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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19 12:46:55 ] 클릭: [ ]

▧ 김동수

2. 그림을 벗 삼아서

한락연이 체포된 후 당조직에서는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리제심 등 국민당 좌파 인사들과 동북 민주인사들도 구출에 동참하였다.

여러 방면의 노력으로 1943년초 한락연은 가석방되였으나 국민당 당국은 다시는 ‘동총’에 참가하지 못하며 서북지구를 떠나지 못하며 대중들의 빈곤한 생활을 반영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등 어처구니없는 제한과 구속을 하였다.

한락연의 유작 〈돈황막고굴 외경〉 (수채화, 1945년)

1943년 감옥에서 출옥한 한락연은 서안시 개통거리(开通巷) 40호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후날 한락연의 학생으로 된 중국화 대가인 황주는 그 때 그 곳에서 한선생을 처음 만났다고 회억하였다.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나는 서안시 남신가 개통거리로 찾아갔다. 어지럽고 좁다란 거리였는데 당시 집들은 이미 찾을 길 없고 해방 후에 지은 낡은 집들이 몇집 있었으나 인차 새 집 개조를 한다면서 한창 집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골목 어구에 ‘개통거리’라는 표식이 있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골목을 한바퀴 돌면서 또다시 한락연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1943년초, 한락연은 섬서성 관중지역으로 스케치 려행을 떠나게 되였다. 한락연은 그림을 배우려는 청년을 한명 구해 그와 같이 려행 사생을 하려는 타산으로 간단한 수화물과 그림 도구의 운반을 도와줄 청년을 찾던중 한 친구로부터 당시 18세의 황주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2011년, 북경 54거리 1호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미술관에서는 한락연 유작전이 성황리에 열리였다. 특별히 그번 전람에 참가했던 필자는 운 좋게도 황주의 부인 정문혜(郑文慧)녀사를 만나보고 뜻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이 불편하여 지팽이를 짚고 있었는데 기억력이 좋았다.

중국화의 대가 황주(黄胄)는 원래 성은 량(梁)씨고 이름은 감당(淦堂)이며 자는 영제(映齐)로서 1925년 하북성에서 태여났다. 어려서 체육경기에 참가해 염황지주(炎黄之胄)라는 우승기를 받았는데 후에 그 가운데서 두글자를 선택하여 황주라는 필명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황주는 《명화가 대사막의 무지개로 빛나다》(画家椽笔,大漠飞虹)란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한선생은 성격이 활달하고 표달능력이 강한 분으로서 구식 선생의 일관적인 위엄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매일 나에게 소묘의 보조, 색갈의 요령, 형체구조의 관찰방법, 그림의 기법과 방법 등을 가르쳤다. 그는 또 유럽 문예부흥과 일부 화가와 조각가들의 일생도 들려주었다…” 한락연은 황주에게 회화지식을 가르쳐주는 한편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한다는 도리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황주의 부인 정문혜녀사와 필자

생전에 황주는 늘 자기의 계몽선생이였던 한락연을 추억하면서 그와 함께 보냈던 나날들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1988년 황주는 한락연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바람이 맑고 밝은듯하며 피가 뜨겁고 마음이 정성스럽다.”(光风霁月,热血丹心)는 제사를 남기였다. 이 제사는 현재 한락연의 자녀들이 수장하고 있다.

한락연은 근 한달 가량 사이에 왕성한 정력과 열정으로 위하 량안의 풍경, 진천평원의 경치, 전쟁의 상처, 피난민들의 고통 등과 같은 내용의 수채화를 그렸는데 내용이 진실하고 생동하였다. 특히 구중국 농민들의 축도라고 할 수 있는 초상화, 농촌소녀, 헐망한 마차, 무거운 짐을 끄는 여윈 말 등등 그림들은 국민당 통치 속의 심각한 사회생활을 잘 반영하였다.

1944년 당조직에서는 한락연 일가를 란주에 안치하였다. 부인 류옥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한편 한락연의 사업을 도왔다.

이 해에 한락연은 서쪽으로 청해의 타얼사(塔尔寺), 남으로는 감숙 남부의 라부렁(拉卜楞), 북으로는 하서주랑을 따라 돈황까지 이르면서 조국산천의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을 묘사한 그림을 창작하였다. 고대 가욕관의 장성, 건설중의 천란철도, 새로운 신형 인재를 배육하는 산단배려학교, 소수민족의 풍토인물 등은 모두 그림의 대상들이였다. 례를 들면 〈타얼쓰사원의 아침 례배〉, 〈라부렁사원 앞에서의 가무〉, 〈현미경을 보는 산단학교 학생〉 등은 모두 옛스러움과 진실함으로 충만되여있었다.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은 구름이 짙게 드리운 산을 배경으로 장족 복장을 입은 부부와 그들의 딸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그들의 뒤쪽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세 사람은 태양을 향하여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 그림은 광명은 바로 앞에 있지만 여전히 분투하고 전진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으며 식지 않는 화가의 투쟁정신과 광명에 대한 추구를 담아냈다고 한다.

황주의 제사

1945년10월, 한락연은 감숙 돈황에서 프랑스 류학 시절의 절친한 벗이며 돈황예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상서홍을 만났다. 10여년 만에 만난 두사람은 흉금을 털어놓고 밤새도록 반세기 동안 나라와 인민들이 당한 재난과 인생의 길에서 류리방황하던 지난날들을 회억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미친듯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략탈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질책하였으며 특히 문화보물고인 돈황에 대한 무참한 수탈과 유린에 더욱 분개하였다. 그러면서 중화민족의 고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분투할 것에 의기투합하였다.

비단의 길은 동쪽의 서안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로마에까지 이르는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 교류의 통로일 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교류의 중요한 통로였다.

키질(克孜尔)과 돈황은 모두 비단의 길에서의 동서 문화의 요충지와 집거지였다. 돈황에는 수백개의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마다에 이채롭고 아름다운 벽화들이 그려져있었다. 한락연은 현지에서 많은 벽화들을 모사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필화로 비천을 모사하였지만 한락연은 수채화로 비천을 모사하였다.

1946년 10월, 한락연은 부인 류옥하와 딸 한건립, 금방 태여난 아들 한건행을 데리고 두번째로 돈황에 가서 고찰하였다. 산단배려학교의 학생 두명도 동행하였다.

상서홍은 열정적으로 그들을 마중하고 돈황천불동 맞은켠에 있는 낮다란 자기의 단층집에 거처를 정해주었다.

한락연은 국립돈황예술연구소에서 〈키질벽화와 돈황벽화와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학술보고를 하였다. 그 때 그는 이미 첫번째로 키질에 다녀왔다. 그는 고찰 성과를 총화하면서 키질벽화와 돈황벽화 예술의 중요성을 설명하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을 조직동원하여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저명한 화가이고 학자이며 돈황막고굴연구원 명예원장인 상서홍은 “한락연의 예술성과는 돈황예술 연구에 보귀한 공헌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그는 고비사막의 뙤약볕 밑에서 완성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상서홍의 딸 상사나녀사와 필자

2011년 6월 4일, 필자는 중국미술관 전람청에서 상서홍의 딸 상사나(常沙娜)녀사를 만났다.

그는 더없이 인자하고 조용한 성격이였다. 나는 그녀에게 고향 사람들은 한락연을 잊지 않고 기념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는 한락연의 유작을 둘러보며 돈황 시절과 한락연에 대해 회억하면서 깊은 감회에 젖어 눈굽을 찍었다.

당시 상사나는 20살로 아버지를 도와 매일 컴컴한 동굴 속에서 벽화를 모사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는데 너무나도 따분하고 지루하였다. 그는 형제도 없었고 그 곳에는 함께 놀아줄 친구도 없었다. 일망무제하고 황막한 고비사막에서 온 하루 벽체를 마주하고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하는 그의 고독한 심정과 아픈 마음을 누구도 리해할 수 없었다. 생기와 웃음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 곳에는 학교도 없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린 한락연은 돈황에서 산단으로 돌아와 루이 · 애리와 상사나의 입학 문제를 토론하고 1947년에 그녀를 산단학교에 입학시키였다. 루이 · 애리는 친구 예리화를 통해 상사나를 미국에 보내여 미술을 전공하게 하였다.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상사나는 후날 중국공예미술학원 부원장을 담임하고 중국 미술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상사나녀사는 필자의 요구에 거절하지 않고 필자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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