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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8)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7-26 21:47:25 ] 클릭: [ ]

▧ 김동수

2. 릉천(陵川)에서 심수(沁水)까지

한락연의 발자취를 따라 코스를 정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현지 사진을 찍고 기록까지 남기는 작업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았다. 제일 큰 난제는 언어였는데 현지 사람들의 지방 방언과 사투리를 바로바로 쉽게 알아듣고 리해할 수 없는 것이였다. 때로는 체면을 무릅쓰고 두세번을 물어서야 정확한 뜻을 리해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고 용기를 내여 또다시 털고 일어났다.

심수현 중촌진정부를 방문하고 국민당 93군 사령부 유적지를 찾았다

태항산맥이 줄기를 내린 산서성 경내에 점차 들어서면서 웅기중기 락타등같은 산발들과 층계식으로 이루어진 다락밭들만 보일 뿐 벌판이라곤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린시절 귀 아프게 들어보던 대채전이란 말이 불쑥 떠올랐다.

저물 녘에야 일행은 릉천현 정부호텔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좌권현성에서 벌어졌던 일과 꼭 같은 재미나면서도 어이 없는 일이 또 벌어졌다. 호텔 접대원 아가씨가 한어와 조선어, 두가지 문자로 된 나와 일행의 제2대 신분증을 유심히 뜯어보더니 외국인 등록을 하라며 등기표를 내밀었다.

나는 우리는 당당한 중국 조선족이고 나라의 자치제도의 혜택으로 신분증에 두가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웃으며 해석해도 그 아가씨는 막무가내로 손을 홰홰 내저으며 보안일군까지 불러왔다. 그것도 모자라 공안국이며 외사사무실에다 전화를 넣어서 반복하여 확인하고서야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억이 막혔다. 참다운 직업정신이라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타매하고 원망해야 할지 몰라 혼자 속으로 끙끙 앓다 그만두고 말았다.

릉천현은 현재 인구는 24만명 정도, 년재정수입은 3억원 정도로서 산서성에서 비교적 가난한 현에 속했다.

나는 릉천현성 숭문진 서북쪽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숭안사(崇安寺)를 찾았다. 고대에는 릉연사(凌烟寺)라고 불렀던 숭안사의 건축 년대는 아직까지 고증되지 않았고 현존해있는 건축 구조물은 대부분이 명, 청시기 유물이고 일부 송, 금, 원나라 때의 건축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숭안사의 총부지면적은 4,380평방메터이고 산문(山门), 전각(殿阁), 대응보전등 건물이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여있었는데 2006년 5월 국무원에서 제6차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명명하였다.

숭안사

릉천현당안국 왕국장의 말에 의하면 릉천현의 상징인 숭안사는 1939년 경에는 국민당 제27군 범한걸(范汉杰)군 군부로 사용하였고 후에 한때는 팔로군도 이곳에 주재했다고 한다.

한락연이 국민당 소장 지도원의 신분으로 릉천에 왔으니 틀림없이 이곳에 들렸을 것이다. 검은테 안경을 걸고 소장 군복을 입은 름름한 한락연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룡정의 편벽한 시골에서 태여나 광활한 중국 대지를 주름 잡으며 산서성에서도 오지인 이 메마르고 거칠은 곳에까지 찾아와 국공합작과 항일을 위해 분투하였으니 그를 기리지 않을 리유가 없었다.

심수현 시가지에 들어서니 건물마다 밝은 페인트를 칠한 탓인지 여느 도시보다 아담지고 산뜻하고 아름다왔다.

심수현당안국 왕국장에게 한락연을 소개하고 우리가 찾고 있는 국민당 93군 류감(刘戡)부대의 사령부 유적지를 부탁했더니 그는 우리를 데리고 심수현 중촌진으로 가서 묘진장을 소개했다. 묘진장은 상하욕촌에 국민당 유적지가 있다면서 무장부의 장부장에게 우리를 안내하라고 당부하였다.

상욕촌에는 국민당이 물러간 후 팔로군 병기공장에서 수류탄 손잡이를 건조했다는 회색 벽돌로 쌓은 건조가마 자리가 남아있었다. 일부 파괴된 회색 벽돌로 지은 건물들도 보였지만 사령부 유적지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였다.

심수현 하욕촌에 있는 국민당 93군 사령부 유적지 대문

일행은 상욕천을 나와 하욕촌에 이르렀다. 토담으로 둘러쌓여있는 하욕촌의 유적지는 차지한 부지면적이나 남아있는 건물의 수량이나 규모가 꽤나 방대하였다. 역시 파손이 심했다. 좌우에 대칭으로 나 있는 커다란 대문에 들어서니 정면에 사령부로 사용했던 검은 기와를 떠인 회색 건물이 보였고 그 량쪽에는 병영으로 사용했던 다락식 2층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다. 사령부 건물 맞은켠에는 큰 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대는 삼면이 흙벽돌로 둘러쌓여있고 정면이 사령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너비가 10여메터, 높이가 1.5메터인 두개의 나무기둥이 처마를 받치고 서있었다. 아마 이 무대를 리용하여 연설도 하고 여러가지 문예활동이나 선전활동을 벌린 것 같았다. 두개의 나무기둥에는 아직도 검은 먹으로 항일 선전구호들을 써붙였던 흔적들이 어룩어룩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당지의 80여세 되는 진덕원(陈德元)로인에게 이것 저것 물었더니 이곳은 원래 절간이였는데 국민당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사령부로 사용하였고 국민당이 물러간 후 한때는 팔로군의 병기공장으로 사용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1939년 한락연이 국민당 소장의 신분으로 93군을 시찰한 것이 틀림없이 이곳일 것이다.

1939년 한락연은 당시 동북항일구망총회 기관지였던 반월간 《반공》 잡지에 〈진동남 소탕권내에서〉(在晋东南扫荡圈内)라는 통신을 발표하여 6일 동안의 조사과정에서 보고 들은 여러가지 생동하고 진실한 장면들을 서술하였다. 여기까지 답사하는 과정에서 보았던 자연경관과 여러 지명들에서 그 날의 그 때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하욕촌에 있는 93군 사령부 유적지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파손이 심해 어느 날 후다닥 없어질, 문물보호 간판 하나 없는 유적지의 운명으로 침울하기만 했다.

유적지를 나와 잠간 여유시간이 나서 주위 백성들의 살림집들을 둘러보았다. 꽤나 힘든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당과 정부의 빈곤해탈 정책의 혜택으로 이제 곧 빈곤에서 벗어나 유족한 생활을 할 것이라는 기대와 신심, 희망만은 한결같이 높았다.

릉천, 양성, 장자현, 심수현까지 탐방하면서 현지 당안국과 당사부문, 박물관, 문물부문의 많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도움과 방조를 받았다. 참으로 너무나도 고맙고 잊지 못할 사람들이였다. 이 지방 어른들은 주사위를 던져서 술을 권하는 추이허우(吹猴)라는 독특한 유희를 놀았는데 일종 전통적인 술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모든 음식상에 무엇보다 먼저 주사위를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였다. 친구 사이는 물론 동료, 친척 지어는 손님접대에서도 이 유희를 노는데 어색함을 극복하고 술상 분위기가 저절로 무르익고 흥성흥성해진다고 하였다. 동북에서 온 우리와는 초보자라고 주사위 하나로 하는 가장 간단한 놀이를 하였고 저들 끼리는 여러개를 가지고 놀았는데 프로급 수준이였다.

그들의 성의와 열정에 가만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유희에 동참했다가 못 마시는 소주를 련속 석잔이나 들이마셨다. 그랬더니 동북의 조선족 사내답다고 엄지손가락을 빼들었다. 원래 주량이 없는 내가 그렇게라도 감사한 마음을 보였더니 분위기가 대뜸 고조에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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