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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4)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6-16 16:40:10 ] 클릭: [ ]

▧ 김동수

2. 보탑은 기억할 것이다

무한에서 활동하던 한락연에게 당시 중국 혁명의 ‘심장’이였던 연안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38년 11월, 주은래와 곽말약 등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 제3청에서는 작가, 음악가, 미술가 등 문화예술일군들을 조직하여 연안을 방문하였다. 그 속에 한락연도 들어있었다.

한락연은 음악가 색극(塞克) 등과 함께 동행했는데 연안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연안녀자대학에서 〈항일전쟁 시기 민족문화예술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강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의 결핍으로 강연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락연 일행은 토굴집에서 모주석의 접견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일제의 폭격기가 수시로 연안을 폭격하였다. 한락연 일행은 폭격을 피하여 산에 있는 토굴집으로 대피하였다. 국민당 93군의 진보적인 청년인 양공소(杨公素)와 여극견(余克坚), 하눌(夏讷) 등 사람들이 한락연과 함께 같은 토굴집에 대피하였다.

양공소는 연안에서 한락연을 만났던 정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1938년 겨울, 나와 여극견, 하눌 세사람은93군의 참모장 위위의 허가를 받고 연안을 참관하였다… 폭격을 피하여 토굴집 초대소에 주숙하였는데 그때 우리는 한락연과 색극 등 동지들과 함께 한방에 들었다. 한락연은 년장자였는데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우리에게 국내외의 많은 흥미롭고 재미 나는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당시 한락연은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포만되였으며 말할 때에는 동북 말씨가 불쑥불쑥 튀여나왔고 태도가 온화하였다. 그는 늘 앞가슴에다 사진기를 걸고 다녔다. 자기 소개 할 때는 종군기자라고 하였다. 한락연의 락관적인 정서는 주위에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그 당시 연안은 혁명의 성지로서 수많은 진보적 청년들이 동경하고 불원천리하고 이곳에 와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면서 자신들의 청춘을 불태웠다.

정률성의 딸 정소제녀사와 함께 있는 필자

연안에도 많은 우리 민족 열혈청년들이 있었는데 항일군정대학 음악교수로 있던,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한 정률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비록 종사하는 사업과 연구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두사람이 연안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필자는 두번이나 북경에 찾아가서 정률성의 딸 정소제녀사를 방문하고 그에게 한락연이 연안에서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택에서 함께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럴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서안―연안행 뻐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번잡한 시내를 겨우 벗어나 한참을 달리니 벌써 서북 지방의 특이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초봄이라서인지 산은 어딘가 모르게 처량하고 황페해보였다. 그래도 드문드문 겨울 밀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다락밭들이 계절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듯 그 모습을 자랑했다.

연안에 가까와올수록 황토 골짜기는 더더욱 깊어지고 좁아졌다. 뻐스는 동굴 속을 빨려들었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오불꼬불 타래길을 숨차게 오르내리더니 나와 일행을 연안 시내에 내려놓았다.

연안 보탑산 앞에서

연안은 보탑산(宝塔山), 청량산(清凉山), 봉황산(凤凰山) 등 산으로 둘러싸였고 연하가 동으로 감돌아 흘러간다. 동쪽 보탑산에 아홉층으로 된 연안의 상징―보탑이 있고 동북쪽 청량산에는 만물동과 사철 푸른 소나무숲이 있다.

1935년 10월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로농홍군을 거느리고 2만 5천리 장정을 하여 섬북에 도착하였다. 그때로부터 연안은 중국 혁명의 심장과 사령부로 되였고 승리의 책원지로 되였다.

우리는 한락연과 많은 혁명가들이 다녀갔던 력사가 깊은 연안교제호텔(交际宾馆) 유적지로 찾아갔다.

이 호텔 전신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서북판사처 외교부 초대소로서 보안성에 있었다.

1937년 5월, 초대소는 중앙기관과 함께 연안성내의 대동문에 터를 잡고 이름을 섬감녕변구정부 교제처(陕甘宁边区政府交际处)로 바꾸었다. 에드가 · 스노(爱德加·斯诺),스머트라이(史沫特莱), 노르만 · 뻬쮼(诺尔曼·白求恩), 루이 · 애리(路易·艾黎) 등 많은 국제 우호인사들과 위립황, 진가경(陈家康), 로사(老舍), 황염배(黄炎培) 등 유명인사들이 선후로 이곳에 머물렀다. 교제처는 우리 당의 외교 사업과 통일전선 사업을 위하여 중요한 력사적 작용을 하였다.

현재 교제처 유적에는 작은 회의실 하나와 황토 토굴집(黄土窑洞) 10여개가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하고 가로등이 명멸하는 산기슭을 찾아가니 봉황산삼림공원이였다. 화강석으로 다듬은 계단을 타고 절정에 오르니 첫눈에 불빛이 령롱한 보탑이 보였다. 그 밑으로 연하 기슭을 따라 펼쳐진 꾸불꾸불 채색띠같은 연안시의 야경이 황홀하였는데 현대화 도시로 향해 몸부림하는 오늘의 연안은 너무나 매력적이였다.

길가에서 폭죽소리가 요란하여 살펴보니 상가집에서 상객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우리 고향같으면 설명절이거나 결혼식 같은 기쁜 날에만 터치우는 폭죽을 이곳에서는 상사에도 터치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아직도 화장을 하지 않고 토장을 한다고 한다. 아마도 고원지대라서 쓸모없는 땅이 많은가부다.

이튿날, ‘중국 혁명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연안혁명박물관을 참관한 후 나는 일행과 함께 연안시당학교 뒤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연안녀자대학 유적지를 찾아갔다.

연안중국녀자대학은 1939년 7월 20일에 세워졌는데 당에서 전문 녀성간부를 배양하기 위해 세운 첫번째 녀성대학교였다. 왕명이 교장을 맡았는데 2기에 거쳐 근 1,500여명의 학생을 배양하였다고 한다.

유적은 연안의 전통적인 토굴집이였는데 여러 칸이 남아있었고 일부 곳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부쩍 호기심이 동해 연안당학교에서 퇴직했다는 황선생의 토굴집에 들어가보았는데 7, 8평방메터 되여보이는 방안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하여 너무나 살 만했다. 어딘가 담담하면서도 구수한 황토 냄새가 페를 깊숙이 자극했다.

이전에는 사면이 누런 황토가 그대로였는데 지금은 새하얀 페인트를 칠하여 방안이 훨씬 밝고 위생적이고 깨끗하다며 황선생은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는 덥지 않은 것이 토굴집의 우점인데 황토고원지대 토배기들인 자기들은 아빠트를 비워두고 량주가 이곳에서 산다면서 자랑스레 말하였다. 이보다 더 좋은 천연 황토찜질방이 어디에 있냐며 말해보란다.

그 곳을 나와 일행은 조원(枣园)과 양가평(杨家坪)도 둘러보며 로일대 무산계급 혁명가들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 모습들을 체험했고 중국 혁명을 위해 바친 그들의 업적을 되새겨도 보았다.

황토고원의 타는 듯한 진붉은 저녁 노을이 아아히 솟은 보탑을 붉게 물들였다.

《동방》 화보 1939년 제2권 제7기

연안에서 돌아와 얼마 후에 나는 한건립녀사의 도움으로 《동방화보》와 《량우》 화보에서 한수공(韩树功, 한락연은 프랑스 류학 시기에 한수공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그 때 이름을 사용한 것 같다)이라는 이름으로 게재한 사진자료들을 수집하였다.

《동방화보》는 1938년 4월 향항에서 창간되여 1941년 7월에 정간된 종합성 촬영화보이다. 초기 주필 겸 발행인은 사곡요(史谷尧)였다. 《동방화보》는 전시사진, 시사사진, 열독원지, 전시미술작품, 국제뉴스 등 전문란을 설치하였다. 주로 항일전쟁 사진, 신문사진 뿐만 아니라 최신 국제형세와 과학발명을 담은 사진, 그리고 사람들의 정신 풍모와 그들의 활동모습을 진실하고 생동한 사진으로 소개하였다. 《동방화보》는 중문과 영문 두가지 문자를 사용하였다.

《동방화보》 1939년 제2권 제7기는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상, 새로운 섬북〉이라는 표제를 달고 한수공이 촬영한 9장의 사진을 게재하였는데 화면이 너무나 생동하였다. 그 가운데는 모택동 주석이 항일군정대학에서 연설하는 사진 2장과 림표, 하룡, 서특립이 함께 찍은 사진 1장, 그리고 항일군정대학 학생들의 학습, 훈련,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 6장이 들어있었다.

《량우》 화보 1939년 제148기

이 뿐이 아니다. 《량우》 화보는 1926년 2월에 창간되였고 1945년 10월에 정간되였다. 《량우》 화보 1939년 제148기(13, 14, 15페지)에는 〈연안의 문화활동〉이라는 표제로 된 한수공이 촬영한 13장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역시 중, 영 두가지 문자를 사용하였다.

두 화보가 모두 중, 영 두가지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화보의 발행과 구독 범위가 매우 넓고 광범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량우》 창간호는 초판에 3,000부를 발행하였는데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여 7,000부까지 발행하였다고 한다.

상술한 사실과 자료에서 한락연이 연안 방문 시,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았고 그의 신변에서 사진촬영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안녀자대학에서 강연도 하였다는 사실과 신뢰도가 보다 명랑하고 확실시되였다. 따라서 한락연의 위대한 공적과 업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보탑은 연안의 상징이다. 유구한 세월과 서북 지역의 매서운 눈, 비바람의 세례를 이겨낸 보탑은 오늘도 말없이 연안과 연안사람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보탑은 정녕코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안의 어느 곳엔가 남아있을 한락연의 잔잔한 숨결과 불굴의 령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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