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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4)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9-01 16:29:31 ] 클릭: [ ]

〇김동수

4. 빛 뿌리는 보석

진정한 보석은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법이다.

한락연은 화구를 메고 서북지구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화가의 신분과 성망을 리용하여 국민당 군정 상층 요원들에 대한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였다.

루이 • 애리와 류옥하

한락연의 절친한 벗인 루이 • 애리는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국민당특무들이 욱실거리는 란주에서 한락연은 표면으로는 자신을 완전한 예술가로 보여주었다. 그는 그의 진정한 의도와 생각을 가족 외에는 친구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혁명가였다. 그의 첫번째 목적은 혁명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였다. 그는 고고학을 즐겼고 예술을 사랑했다. 신강에서 국민당특무들이 그렇게도 많은 정황 속에서도 그는 고고학 발굴과 예술을 통하여 장치중(张治中), 도치악(陶歭岳) 등 장군들과 접촉하는 목적에 도달하였다.”

다른 한 편지에는 “락연은 줄곧 그의 혁명사업에 충성하였다. 그는 종래로 자기의 결심을 굽혀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전부의 능력과 에너지를 다하여 변화와 목적을 쟁취하였다. 그는 당연히 자기의 가정과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한 공산당원으로서의 책임을 첫자리에 놓았다. 신강에 진출한 주요한 목적은 장치중과 도치악에 대한 통전 공작이였는데 그는 그의 예술을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였다.”

루이 • 애리가 쓴 편지 내용을 통해 당시 한락연이 처해 있던 객관적 환경을 더 잘 리해할 수 있다.

1943년 한락연이 감옥에서 출옥한후 국민당 당국은 엄격하게 그를 제한하고 오직 신강을 포함한 서북지구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고 허락하였다. 하여 한락연은 신강에서 소수민족의 회화예술을 반영한 작품을 창작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고 따라서 신강의 여러 방면의 정황에 대하여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항일전쟁시기 일제의 마수는 신강에까지 뻗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종 복잡다단한 민족관계와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형세가 존재하고 있었다.

란주에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 한락연 일가

한락연은 일찍 한 문장에서 신강에 대한 자기의 관점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결국 신강은 신강인민들이 다스리고 건설해야 한다. 가령 그들이 지식이 낮은 것만 문제 삼으면 그들은 영원히 락후하게 된다. 그들은 쉽게 외래 세력의 유혹에 빠지게 되며 영원히 신강은 중국의 한개 성이라는 것을 모르게 된다. 때문에 신강은 의학과 약으로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교육으로 구제할 것이 더욱 수요된다.”

1944년 한락연 일가는 란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다. 이듬해인 1945년1월, 한락연은 마침 주천 일대에서 그림을 그리였다. 그는 하서주랑에서 펼쳐진 한차례 경마시합에서 하서경비구 사령관인 도치악을 알게 되였다. 도치악은 사상이 진보적이였는데 국민당의 부패한 통치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도치악은 재능이 있고 구변이 좋은 한락연을 만나자 옛친구를 만나듯이 기뻐했으며 인차 친밀한 벗으로 사귀였다.

1945년 어느 날, 한락연은 도치악 장군을 만나러 갔다가 비서가 사막에서 순직한 한 몽골적 친구를 위하여 비문을 쓰는 것을 보았는데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이 사막에 귀속되였나니, 옷자락 여미고 바라보니 일망무제 아득하여 가슴은 탁 트인다만 눈주어 볼 것이 없고 입 열어 말 나눌 친구 없으니 말소리 웃음소리 끊긴 이곳에서 누구와 그 향수를 즐길고, 이 얼마나 고독하고 적막한가, 쓸쓸하고 가엽기 그지없구나!”

이것을 본 한락연은 사막에 대한 감상과 심경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사막은 영웅을 배출하는 곳입니다. 한필의 준마만 있다면 모래를 휘날리고 거침없이 질주하며 하늘땅을 쥐락펴락하는 넓은 흉금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같이 광막하고 거치른 들판은 우리 동북에도 흔치 않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가없이 망망한 이런 곳에 영원히 잠들 수 있다면 그의 령혼은 더없이 유쾌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이는 사막에 대한 찬미와 함께 억압과 통제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갈망하는 한락연의 심정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한락연 유작, 향비묘, 수채화, 1946년

도치악은 한락연의 말을 듣고 깊이 감동되여 더욱 한락연을 존중했다고 한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장개석은 또 내전을 발동하여 해방구를 진공하였다. 이 일은 도치악을 매우 고민하게 하였다. 도치악은 한락연을 찾아와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한락연은 열정적으로 우리 당의 전략방침을 소개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도치악은 점차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인식하게 되였고 과감하고 명철하게 결책을 내리고 1949년에 부대를 거느리고 기의하였다.

그후 그의 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22병탄으로 편성되고 도치악 장군은 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1955년, 도치악은 상장 계급을 수여받았다.

국민당은 신강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1946년 3월 장치중을 파견하여 군위서북행영 주임 겸 신강성 주석으로 임명하였다. 장치중은 신강으로 들어올 때 감숙 주천에서 당시 하서경비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도치악을 만났다. 도치악은 장치중에게 서북지구에서 민족관계를 개선하는 데 주의하고 평화의 방식으로 신강 문제를 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도치악의 건의는 장치중이 주장하는 ‘평화통일, 민족단결’의 방침과 일치하였다. 하여 장치중은 국민정부에 도치악을 신강에 전근시켜 군대 사무를 주관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1946년 4월, 국민정부는 도치악을 신강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개명하고 평화와 민족단결을 주장하는 두 거물급 인물이 신강의 사업을 주관하게 됨으로 하여 금후 신강을 평화적으로 해방하는 데 토대를 닦아놓았다.

장치중은 신강에 온 후 서북문화복무사를 꾸리게 하고 《천산화보》를 간행하게 하였는데 이 화보에는 한락연이 그린 벽화가 많이 실리였다. 그때로부터 한락연을 알게 되였으며 자주 만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친숙해졌다. 장치중은 한락연의 계발과 소개를 받고 자기의 아들을 루이 • 애리가 꾸리는 산단배려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1946년 8월, 도치악은 란주에 있는 서북군 장관공서(西北军长官公署)에서 사업하였다. 하여 한락연은 도치악과 더욱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때로는 도치악이 변복을 하고 한락연의 집에 찾아와서 공동히 서북과 신강의 전도를 걱정하고 도모하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는 “나는 썩 후에야 도치악 장군이 한락연과 어떻게 군대를 거느리고 공산당에 넘어오겠는가를 토론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진정으로 공산당과 합작하여 신강의 해방을 위하여 공헌하였다.”

한락연은 장치중과 도치악 외에도 감숙 무위 제3집단군 사령관 조수산(赵寿山), 국민당 감찰원장 우우임(于右任) 등 인사들과도 사귀였다.

1946년 4월 26일자 《신강일보》에 실린 한락연 서화전 소식. 소개인의 첫사람이 장치중이다.

그 가운데서 조수산과의 래왕이 더욱 친밀하고 깊었다. 조수산은 1920년에 군대에 가입하여 선후로 서북군 풍옥상과 양호성 부대에서 임직하였다. 1936년 서안사변 때 양호성은 조수산을 총지휘 겸 서안시공안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조수산은 장개석을 처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장기구금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후에 주은래의 내심한 담화와 설복으로 평화적으로 서안사변을 해결할 데 대한 중국공산당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조수산은 원래의 17로군을 개편한 제38군을 거느리고 화북 항일전선에서 일제와 작전하였다. 1944년, 조수산은 국민정부로 부터 38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였고 얼마후에는 제3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여 감숙 무위에 주둔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무위에서 조수산을 알게 되였고 친밀한 벗으로 사귀였다. 조수산은 무려 세차례나 한락연을 찾아와서 부대를 거느리고 기의할 일을 상론하였다. 1944년, 조수산은 먼저 원래의 17로군의 2,000여명 군사를 책동하여 그들을 팔로군 예서 제2분구(豫西第二分区)에 편입시키였다. 1946년, 중공중앙의 직접적인 령도와 방조하에 원래의 17로군으로 개편한 서북련군 38군을 전부 거느리고 해방구로 왔다.

해방후 조수산은 섬서성 성장으로 임명되였는데 한락연이 희생된 후 줄곧 그의 가족들의 상황을 주목하고 관심하였다.

한락연은 국민당 원로이며 국민당 감찰원 원장인 우우임과도 친밀한 관계였는데 서로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직접 동행하여 남강지역을 시찰까지 하였다.

무한대학 력사학원 진국찬교수는 한락연과 우우임과의 만남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1946년 7월 초, 한락연이 적화시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때 전에 알고있던 국민당 감찰원장 우우임 등이 참관하였다. 한락연은 그들에게 더없이 풍부한 신강 고대 문화보물고의 특점과 외국고찰대의 무참한 략탈, 그리고 투루판 일대에서의 고찰과 새로운 발견도 소개하였다. 우우임은 심중으로 한락연이 강렬한 애국심과 매우 높은 재능과 조예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라는 것을 보아내고 그를 요청하여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남강지역을 고찰하였다. 그들은 먼저 카스에 도착하였다. 한락연은 카스에서 향비묘(香妃墓)를 참관하고 그곳에서 사생하였다. 뒤이어 그들은 아커수(阿克苏), 쿠처, 키질천불동, 언치 등 남강지역을 고찰하였다. 8월 우우임 등 요인들은 쿠루판을 고찰하였는데 역시 한락연이 동행하였다. 한락연은 우우임, 장치중 등과 함께 사흘간 신강 천지를 유람하고 야외 사생을 하였다. 은빛 산봉우리와 청록색 천지물, 푸르른 송백들이 화가의 붓끝에서 살아 숨쉬듯이 그려졌다. 한락연은 우우임 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란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내에서 한락연은 익숙한 속사기법으로 매 사람들에게 소묘 화상을 그려 선물하였다. 일행중에 로기야(卢冀野)라는 작곡가가 있었는데 우우임은 그와 한락연 두 예술가를 마주하자 시흥이 도도하여 해학적으로 “로생은 작곡을 하고 한생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은빛구레나룻이노라”(卢生作曲、韩生作画,我将银髯。)고 적었다고 한다.

1947년 9월 12일, 《민국일보》에는 한락연이 우우임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는데 편지에서 한락연은 “외국발굴대는 엄중하게 벽화를 긁어가고 파괴하였습니다. 잔존해있는 그림에서 의연히 당시의 회화 정신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구도가 정밀하고 색채가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고 자세히 알렸다. 한락연의 유작 〈남강의 저명한 악사〉는 바로 한락연이 우우임을 배동하여 남강지역을 고찰할 때 창작한 것이다. 그림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것 같고 남강의 독특한 풍경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 같다.

성성, 1899년 2월 출생, 우리 나라의 저명한 작가, 시인, 번역가, 언어학가이며 한학가이다. 소년시절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1911년 남경전역에서 ‘신해혁명 3동자’ 중의 한명으로 되여 손중산선생의 고무와 포상을 받았다. 1985년, 프랑스 미터랑 대통령은 ‘세기 로인’ 성성교수에게 프랑스 영예군단 기사 훈장을 수여하였다.

성성교수의 아들 성승선생을 취재하고 기념사진을 남기다.

성성교수는 한락연의 불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림이 곧 그 사람이며 그의 인품이 곧 그의 화품이며 그의 그림 풍격이 곧 그의 인격이다.”

그러면서 성성교수는 한락연의 두가지 사실을 말하였다. 하나는 감숙성남부 라부렁사원의 장족 두령인 양재홍 형제를 공산당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형은 라마로서 종교 수령이고 동생은 사령관으로서 군사 통수였다. 후에 서장을 해방할 때 그들 형제가 류백승, 등소평 대군을 인도하여 서장으로 들어갔다. 다른 하나는 감숙성정부 비서장 부인을 공산당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후에 감숙성정부 경위대는 길안내로 나서서 팽덕회의 20만 대군이 성성협을 넘어 신강을 해방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성성교수는 “이리하여 세계의 지붕인 서장과 신강의 여러 민족 인민들이 중화의 대가정에 한데 뭉치게 되여 한, 당, 원, 청 이래 조국의 령토가 하나로 통일되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이것이 곧 한락연이 중국 혁명에 바친 위대한 업적과 불멸의 공헌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한락연은 신강의 평화적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아쉽게도 한락연은 1949년8월 란주가 해방되고 9월 신강의 평화적 해방을 맞이하는 승리의 희열을 맛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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