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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가의 아버지'정률성: 우리의 대오 태양 따라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학습강국 ] 발표시간: [ 2021-08-02 10:13:32 ] 클릭: [ ]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우리의 대오 태양을 향하여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힘 ...”2021년 7월1일 저녁, 중국공산당 창건 100돐 경축문예공연인 《위대한 로정》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성대히 방송되였다. 사람들은 이 격앙되고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선률을 들었을때 다시금 80여년전의 연안으로 돌아가 그 시기 전 민족이 단결하여 일심으로 외래의 적들을 물리치던 강개함과 비장함,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속한다는 견정한 신념을 느낄수 있게 했다. 이 노래는 무수한 혁명용사들이 분발전진하도록 고무격려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이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정률성이다. 이 위대한 국제주의 전사는 조선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뼈를 묻었는데 중국무산계급 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만약 군중들의 노래소리를 타오르는 불길과 같다고 한다면 정률성(왼쪽)은 한점의 불씨였다.(사진은 정률성의 딸 정소제가 제공한것임)

광명을 추구하기 위해 분투를 멈추지 않았다

조선반도의 전라남도에는 파아란 무등산이 있는데 록수청산으로 둘러싸인 광주가 바로 이곳에 있다. 1914년 8월13일, 이곳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9번째 아이가 태여났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부은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후에 음악을 너무 사랑해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다시 정률성이라고 고치였다. 동년시절 정률성은 자기의 조국이 일본침력자에 의해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정률성의 가족은 모두 숭고한 민족절개가 있는 애국자들이였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굶고 추위에 시달릴지언정 죽어도 일본침략자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았다. 정률성의 세 형님들도 선후로 조선과 중국의 혁명사업을 위해 목숨을 바치였다. 어린시절 생활은 정률성에서 민족해방을 쟁취하고 행복과 광명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한다는 신념을 수립시키였다.

일본침략자와 조선의 반동매국정부는 서로 결탁하여 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는데 조선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33년, 19살난 정률성과 한패의 조선 애국청년들이 중국에 왔는데 조선의 재중국 항일단체가 남경에서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중국항일구국운동에 뛰여들었다.

정률성은 남경에 온후 조선혁명조직의 도움과 교육하에 혁명리론을 노력해 배우고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종사하는 한편 갖은 방법을 다해 음악을 공부하였다. 친구의 소개로 정률성은 전전하면서 상해에서 한 외국인 성악선생님을 찾았으며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남경에서부터 상해까지는 수백리 떨어져 있었는데 정률성은 매주 1차씩 기차를 타고 상해에 가서 수업받기를 견지하였다. 선생님은 정률성의 천부적인 노래기질을 몹시 흔상하였으며 정률성의 피타는 학습정신에 감동되였다. 선생님의 참다운 지도하에 정률성은 중문과 외국어로 많은 세계명곡들을 암기하고 장악했다. 노래기교를 제고시키기 위해 그는 매일 배에 모래주머니를 올려놓고 호흡을 련습했으며 복근을 강철판처럼 든든하고 힘있게 단련하였다.

1935년 ‘12.9'운동전후 항일구국합창운동이 국내에서 고조되면서 많은 항일구국가곡들이 잇따라 산생되였다. 이런 가곡들은 중국인민의 애국주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는데 거대한 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전한 작사 , 섭이 작곡의 <의용군 행진곡>은 마치 돌격나팔소리처럼 사면팔방에 울려 퍼지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정률성도 이 노래에 대뜸 사로잡히였으며 거리에 뛰쳐나가 열정적으로 구국가요들을 부르고 가르쳤다. 그는 비밀집회시에 항상 <국제가> 혹은 <의용군 행진곡>을 자체로 연주하고 또 불렀는데 그의 노래는 많은 동지들을 깊이 고무격려하였으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열렬한 전투생활을 격정적으로 구가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자 정률성은 연안에 가기로 결심했다. 1937년 겨울, 정률성은 여러겹의 봉쇄를 뚫고 연안에 도착했다.

그 당시, 연안은 비록 생활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생기발랄했으며 곳곳마다 우렁찬 노래소리가 울려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그야말로 ‘노래의 도시’라 할만 했다. 정률성은 연안에 도착하자마자 차넘치는 열정으로 불같이 뜨거운 노래활동에 뛰여 들었다. 그는 늘 대중들 앞에 서서 사람들을 지휘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또 밤낮으로 생각을 이어가면서 연안을 찬미하는 찬가를 쓰려고 깊이 사색했다. 이 노래는 아름답고 정겨우며 전투적인 격정으로 충만된 노래여야 했다.

1938년 여름의 어느날 저녁, 대회가 끝난 후 정률성은 동료들과 함께 연안성 북문밖의 산비탈에 올랐다. 멀리 바라보니, 아! 이 얼마나 웅장하고 장려한 그림이란 말인가.

석양빛 속에서 일렬로 정연하게 늘어선 대오가 웅장한 노래를 부르며 성 안을 행진하고 먼곳에서는 멈추지 않고 훈련을 이어가던 전사들이 때때로 우렁찬 구호를 웨치며 노래소리와 서로 호응하면서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울려퍼졌는데 그 기세가 위풍당당하고도 웅장했다. 연안성은 들끓었고 연하의 물은 즐겁게 노래했으며 보탑산 우에는 밝은 달이 떠올랐다… 정률성은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에 마음속 깊이 오래동안 키워왔던 격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곁에 있던 로신예술학원 문학계의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하나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의 말은 막야의 시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데 혁명적인 호기를 토로한 가사가 일사천리로 나왔다. 정률성은 막야가 창작한 서정적이면서도 또 전투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 가사를 읽고난 후 가슴 가득 뜨거운 피가 음표로 떠올랐다. 하여 중국혁명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노래인 <연안송>이 탄생되였다.

얼마 후 한 야회에서 정률성은 이 노래를 불렀다. 그의 호소력 짙은 노래소리는 막야와 그 자리에 있던 동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첫 공연이 성공한 후 이 노래는 <연안송>으로 정식 명명되였다. 항일전쟁 기간에 이 노래는 마치 나래라도 돋힌듯 연안에서 해방구로, 적 점령구로, 전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의 력사적 시기에 이 노래는 무수한 애국청년들을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의롭게 달려가 혁명의 품에 안기도록 손짓했으며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는 전사들이 적후에서 끝까지 투쟁을 견지할 수 있게 고무했다.

진실된 마음을 공산주의 사업에 바치다

수년간의 련마로 정률성은 이미 강인한 공산주의 전사로 성장했다. 1939년 1월 그는 연안에서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자신의 모든 생명을, 그의 그 진실된 마음을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에, 공산주의의 위대한 리상에 바쳤다.

정률성은 일생 동안 300여수(곡)의 다양한 형식의 음악작품을 창작했다. 그중 절대 다수는 전사, 로동자, 농민, 아동들을 위해 창작한 것이였다. 그의 음악은 선률이 격정적이며 감동적이다. 그는 연안에 있을 때 또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였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39년에 시인 공목 (본명 장송여)과 합작한 <팔로군 대합창> 중의 두곡인 <팔로군 행진곡>과 <팔로군 군가>이다.

당시 정률성은 시인 공목과 한 토굴집에서 함께 살았다. 1939년 10월, 정률성은 <황하 대합창>의 고무를 받고 공목과 합작하여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였으며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놀랍게도 연안의 토굴집에서 쓰여진 이 행진곡의 음악적 형상이 그토록 웅장하고 중후하다는 것이다. 공목은 생전에 정률성의 창작 과정을 회억하는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도, 지어 손풍금도 없이 단지 머리를 흔들며 흥얼거리면서 손짓만 할 뿐이였다…” 정률성이 토굴집에서 대야를 두드리고 다리를 두드리면서 이 곡을 썼다는 옛 전우의 말도 있다. 허술한 환경에서 아무런 악기 보조도 없이, 그야말로 만약 인민군대의 용맹전진하는 기세를 마음속에 품은 작곡가가 아니라면 어찌 이토록 세련된 기법의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었겠는가. 정률성의 몇몇 오랜 친구들이 이 곡에 대해 말하면서 모두 ‘신’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는데 더 이를데 없다.

정률성은 <팔로군행진곡> 창작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사에 작곡을 붙이는 것은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다. 우리의 호랑이는 일본놈을 잡아먹고 반동파를 잡아먹는 호랑이이다. 날개가 생겼으니 더욱 사납고 더욱 용맹스러우며 더욱 무섭다.” 이는 얼마나 좋은 비유인가. 이 <팔로군 행진곡>은 음악선률로 인민 자제병의 형상을 부각하였으며 진정으로 전사들이 부르게 끔 쓴 노래이다. 노래를 완성한 후 그는 친히 전사들 속으로 들어가서 노래를 가르쳤다.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포연과 함께 이 노래는 줄곧 부대에서 널리 불리며 전사들의 전투의지를 고무시켰고 인민군대에 호랑이가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은 힘을 주었다.

해방전쟁 시기 <팔로군 행진곡>은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 중국이 성립된 후 당중앙의 비준을 거쳐 이 노래는 또 중앙군사위원회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 인민군대의 전사들은 바로 이 군가를 부르며 일본침략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향해 나아갔다. 또한 역시 이 노래를 부르며 전 중국을 해방하고 천안문으로 행진하여 모주석의 검열을 받았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정률성은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그도 중국공산당 당원에서 조선로동당 당원으로 전환했다. 1950년,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얼마 후 주은래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정률성을 중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귀국 후 정률성은 정식으로 중국국적에 가입했고 중국공산당 당적도 회복했으며 북경에 정착했다.

2019년, 정률성은 중공중앙 선전부, 중공중앙 조직부 등 11개 부문으로부터 ‘새중국 성립에 특출한 공헌을 한 영웅모범 인물 100인’에 선정되였으며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도 중공중앙 선전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 경축 우수가요 100 곡’에 입선되였다.

래원:학습강국

/편역: 김가혜 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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