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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5)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9-07 16:56:02 ] 클릭: [ ]

▧김동수

5. 불행을 당하다

1947년 3월, 한락연은 두번째로 신강 키질천불동에 가서 발굴사업을 한단락 마무리하고 7월 30일 257호 C―47형 군용비행기를 타고 적화에서 출발하여 하미 상공에 이르렀을 때 악렬한 날씨로 비행기는 하미에 착륙하여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정오, 비행기가 다시 리륙하여 계속하여 동쪽으로 비행하다가 주천(酒泉) 상공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갑자기 실종되였는데 산에 부딪쳐 추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상수홍이 그린 한락연 유상

걸출한 혁명화가 한락연은 이렇게 망망한 ‘비단의 길’ 상공의 푸른 하늘과 구름 사이에서 소리없이 사라졌다.

영국의 일간지인 《런던터임즈》와 중국의 《서북일보》, 《신강일보》, 《민국일보》, 《평화일보》 등 신문이 한락연과 동승했던 미국인 녀기자 스티본즈 등의 조난 소식을 일제히 알렸다.

1947년 8월 6일자 감숙의《민국일보》는 “7월 30일, 적화로부터 출발한 군용기는 이날 점심 하미에 도착한 후 계속 동쪽으로 비행하다가 두시간 후 지면과 련계가 끊겼다. 군용기는 가욕관 상공에서 추락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비행기에 한락연이 탔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현장에 대한 보도가 없고 사후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하였다. 한락연의 사망은 미스터리로 되여 많은 사람들이 의혹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982년 7월 7일, 루이 ·애리는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락연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적화에서 란주로 날아가던 도중 하미에서 국민당 특무들에게 끌려가 살해되였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락연의 조난 소식은 서북지구 각계 민중들과 그의 가족, 친구, 동료들을 놀래웠고 사람들은 비통에 잠기였다. 당시 란주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지만 한락연이 서북지구에서 많은 국민당 상층 인물들과 문화계의 벗들을 사귀면서 넓은 인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후사 처리를 매우 관심하고 중시하였다.

서북문화건설협회, 천산학회 란주분회, 서북미술학회 등 3개 단체에서 공동으로 한락연의 추도회를 거행할 데 관한 소식을 여러 신문에 게재하였다.

1947년 10월 26일 감숙에서 발간하는 《민국일보》에는 한락연의 추모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실었다.

감숙에서 발간한 《민국일보》 1947년 10월26일자 제3면에는 “한락연 길림 연길현 사람, 회화로 중외에 알려졌다. 지난해 신강에 가서 천산 남북을 두루 고찰하였고 올봄부터 키질천불동에서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폭풍설을 이겨내면서 고고학 발굴공작을 진행하였다. 8월 돌아오던중 가욕관에서 불행을 당하였다. 선생은 나이가 한창이고 바야흐로 예술사업을 시작하고 진행하다가 희생되였다. 그가 언제면 승리하고 돌아올가 기다리던 동인들은 그의 조우를 애통해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면서 그의 의지에 감화되였다. 특별히 30일 오전 본시 물산관에서 그의 추도회와 유작전시를 하오니 여러 벗들과 문예계 동인들은 참가해주기를 바란다.”고 등재하였다.

추도회장은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례당 중앙 정면에는 상서홍이 그린 한락연의 화상이 높이 걸려있고 그 밑에 화환과 제물이 질서정연하게 배비되여있었다. 량쪽에는 한락연의 작품과 장치중, 곽기교(郭寄峤), 도치악, 성성 등 군정계 요인들과 서북문협, 천산협회 등 단체와 문화계, 예술계 동인들이 보낸 만장들이 소지되여있었다.

장치중 장군은 “절세의 화가로 소문 난 그이 하늘에서 재화 입어 별세하였네”라고 썼고 도치악 장군은 “동란 속에 사귀고 오고가면서 해질녘 옛성터에서 두보를 그렸더라. 변화 많은 그 세월에 붓을 들어 그린 그림 왕유의 시마냥 그 뜻도 장하여라.”고 썼다.

대청 좌우에는 한락연의 동창생들인 로소비(鲁少飞)와 륙기청(陆其清)이 그린 두폭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중 한점은 한락연이 비행기에 앉아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욕관외 높은 산과 강을 바라보는 정경을 그렸는데 그림 제목은 〈무곡도〉(无哭图)였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녀사가 두볼에 흐르는 눈물을 흠치며 딸 한건립과 아들 한건행을 이끌고 추도식장에 들어섰다.

도치악 장군이 한락연 추모 특간을 위해 제사를 썼다

의식은 슬프고 절절한 애도곡 속에서 시작되였다. 헌화하고 제문을 랑독하는 내내 장내는 물뿌린듯 조용하였다. 오직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와 제문을 읽는 소리가 실내에 고르롭게 울려퍼졌다. 한락연의 일생을 소개하는 로소비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여 흐느끼며 말마디를 잊지 못하였다.

한락연이 세상뜬 후 류옥하는 가족 세식구의 생계와 무거운 짊을 두어깨에 짊어져야 하였다. 다행히 도치악 장군의 소개로 류옥하는 란주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였다. 1949년 8월 란주가 해방되였다.

그러던 1950년초, 류옥하의 집으로 웬 사람이 찾아와서 이틀 후에 란주를 떠나게 되니 물건들을 수습하라고 통지하였다. 그 사람은 과거에 한락연을 익숙히 알던 사람이였고 류옥하도 알고 있었다. 통지를 접한 류옥하는 금시 가슴이 뜨거워나며 조직에서 한락연을 잊지 않고 자식들을 랭대하지 않고 관심을 돌려준 데 대해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드렸다.

류옥하는 우선 서북지구에서 기록한 한락연의 일기와 일부 문물과 서적들을 리향항(李向恒)에게 넘겨주면서 한창 건설중에 있는 서북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집에 있던 간단한 가구와 먹다 남은 쌀들은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일부 옷가지와 한락연의 200여점의 그림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아이들을 이끌고 란주를 떠났다.

란주를 떠난다고 통지를 해주던 사람이 비행장까지 호송하여주었다. 류옥하 가족은 작은 비행기에 앉아 란주를 떠나 금방 해방된 귀양에 도착하였다.

귀양에 10여일 머무른 후 또 작은 비행기를 타고 그들 세식구는 광주에 도착하였다. 광주에서 류옥하는 아이들과 함께 혜양(惠阳)의 한 료양원에 가서 다년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만나보았다. 류옥하는 향항녀청년회에 가서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동사자도 만나보았다. 녀청년회에서는 류옥하더러 그 곳에 남아서 부녀공작을 맡아할 것을 요청했지만 류옥하는 북경에 가서 조직의 배치에 따르겠다며 사절하였다.

《서북일보》에서도 한락연 추모 특간을 실었다.

1950년 10월초, 류옥하는 전문 일군의 호송하에 자식들과 함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들 일가는 북경녀청년회에 거주하였고 류옥하는 녀청년회 탁아소 소장을 담임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한돐을 경축하면서 중앙인민정부 문화부 문물국에서는 1951년 9월 19일 사람을 파견하여 한락연의 유작을 국경절 경축전람에 전시하려 한다면서 공문을 가지고 류옥하를 찾아왔다. “옥하동지, 국경절 경축전시에 한락연의 유작을 빌려 전시하려고 합니다. 만약 허락하시면 진몽가(陈梦家)선생에게 맡겨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우리 국에서는 소중히 보관하였다가 전람 후 그대로 봉환해드리겠습니다.”

류옥하는 북경에 온 후 생활과 공작상에서 염보항 일가의 세심한 관심과 방조를 받았다. 두 가족은 심후한 관계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염보항은 국가 외교부에서 사업하고 있었고 전국정협 상무위원이였다.

1952년 류옥하는 페결핵으로 집에서 1년간 휴식하였다.

류옥하의 생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염보항은 한락연의 두 자녀를 북경 향산자유원소학교(香山慈幼院小学)에 거주하며 학습하게 하였다. 그녀가 병이 완쾌된 후, 염보항은 외교부 인사부문을 통하여 류옥하를 외교부 복무부에서 사업하도록 안치하였다. 당시 류옥하는 홀몸으로 두 아이를 키우느라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염보항과 상론한 후 한락연의 유작 135점을 국가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현재 한락연의 유작 135점은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여있다.

일찍 20세기 60년대 염보항은 전국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회에서 문사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출판하는 사업을 주최하였는데 주은래동지가 엽보항에게 “방법을 대 한락연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한락연의 전기를 써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1962년 음력설, 류옥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염보항의 집에서 설을 쇠였는데 염보항은 류옥하에게 주은래동지의 말씀을 전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락연은 일생동안 많은 일들을 하였소. 그는 많은 곳을 다녔는데 범위가 매우 넓소. 아직까지 누구도 그의 일생을 완정하게 조명하지 못하였소. 내가 당내 일부 동지들을 찾아서 연구해볼테요. 급해 마시오. 전기를 쓸 바에는 준확하고 완정하게 써야 하오.”

그러나 염보항의 이 념원은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그가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방에서 세상 뜨면서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56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에서 한락연 가족에게 발급한 증서

1982년 중화인민공화 민정부에서 발급한 〈혁명렬사 증명서〉

2014년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에서 재발급한 〈혁명렬사 증명서〉

해방 후, 당과 정부에서는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추대하고 선후로 1956년, 1982년, 2014년 세차례에 거쳐 렬사증명서를 발급하였다.

1956년 8월 25일에 발급한 〈혁명가운데서 희생된 공작인원 가족 영광증명기념증〉(革命牺牲工作人员家属光荣纪念证)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모택동이 서명하였고 렬사증 번호는 00058번으로서 전국에서 58번째로 수여한 것이다.

1982년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에서는 한락연에게 렬사증을 발급하였다. 뒤이어 2014년 9월 26일, 렬사증명서를 재발급하고 비주 란에 “서북통전공작 소장”(西北统战工作少将)이라고 주명하였다.

중국미술관 범적안 전임 관장은 “한락연의 예술인생을 돌이켜보면 국가, 민족, 예술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한락연의 작품에 구현된 력사적 의식과 현실주의 정신은 20세기 상반기의 진보적인 예술조류를 대표한 것으로서 그 후의 중국예술에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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