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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6)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7-13 21:29:34 ] 클릭: [ ]

▧ 김동수

4. 999송이 장미꽃중의 한송이

1939년, 한락연은 중경에서 류옥하와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렸다.

류옥하는 1905년 광동성 대산현(台山县)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여느 녀성들보다 개명했던 그의 어머니는 녀성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갖은 방법을 다하여 그녀를 학교에 입학시키였다. 소녀시절 생활은 비록 어렵고 간고했지만 그녀는 부지런히 학업에 열중하였다.

1939년에 찍은 약혼 기념사진

1925년,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이름 높았던 남경금릉녀자대학 생물계에 입학하였다. 지금의 남경사범대학의 전신인 남경금릉녀자대학은 중국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녀자대학으로서 20세기초에 미국 교회조직에서 련합으로 세운 대학이였다. 주홍색 기둥과 구리빛 기와를 떠인 대학건물은 1922년에 시작하여 건설하였는데 미국 건축설계사 머베이(墨痱)와 중국 건축설계사 려언직(吕彦直)선생이 함께 중국 전통적인 궁전식 건축풍격을 모방하여 설계하였다고 한다.

1919년부터 1951년까지 사이에 금릉녀자대학을 졸업한 녀학생이 도합 999명이였는데 현지 사람들은 그들을 999송이 장미꽃이라고 불렀다. 이 대학에서4년간 학습하고 1929년에 졸업한 류옥하는 명실공히 999송이 장미꽃중의 한송이였다.

부인 류옥하(한락연의 유작)

당시 중국은 제국주의의 무참한 발길로 상처와 피고름으로 얼룩 지던 시기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조국의 비참한 모습과 고난과 고통에서 신음하는 부녀와 아동들의 처참한 운명을 직적 목격한 그녀는 우월한 대우로 학교에 남을 수 있는 기회도 단연히 포기하고 상해녀성청년회 전국협회에 참가하여 향촌부 간사로 임명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광동 대산현과 상해 교외 대장진(大场镇), 그리고 산동 복산현(福山县) 등 곳에서 광범한 농촌 부녀들과 아동들에게 문화,교육,위생 등 교육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녀들에게 수공기술을 전파하고 발전시켜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1934년 그는 녀성청년회 전국협회의 파견으로 미국 콜롬비아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2년의 과정을 1년 내에 마치고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뒤줄 왼쪽 네번째가 등영초, 일곱번째가 류옥하, 여덟번째가 송미령이다.

이 시기 그는 미국에 계속 남아 사업하라는 미국 이민국의 요청을 받았으나 나라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하려는 불타는 일념으로 단연히 귀국하였고 계속 녀성청년회 전국협회에서 향촌부 주임간사로 임명되여 항일애국 선전활동에 종사하였다. 상해에서 ‘8.13’사변이 발생한 후 향촌부는 상해난민구제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난민수용소를 세웠는데 그녀는 혼신을 다해 난민 안치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1938년 전국녀성청년협회는 상해로부터 무한으로 옮겨가 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 그녀는 이 단체에 가입하여 여러가지 곤난을 무릅쓰고 선후로 호남성 한수현(汉寿县),호북성 조시(皂市), 사천성 장수현(长寿县) 등 곳에서 항일 선전대와 공작대를 조직하고 첩첩한 곤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항일구국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시기 그녀는 녀성청년회 전국협회의 대표로 려산에서 진행된 전국 각계 부녀 항일구국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등영초, ‘7군자’중의 유일한 녀성인 사량(史良),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풍옥상의 부인 리덕전(李德全) 등 인사들을 만나 심후한 관계를 맺으며 그 후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방조를 받았다. 이는 류옥하의 일생에서 일대 전환점으로 되였다.

그녀는 등영초를 초청하여 무한, 중경 등지에서 강연을 조직하고 항일선전사업을 위해 그의 지도를 받았다.

젊은 시절의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조위(赵炜)가 집필한 《등영초의 이야기》(邓颖超的故事)에는 1938년 등영초가 전시아동복무단 성원들과 전국 각계 부녀 항일구구대표대회에 참가한 대표들과 함께 려산에서 찍은 사진을 게재하였는데 그 사진 속에 류옥하도 들어있었다.

같은 사진을 류옥하의 딸 한건립녀사도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류옥하와 등영초의 밀접했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력사적인 소중한 사진이라 해도 과분하지 않을 것이다.

류옥하는 교회 학교를 다녔고 게다가 미국 류학의 영향으로 독신주의를 신봉하고 일생을 부녀사업에 몸 담그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고 성격도 활달한 열혈남아인 한락연의 출현으로 아름답고 지적인 처녀는 34세의 나이에 자기의 의지와 생각을 개변하게 되였다.

당시 그녀는 항일선전대에서 사업하였는데 항일선전 내용에 대한 그림들이 매우 수요되였다. 마침 한락연이 유럽에서 귀국하였는데 염보항의 소개로 그들은 서로 알게 되였다. 한락연은 많은 선전용 그림을 그려줬는데 매우 큰 역할을 일으켰다고 한다. 서로 접촉하는 가운데서 한락연의 성실한 사업태도와 쾌활한 성격, 그 어떤 곤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품질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녀는 일찍 딸 한건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파멸된 시기,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신심을 잃고 원망 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불평, 불만도 없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자체로 해결해나갔다. 그는 아주 유모아적이였다. 그는 늘 자신의 분투 경력과 국외에서 보고 들은 기문으로 사람들을 고무격려하고 분발시키였다. 그의 온몸에는 정열과 패기와 젊음으로 차넘치였는데 나를 깊이 감동시키였다. 게다가 우리 둘은 모두 어려운 환경 속에서 외국에서 학업을 완수하였고 또 많은 것을 알게 되였으며 함께 나라의 해방을 위하여 공동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처럼 비슷한 생활경력과 인생에 대한 공동한 견해는 나로 하여금 독신으로 살아가려던 생각을 개변하고 그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였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신혼의 꿈이 무르익던 1940년 봄, 남편 한락연이 체포되였다.

남경금릉대학 유적지

그녀는 당조직과 련계하여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리제심(李济深) 등 국민당 좌파인사들의 방조하에1943년 한락연은 석방되고 조직의 파견으로 서북 지구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국민당 고위층 인사와 국민당 고급 장령들에 대한 통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때마다 그녀는 한락연의 훌륭한 조수였고 혁명적 동지로서 크나큰 방조와 도움을 주었다.

1947년 한락연이 서북에서 희생된 후 그녀는 한동안 당조직과의 련계를 잃고 극히 어려운 생활난에 빠졌다. 그는 비록 당원은 아니지만 아주 지적이고 진보적인 녀성이였고 한락연에게는 훌륭한 혁명적 동지였고 동반자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한락연이 불행히 세상을 뜬 후에도 그는 한락연에 대한 더없는 사랑을 간직하고 녀자의 홀몸으로 사력을 다하여 한건립, 한건행 두 오누이를 키우면서 간고하고 이악스레 살아왔다.

1950년 당조직에서는 그들 가족을 북경에 안치하였다. 그녀는 한동안 북경녀성청년회 탁아소 소장을 맡았고 1953년부터는 외교부 복무부의 파견을 받고 북경 주재 쏘련, 뽈스까, 알바니아 등 대사관에서 영어 교수를 하였다.

이 시기 류옥하는 남편이 남겨놓은 유작을 분류하고 번호를 달고 규격과 년대를 밝히는 등 기초 작업을 진행하여 하나의 완정한 목록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135폭의 유작을 무상으로 선뜻이 나라에 기증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 한락연은 일생을 당과 공산주의사업을 위해 분투하였다. 그는 한 개인인 것이 아니라 당과 인민에 속한다. 때문에 그의 그림도 응당 나라의 것이고 인민의 것이다.”

현재 중국 국가미술관에는 그녀가 기증한 한락연의 유작 135폭이 소중히 수장되여있다.

류옥하가 생전에 사업하던 중국건설 잡지의 표면

그녀는 근근히 그림 몇폭을 자식들에게 남겨주면서 아버지처럼 당과 인민을 위하여 공헌하라고 자식들을 교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너의 아버지는 조선족인데 너희들은 이것을 꼭 명심하고 명기하라면서 두 자식의 신분증에 ‘조선족’이라고 단연히 써넣었다.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현재 오스트랄리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건립의 딸도 역시 신분증에 ‘조선족’이라고 밝히였다.

후일 그의 두 자식은 모두 수도 북경에서 나라의 중임을 떠메고 성스럽게 일하였다. 그녀는 이것을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가장 큰 보답과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1956년부터 1972년 퇴직할 때까지 그녀는 《중국건설》잡지사에서 대외발행과 도서자료 사업을 하였다. 전대미문의 혼란 세월에 그녀 역시 상상도 못할 억울함과 뼈를 깎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그토록 너그럽고 후더웠으며 생활을 대함에 있어서는 그토록 락관적이였다. 그는 조직에 대한 그 어떤 원망이나 불평 한마디없이 꼭 어느 땐가는 당에서 자신의 일생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하리라는 굳은 신념을 잃지 않았다.

만년의 류옥하

1988년 2월 15일 류옥하는 83세로 북경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추도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찍 1937년에 혁명에 참가한 그녀는 중국공산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열애하고 생활을 열애하였다. 그는 그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혁명에 대한 신심으로 충만되였으며 소박하고 열정적이였으며 종래로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빛과 열로 일생을 살았다. 반세기 남짓한 혁명의 길에서 중국혁명을 위해 바친 그의 업적은 영원히 사람들의 존경과 애대를 받을 것이다.”

가령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뽑으라면 모르긴 해도 장미꽃이 두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을 고백할 때나 정든 님께 드리는 선물로 가장 합당하고 분위기를 제일 잘 리드할 수 있는 꽃은 두말할 것 없이 장미꽃이다. 그 꽃은 녀심을 대표하고 상징한다고 한다.

류옥하는 999송이 장미꽃중의 한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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