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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7)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7-23 15:14:41 ] 클릭: [ ]

▧ 김동수

제6장 격정으로 불타던 나날

1. 소장 지도원으로 동분서주

1939년초, 국민당은 국공 두 당과 두 군대 사이의 모순과 마찰을 줄이고 모든 무장력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하기 위하여 국민당군사위원회 전지당정위원회(战地党政委员会)를 세우고 항일에 대한 의지와 태도가 강렬하고 공산당과 관계가 밀접한 리제심(李济深)에게 사업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국공 합작시기의 한락연

리제심은 장개석을 주임으로 하고 본인이 부주임을 맡기로 제기하고 또 사람을 쓸 때 당파의 계선을 타파하고 무릇 항일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제기하여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당시 국민당의 요원이였던 진립부(陈立夫), 곡정강(谷正刚), 장군(张群) 등은 모두 이 조직의 성원이였다.

이 조직내에는 약간명의 소장 지도원이 배치되여있었는데 각지의 여러 부대를 시찰하고 조사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하였다.

대만 국민당당사관(国民党党史馆)의 〈국민당군사위원회 전지당정위원회 조직요강〉에는 소장 지도원이라는 직무가 기재되여있지만 구체적인 인원 명단은 현재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리제심은 중경에서 주은래와 엽검영, 박고 등을 요청하여 국사를 토의하였는데 주은래는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표시하였다. 하여 중공중앙 남방국에서는 지하당원인 장우어(张友渔, 해방 후 북경시 시장을 맡음), 우병연(于炳然)과 한락연을 이 조직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1939년 5월부터 한락연은 염보항과 리제심의 추천으로 이 조직에 들어가 소장 지도원으로 임명되여 사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전략적 수요에 의하여 전국을 5개 전구(战区)로 나누었는데 한락연은 그중 제1전구와 제2전구의 부분적인 지역을 시찰하였다.

규모가 제일 큰 제1전구는 무려 6개 성에 거쳐있었는데 위립황(卫立煌)이 총사령이였고 사령부는 하남성 락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염석산(阎锡山)이 제2전구 총사령이였는데 주요 작전 지구는 산서성이였다.

1939년 5월부터 7월 사이에 한락연은 펜, 사진기, 그림 3개 ‘무기’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산서성의 원곡(垣曲), 양성(阳城), 진성(晋城), 장자(长子), 장치(长治), 릉천(陵川), 심수(沁水) 등 곳과 하북성의 일부 지역을 시찰하였다.

1939년 《반공》 제7권 제1기에 한락연은 〈진동남 소탕권내에서〉란 문장을 발표하였는데 요약한 아래 문장에서 시찰 당시의 긴장한 정세와 위험한 상황을 여실히 알아볼 수 있다.

“일본 군대가 산서성 동남 지역을 대거 진공할 때 우리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온 하루 길을 걸어 우리는 적들과 국군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심수현 동쪽 경계까지 왔다…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별무리들이 반짝이는 가없이 펼쳐진 고요하고 아름다운 여름밤 하늘을 바라보며 자리에 누웠다. 동료인 철생(铁生)이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산서성 장자현당안관 사업일군과 함께

7월 8일 아침, 농가에서 내여주는 떡을 나누어 먹고 아름다운 십리하(十里河) 기슭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자연석으로 가득찬 골짜기를 따라 강물은 무수히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렸다.

30리 길을 걸으며 우리는 7명의 민부를 바꾸었다. 저녁 7시에 우리는 끝내 목적지인 심수현(沁水县)과 장자현(长子县) 경계에 있는 와요구(瓦窑沟)에 도착하였다.

7월 9일 이침부터 비가 내렸다. 우리는 비를 무릅쓰고 10여리를 걸어 한 마을에 도착하여 민부를 바꾸어야 하였다. 우리는 이곳 려장 집에서 비를 피하면서 새로운 민부를 기다렸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는 소리에 우리도 밖으로 달려나가 보니 동서욕(东西峪)산길로 수많은 난민들이 뛰여왔다.(동서욕은 이곳에서20여리 되는 곳에 있는데 적들이 서에서 동으로 장자, 장치를 진공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물론 우리는 확실한 정보는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의 정황으로 봐서 전투 형세가 매우 긴장하고 전장이 우리와 접근하고 있음을 판단하였다.

일행 네사람은 곽려장네 밀짚을 깐 방에 드러누웠다. 밤중에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깨여났다.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부상당한 병사들의 숨 넘어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막 일어나려 하는데 려장의 큰아들이 먼저 일어나 그들을 옆칸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불시에 온몸으로 긴장감을 느끼였다. 그렇다고 정신없이 달게 자는 동료들을 깨울 수 없어 어둠 속에서 밀짚 속을 더듬어 권총에 탄알 여섯발을 안장하여 손에 꼭 쥐고 날을 샜다.

비가 계속 내렸지만 우리는 밀짚 속에서 기여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였다. 려장은 호의로 비가 그친 후 떠나라고 만류하였지만 우리는 더는 늦을 수 없어 그에게 민부 세사람을 불러 달라 하여 짐을 메우고는 길을 떠났다.

12일 아침, 눈을 뜨니 벌써 날이 훤하였다. 강을 건너 시가지를 벗어날 때 갑자기 쌍날개를 단 적기가 우르릉거리며 시가지와 우리들의 상공에 나타났다. 나는 침착하게 소유의 사람들을 은페시키고 인차 길가 풀숲에 엎드렸다. 적기에서 폭탄 3발이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였다. 적기는 이렇게 우리의 상공에서 련속 6바퀴를 돌며 4차에 걸쳐 도합 8개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앞으로 전진하면서 우리는 3차에 거쳐 11대의 적기를 만났는데 그들은 매번 우리들의 머리 우에서 낮게 선회하였다. 어떤 곳에다는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그들의 본의는 대부대의 종적을 찾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적들이 아무리 교활해도 기민하고 용감무쌍한 우리의 대부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잘 은페하고 있다가 불의의 타격을 가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소멸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중이였다.

우리는 이렇게 진동남 ‘소탕’권내에서 6일간의 전투생활을 보내면서 380리 길을 걸어 오후 4시에 우리의 목적지인 ×××군부에 도착했다.”

시찰 가운데서 한락연은 사진기로 대량의 항일전선 정황과 군민단결의 장면을 담은 사진을 찍어 국외에 알려 국제 여론의 지지와 방조를 촉구하였다.

염보항의 자녀들인 염명광과 염명복은 “중경 시절, 한아저씨는 우리 집에서 많은 사진을 현상하였는데 목욕 대야에는 늘 물이 넘쳐나게 검은 사진들이 잠겨져있었다.”고 회억하였다. 국제 우호인사 루이 · 애리는 무한에서 한락연은 전선에서 촬영한 사진과 신문보도를 가지고 외국 기자들에게 국제적인 항일선전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일찍 한락연의 조수로 사업했던 구금(丘琴)은 〈한 촬영기자의 이야기〉라는 문장을 1939년 9월 7일 《신화일보》에 발표하였는데 아래와 같이 썼다. “서안에서부터 나와 한락연은 동행자가 되였다. 우리 두사람은 모두 후방과 싸움터의 정황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였다. 그의 도구는 사진기였다… 사업에 대한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그의 불요불굴의 분투정신, 전업지식과 경험은 국내 촬영기자들이 배우고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다. 사실 당시 전방에는 종군기자들이 극히 적었다. 때문에 더욱 많은 기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전선으로 파견해야 싸움터의 정황을 수시로 후방에 전달할 수 있고 중국의 항전을 국외에까지 널리 선전하고 알릴 수 있다.”

한락연은 시찰 가운데서 여가의 시간을 리용하여 그림과 소묘로써 당지의 지형이나 인물을 그려냈다. 일찍 국민당 93군에서 비서로 사업하다 팔로군에 넘어왔고 해방 후, 북경대외경제무역학원 부원장을 담임했던 여극견(余克坚)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락연은 93군에 시찰 와서도 늘 손에 필기장을 들고 다녔다. 그의 관찰력과 기억력은 매우 좋았다. 익숙한 솜씨로 나와 기타 사람들에게 소묘 그림을 그려줬다. 군장 류감(刘戡)이 그를 보고 장개석의 화상을 그리라고 하여 그렸는데 정말 비슷하였다.”

한락연은 시찰 가운데서 항일선전과 각 부대의 마찰을 해결하는외에 국민당 고급 장령들에 대한 통전공작도 진행하였다.

1939년, 한락연은 심수현에 자리잡고 있는 국민당 직계부대인 93군을 시찰하고 군장 류감과 참모장 위위(魏巍)를 만났다. 93군은 진동남 국민당군 가운데서 전투력이 강한 부대로서 군장 류감은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서 장개석과 호종남의 충실한 부하이고 국민당 중앙군의 맹장이였다. 그는 의리와 감정을 중히 여기는 성격이였다.

참모장 위위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대혁명 시기 국민당의 좌파로서 사상이 진보적이였다.

1937년, 위위는 연안에 가서 모택동과 라서경(罗瑞卿)을 만났고 1938년 무한에서 주은래를 만났으며 그후 줄곧 팔로군과 련계를 가지고 있었다. 1940년 백천(白天)으로 이름을 고친 위위는 팔로군에 넘어와 팔로군 전선총부 참모처장을 담임하였다. 1955년 소장 군사계급을 수여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백천장군’이라 친절하게 불렀다.

류감과 위위를 만나본 후 한락연은 전지복무단 훈련반에서 보고를 하였다. 그는 항일의 도리와 중국사람들의 의지와 기개를 이야기했고 일치단결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자신의 인생 경력을 결부하여 진행한 그의 보고는 재미 있고 유모아적이여서 듣는 사람들은 매우 흥미진진해하였다.

위위는 장개석이 비밀리에 공산당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한락연에게 알리였고 한락연은 팔로군 전선지휘부를 찾아가 이 정보를 팽덕회에게 전했다. 그 후 장개석은 93군에 명령을 내려 염석산군을 도와 당천제(唐天际)가 령도하는 진예변구(晋豫边区)에서 싸우고 있는 항일유격종대를 차단하라고 할 때 위위는‘작전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구실로 명령을 하루 동안 하달하지 않았다. 하여 당천제의 진예대오(晋豫队伍)는 안전하게 전이할 수 있었다.

한락연 자화상

1939년 겨울, 국민당이 제1차 반공고조를 일으키면서 량당 관계는 긴장해졌다. 이 때 한락연은 제2차로 진동남 전선에 가서 조사를 하였는데 군인 두사람이 동행하였다. 그중 한사람은 연안항대(延安抗大)를 졸업하고비밀리에 국민당 군대에 파견된 숙중휘(宿仲辉)였다.

당시 93군내의 비교적 진보적인 청년 군인들은 여러가지 박해를 받으며 처지가 매우 곤난하였다. 위위는 한락연을 통하여 당면 처해있는 어려운 곤경을 팔로군 전선지휘부에 전하였으며 봉기하여 팔로군에 넘어갈 의향을 다시 한번 표시하였다. 한락연은 팔로군 방어구역에 도착하자 인츰 오양(五羊) 부근에서 팽덕회와 좌권을 만나고 93군의 정황을 회보하였다. 팽덕회는 당시 전반 국세의 발전 정황을 분석하고 국민당 군대 내부 공작의 중요성을 제기하면서 위위와 진보적 군인들이 최대한 93군에서 계속 투쟁을 견지할 것을 바랐다.

당시 산서의 염석산은 ‘산서성 희생구국동맹회’(山西省牺牲救国同盟会, 략칭은 희맹회)를 세웠다. 중국공산당은 많은 간부들을 이 조직에 파견하여 민족구망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락연은 조사를 통하여 당시 민중들의 처지와 군사면의 정황을 료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희맹회’의 정황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국민당군사위원회 전지당정위원회’는 원래 한가한 기구로서 사람들은 평소에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한락연의 보고를 받아보고 반향이 강렬하였다. 하여 계속하여 보고를 쓸 것을 요구하였다. 1939년 9월까지 한락연은 이러한 보고를 3편이나 써서 발표하였다.

이렇게 한락연은 지금으로부터 80여년전에 이미 국민당 소장 지도원의 신분으로 산서, 하북 등 일부 지방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며 동분서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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