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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3)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25 16:08:17 ] 클릭: [ ]

▧ 김동수

3. 신강으로 진출

일찍 중국미술가협회 부주석, 중국화연구원 부원장, 중국미술학원 교수를 력임했던 엽천여(叶浅予)선생은 “한락연은 제일 처음 키질벽화를 연구한 중국 화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락연은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두번이나 신강에 진출하여 키질천불동에서 석굴벽화를 발굴, 정리,보호하는 개척적인 사업을 하였다. 파란만장하고 불안한 전쟁의 년대에 모진 위험과 갖은 모험을 무릅쓰고 자체로 자금을 마련하여 남강에 진출한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서북시기의 한락연

항일전쟁 승리 전후에 국제 우호인사 루이 · 애리는 ‘중국공합’(中国工合)을 창설하고 란주, 산단(山丹) 등지에서 ‘공합배려학교’(工合培黎学校)를 개설하였다. 한락연과 깊은 우의를 맺어왔던 루이· 애리는 한락연이 중국 서북 고대문화 사업을 위하여 출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차 한대를 지원해주었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루이 · 애리가 제공해준 차를 타고 란주에서 출정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하서주랑과 고원사막 지대를 경유하여 5월초에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그는 먼저 투루판(土鲁番) 일대의 승금구(胜金口)에서 아쓰타나무덤(阿斯塔那古墓群), 백질극리극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 등 고대 유적지들을 고찰하였다. 그는 그 곳의 어떤 벽화들은 도안이 새롭고 돈황에서 보았던 것들보다 부동한 풍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많은 중원 전통 예술수법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이것이 곧 중국 고대예술이 가지고 있는 특점이라고 인식하였다.

승금구를 뒤이어 한락연은 옛고창국(古高昌国)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한란연 유작, 고창국 페허, 수채, 1946년, 32.4 X 47.8센치메터

한락연은 일찍 외국 고찰대의 인부로 일했던 위글족 로농을 찾아 방문하고 그들을 길잡이로 청해 고창고성을 고찰하였다. 그는 삼보에서 인부를 구하여 고창국 옛무덤을 발굴하였는데 무덤에서 연창(延昌), 연화(延和) 등 옛고창국 년호와 당나라 때의 정관(贞观), 건봉(乾封), 함형(咸亨), 개원(开元) 등 년호를 새긴 묘비를 발견하였다. 뒤이어 그는 무덤 4개를 발굴하고 미이라 다섯구를 발견하였는데 머리없는 한구의 녀미이라 외에 한구는 검은 머리와 수염이 있었고 나머지 세구는 종황색 머리칼이였다. 한락연은 묘비가 한자로 씌여져있고 또 년호와 이름도 한자화된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 주민 대다수가 서역사람이였지만 그 령토는 중국에 속하고 그 문화는 중화문화의 범주에 속한다고 인식하였다.

뒤이어 한락연은 쿠무투라(库木吐拉)석굴을 고찰한 뒤 6월 5일 키질(克孜尔)천불동에 이르렀다. 키질천불동은 고대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위간하(渭干河) 기슭을 따라 6, 7리 되는 절벽에 무려 200여개의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 속에 아직까지 잔존해있는 벽화들은 색채가 아름답고 구도가 정밀하고 화풍이 각이하였는데 인도의 겐타라풍(犍陀罗之风)과 가까왔다. 한락연은 이런 벽화들을 상, 중, 하 세개 시기로 나누고 돈황의 벽화와 서로 비교 연구를 하였다.

그번 남강행에서 한락연은 50여폭의 그림을 그리고 사진 500여장을 찍었다. 그는 적화에서 개인의 제18차 그림전을 가졌고 뒤이어 란주에서 제19차 그림전시회를 열고 남강지역의 풍토인정을 묘사한 작품과 쿠처(库车) 부근의 동굴벽화 모사 작품들을전시하였다.

1947년 3월, 한락연은 그림을 판 돈으로 필요한 기재들과 설비들을 구입하고 조보기(赵宝琦), 진천(陈天), 반국강(攀国强), 손필동(孙必栋) 등 조수 네사람을 거느리고 두번째로 신강으로 떠나 4월 중순에 쿠무투라에 도착하였다.

시간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볼품없이 허물어지고 파괴되고 더구나 외국인들이 잔악하게 도굴해간 벽화의 잔해들을 보는 한락연은 마음은 침울하고 무거웠다.

그는 더없이 분개하여 〈키질발굴기〉(克孜尔考古记)란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외국 사람들은 벽화만 략탈해간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소유의 한자들을 계획적으로 긁어버렸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문화를 훼멸하고 전부 그들의 유럽 문명이라고 강조하려는 나쁜 심보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하지 못했다. 많은 불상의 이름과 이야기에서, 해설문에서 아직도 어렴풋이나마 한자를 알아볼 수 있고 또 그림 속 인물의 복색도 전부 한화(汉化)되였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없애버린단 말인가? 중국 문화는 언제까지나 중국의 것이다.”

4월 19일,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질천불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한편으로 이미 발견한 석굴에 통일적인 번호를 달고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새로운 동굴을 찾았다.

도합 100여개의 동굴에 번호를 달았는데 그 가운데서 75개의 동굴 속에 벽화가 있었다. 어떤 동굴은 길도 통하지 않는 깎아지를 듯한 절벽 우에 있었는데 부득불 백양나무로 만든 외가닥 사닥다리 아니면 바줄을 타고 오르내려야 했다.

한락연이 쓴 〈키질발굴기〉

한락연은 〈키질발굴기〉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람마다 모두 처마에 날아오르고 절벽 우를 걷는 협객으로 훈련되고 있다.매일 산에 올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은 전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고 더우기 며칠전에 번호를 단 곳은 모두 높이가 몇십장 되는 절벽이였다. 이쪽에서 저쪽 동굴로 들어가려고 손으로 잡고 발로 딛게 옴폭한 작은 구멍을 파놓았다.그리고 벼랑에 늘어뜨린 한가닥 바줄을 잡고 우로 기여오를 때는 정말이지 너무나 두려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업을 위해서는 머리가 부서져도 멈출 수 없었다.”

인민의 화가로서 한락연은 영원히 광범한 인민들과 위대한 대자연 속에서 살았다.

첫번째로 키질에 갔을 때 한락연은 당지 위글족사람들이 병이 나도 의사를 보일 수 없고 약품이 더없이 결핍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한락연은 두번째로 남강에 진입할 때는 많은 약들을 준비해가지고 갔다. 근 두개월 사이에 200여명의 위글족사람들이 병을 보였는데 지어는 몇십리 밖에서까지 나귀를 타고 와서 병을 보이였다. 한락연은 그들에게 약을 내여주는 한편 기초적인 위생상식을 알려주고 질병을 예방하도록 가르쳐주었다.

한락연이 두번째로 키질에 갔을 때 당지 위글족주인은 마치도 오랜만에 옛친구를 만난듯 너무나 기뻐하면서 자기 집에 한락연 일행을 들게 하고 자기 식솔들은 지붕이 없는 다른 방에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한락연은 인차 자기 돈을 내여주며 재료를 구입하여 지붕을 얹도록 하여주었다.

한락연은 〈키질발굴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자유활동 시간에 우리들은 당지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호금을 타기도 하고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며 위글족춤도 배우기도 했는데 너무나 성수나고 유쾌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부는 하모니카소리를 매우 즐기고 좋아합니다. 매일 저녁 남녀로소가 한자리에 모여앉아 하모니카를 불라고 성화입니다. 우리 집주인은 실컷 듣고도 성차지 않아 아예 고가로 하모니카를 사겠다고 우깁니다. 이 얼마나 재미 나는 일입니까?”

전란으로 더없이 불안한 년대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민족관계 속에서 능히 그들과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그들과 서로 우정을 나누고 그들의 방조와 지지를 받은 자체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한락연 일행이 거주하던 집

6월 상순, 가지고 간 재료와 기재가 바닥이 났다. 한락연은 6월 19일에 고찰연구 공작을 한단락 결속 지으려고 계획하고 키질벽화를 아끼고 보호할 데 관한 문장을 작성하여 조수 진천더러 한 동굴 벽에 내리 글로 음각하게 하였는데 6월 10일과 6월 16일 이틀에 나누어 완성하였다.

그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余读德勒库克(Von-Lecoq)著之新疆文化宝库,及英斯坦因(Sir-AureIStein)著之西域考古记,知新疆蕴藏古代艺术品甚富,遂有入新之念。故于一九四六年六月五日,隻身来此,观其壁画琳琅满目并均有高尚艺术价值,为我国各地洞庙所不及。可惜大部墙皮被外国考古队剥走,实为文化上一大损失。余在此试临油画数幅,留居十四天即晋关作充实准备。翌年四月十九日携赵宝麒、陈天、樊国强、孙必栋二次来此。首先编号,记正附号洞七十五座,而后分别临摹、研究、记录、摄影、挖掘,于六月十九日暂告段落。为使古代文化发扬光大,敬希参观诸君特别爱护保管。

韩乐然 六.十。

最后于十三号洞下,挖出一完整洞,记六天六十工,壁画新奇,编为特一号。六.十六

7월, 한락연은 적화에 돌아와 자신의 제20차로 되는 개인전을 열고 남강 소수민족 인민들의 풍속습관과 풍토인정을 묘사한 그림들과 키질천불동의 벽화를 모사한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특1호’의 석굴 벽화 〈본생의 고사〉와 〈석가의 좌우〉를 모사한 유화 2폭과 키질천불동의 전경을 그린 대형 유화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락연은 1947년 7월 17일 《신강일보》에 발표한 〈신강 문화보물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총적으로 2개월간의 짧은 시간에 옛 유적지를 답사하고 무덤을 발굴하고 석굴벽화를 모사하는 과정을 통하여 신강은 고대 동서방 문화교류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한족 문화가 신강 인민에게 영향을 준 년대는 매우 오래전부터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한락연은 일찍 신강 고고학 발굴 5년 계획을 작성하고 서북박물관을 건설하여 ‘비단의 길’에 파묻혀있는 진귀한 력사 문화 예술품들을 수장하고 전시할 야심차고도 웅위로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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