 접대 행사에서 조밥이 올라야만 가장 완미하고 성공적으로 치루어진 행사라고 인정한다고 한다. 심지어 위글족들은 청첩을 ‘조밥표’라고도 부르는데 이로부터도 우리는 조밥문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원시적으로 손으로 집어먹는 습관은 이미 개변되였지만 다양한 조밥의 계승과 발전, 그리고 브랜드 창조를 위한 위글족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독한 술과 향기로운 조밥으로 배를 가득채웠더니 눈까풀이 처지며 피곤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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