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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00년](33)등소평의 남방 담화--중국의 남해변에서 시편을 써내려가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인민일보 ] 발표시간: [ 2021-06-24 12:57:51 ] 클릭: [ ]

1992년 1월 19일 오전, 등소평 동지는 심수에 도착했다. 일정대로라면 하루 휴식이였지만 그는 “여기저기 다녀보고 싶었다.” 첫 역으로 영빈관에서 황강통상구로 갔다.

이는 중국인민들에게 끊임없이 회억되며 반복적으로 진술되는 한단락의 력사이다. 이해 봄에 등소평 동지는 선후로 무창, 심수, 주해, 상해 등지를 시찰하고 일련의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는데 이를 통털어 남방 담화라고 한다. 등소평의 남방 담화와 제14차 당대표대회를 표지로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은 새 단계에 들어섰다.

특구는 성이 ‘사’이지 ‘자’가 아니다

심수사람들 기억에 1992년 등소평 동지의 시찰은 전반 도시를 분발시켰다. 심수국제무역중심청사, 중국민속문화촌과 금수중화 풍경구 등 그가 가는 곳마다에서 당지 군중들은 길을 메우며 반겼다.

등소평 동지의 남방행은 단 몇몇 도시를 시찰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였다. 당시 복잡한 국내외 형세의 영향 속에서 당의 기본로선을 동요없이 견지하고, 기회를 다잡고 발전을 다그치며,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을 계속해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느냐는 1990년대 중국의 발전과 진보를 영향주는 중대한 문제로 되고 있었다.

당시 등소평 동지의 담화 요점 기록을 책임졌던 심수시당위 선전부 부부장이였던 오송영은 이렇게 회억했다. 등소평 동지는 심수에 도착한 첫날로 장기간 사람들 사상을 괴롭히고 속박해 오던 중대한 인식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

등소평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 발걸음을 내디디지 못하고 대담히 일을 벌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길로 가게 될가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요해는 바로 성이 ‘자’인가 아니면 ‘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판단의 표준은 응당 사회주의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사회주의국가의 종합국력 증강에 유리한가, 인민들 생활수준 제고에 유리한가를 봐야 한다.

경제특구 건설 문제를 두고 등소평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특구 건설에서 처음부터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 자본주의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였다. 심수의 건설 성과는 이런저런 걱정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답복을 주었다. 특구는 성이 ‘사’이지 ‘자’가 아니다.

등소평 동지는 담화에서 계획과 시장의 관계 문제를 투철하게 진술했다. “계획이 더 많은가 아니면 시장이 더 많은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 구별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바로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착취를 소멸하고 량극분화를 제거하고 최종 다같이 부유해지는 것이다.”

등소평 동지는 또 기본로선은 동요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사회주의를 견지하지 않고,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고, 인민들 생활수준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더는 다른 출로가 없다.”

“개혁개방을 하려면 담력이 있어야 한다. 용감하게 시험해야지 주저주저하며 좀자르지 말아야 한다. 목표를 정했다면 즉시 대담히 시험하고 대담히 부딪쳐 봐야 한다.” 등소평 동지가 정중히 독촉하며 한 말이다.

“속도를 좀 더 다그칩시다!”

등소평 동지는 1984년에 심수를 시찰한 적 있다. 1992년에 다시 왔을 때 심수에는 이미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제날의 오불꼬불하던 골목길과 낮다란 집들이 쭉쭉 뻗은 큰길과 군데군데 고층건물들로 탈바꿈해 있었다. 등소평 동지는 감개무량해서 이렇게 말했다. “8년이 지났다. 그간 심수, 주해 특구와 기타 일부 지방에서 발전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 밖이다. 보고 나니 신심이 더 생긴다.”

우리의 개혁개방 총 설계사는 경제발전을 다그치고 개혁개방을 심화함에 대해 아직도 더욱 높은 기대가 있었다.

1992년 1월 23일, 등소평 동지는 심수에서 주해로 떠났다. 사구항 부두에서 등소평 동지는 심수시 책임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는 부두로 향했다. 몇걸음 나아가던 그가 홀연 되돌아왔다. 그는 당시 심수시당위 서기였던 리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속도를 좀 더 다그칩시다!”

심수에서 주해로 가는 쾌속정에서 등소평 동지는 광동 지도를 가리키며 당시 광동성당위 서기였던 사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광동은 몇단계 더 올라 20년 안에 아시아 ‘작은 룡 네마리’를 힘껏 따라 잡아야 한다.

“당시 우리 로소장은 등소평 동지에게 황강통상구의 최고 류동량은 차량 5만대와 연인수로 5만명 사람이라고 회보했습니다. 그후 최고 려객 류동량은 연인수로 20여만명에 달했고 근 30년간에 차량 총 류동량은 3억대를 초과, 려객 류동량은 연인수로 15억명을 초과했습니다.” 심수 변방검사총참 황강검사소 소장 웅지우가 심수와 향항을 잇는 락마주대교 교두에 서서 하는 말이다. 당년에 등소평 동지가 바로 이 자리에 서서 대안의 향항을 정겹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몸을 돌려 심수 시가지를 바라보니 고층건물이 수풀을 이루고 거리는 사람들 물결로 일렁인다. 오늘의 심수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국제화 대도시로 되여있다. 2020년 심수시 지역 총 생산액은 27670.24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남방 담화 전해인 1991년에는 236.663억원이였다.

심수 뿐만 아니라 전반 광동, 지어 전반 중국이 30년이 채 안되는 사이에 세상사람들이 괄목할 만한 발전 성과를 이룩하였다. 등소평의 남방 담화와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를 표지로 중국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진입했던 것이다.

/인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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